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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오죽헌, 문성사와 어제각

younghwan 2010. 9. 10.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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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릉오죽헌은 조선중기 최치운이 창건한 이래 아들과 사위 등에게 물려주면서 오랜 기간동안 이 지역에서 명맥을 이어오던 것을 1970년대 오주헌 정화사업에 따라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으며 그 모습이 오천원권 지폐에 담겨짐에 따라서 안동의 도산서원과 함께 실생활에서 그림으로 가장 많이 접해왔던 유적지이다.
 
 율곡 선생과 신사임당이 태어난 오죽헌을 중심으로 고택, 영정을 모신 사당인 문성사, <격몽요결>과 벼루를 보관하는 어제각, 기념관이 하나가 되어 강릉과 영동지역을 대표하는 역사유적지라 할 수 있다. 경포호수 입구에 자리잡고 있는 이 곳 오죽헌은 현재도 성역화되어 있는 곳이지만 정조가 명을 내려서 어제각을 세운것을 보면 조선시대에도 이 곳 영동지역을 찾는 많은 선비,묵객들이 이 곳을 찾았던 것으로 보이며, 율곡 선생 어머니인 신사임당의 손길이 담겨있는 매화나무와 배롱나무가 오죽헌 주위에 아직도 남아 있다.


오천원 지폐 배경 그림이 되는 장면인 오죽헌 전경.


유적지 입구에 있는 율곡 이이선생의 동상과 기념비석


율곡 이이 선생과 신사임당이 태어난 곳인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인 오죽헌



율곡 이이선생의 영정이 모셔진 사당인 문성사. 1970년대에 세워진 사당으로 원래 이 곳에는 어제각이 있었다고 한다.


율곡 이이 선생의 영정. 9번의 과거 시험에서 장원급제를 한 역사상 전무후무한 천재였넌 율곡 선생은 영정으로 보면 상당한 미남이셨던 것으로 보인다.

율곡 이이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이 자리에는 원래 어제각이 있었는데 1975년 오죽헌 정화사업 때 서쪽으로 옮기고 문성사를 지었다. '문성'은 1624년 인조임금이 율곡에게 내린 시호로 '도덕과 학문을 널리 들어 막힘이 없이 통했으며 백성의 안정된 삶을 위하여 정사의 근본을 세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출처:강릉시청>


오죽헌 주위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율곡매와 배롱나무, 소나무 등 신사임당과 율곡선생의 손때가 묻어있는 오래된 고목들이 아직도 남아 있다. 특히 신사임당은 이 매화나무를 매우 좋아하여 많은 그림을 남겼다고 한다.

오죽헌이 들어설 당시인 1400년경에 이 매화나무도 같이 심겨졌다하며, 신사임당과 율곡이 직접 가꾸었다고 전해진다. 신사임당은 고매도, 묵매도 등 여러 매화 그림을 그렸고, 맏딸의 이름도 매창(梅窓)으로 지을 만큼 매화를 사랑하였다. 신사임당이 태어날 당시부터 이미 상당히 굵었을 고목 매화를 보아온 추억을 살려 훗날 매화 그림으로 승화시켰을 것으로 짐작되는 역사성이 깊은 나무이다. 매화의 여러 품종 중 꽃 색깔이 연분홍인 홍매(紅梅) 종류이며, 3월20일 전후 꽃이 필 때는 은은한 매향이 퍼져 오죽헌을 더욱 경건하게 한다. 다른 매화나무에 비하여 훨씬 알이 굵은 매실이 달리는 귀중한 자원이라는 점에서 학술적인 가치가 크다. <출처:문화재청>


어제각. 정조대왕의 명에 의헤 율곡선생의 저서 <격몽요결>과 벼류를 보관하기 위해 지었다고 한다.

율곡 이이의 저서 <격몽요결>과 어린시절 사용하였던 벼루를 보관하기 위하여 지은 것이다. 1788년 정조임금은 율곡이 어렸을 때 쓰던 벼루와 친밒로 쓴 <격몽요결>이 오죽헌에 보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듣고, 그것을 궁궐로 가지고 오게하여 친히 본 다음, 벼루 뒷면에는 율곡의 위대함을 찬양한 글을 새기고, 책에는 머릿글을 지어 잘 보관하라며 돌려 보냈다. 당시 임금의 명을 받은 강원도 관찰사 김재찬이 이를 보관할 수 잇는 집을 지었는데, 그것이 어제각이다. <출처:강릉시청>


오죽헌 저택. 'ㄱ'자형 안채와 별채, 그리고 입구의 행랑채와 붙어 있는 사랑채로 구성되어 있다.


강릉 오죽헌 전경

강릉 오죽헌은 우리나라 어머니의 사표가 되는 신사임당이 태어나고 또한 위대한 경세가요 철인이며 정치가로서 구국 애족의 대선각자인 율곡 이이 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사임당 신씨는 성품이 어질고 착하며 효성이 지극하고 지조가 높았다. 어려서부터 경문을 익히고 문장, 침공. 자수 뿐만 아니라 시문, 그림에도 뛰어나 우리나라 제일의 여류 예술가라 할 수 있으며 자녀교육에도 남다른 노력을 기울여 현모양처의 귀감이 되고 있다. 율곡 이이 선생은 어려서 어머니에게 학문을 배워 13세에 진사초시에 합격하고 명종 19년 생원시, 식년문과에 모두 장원급제한 후 황해도 관찰사, 대사헌 등과 이조.형조.병조의 판서를 역임하였다. 조선 유학계에 퇴계 이황 선생과 쌍벽을 이루는 대학자로서 기호학파를 형성했고 당쟁의 조정, 10만군대의 양병을 주장하였으며 대동법, 사창의 실시에 노력하였다. 글씨, 그림에도 뛰어났으며 효성이 지극하였다. 문묘에 종사되었고 선조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파주의 자운서원, 강릉의 송담서원 등 20여개 서원에 제향되고 있다. 오죽헌 강릉 유현인 최치운의 창건으로 아들 응현은 사위 이사온에게 물려주고 이사온은 다시 그의 사위 신명화에게, 신명화 도 그의 사위 권화에게 물려주면서 그 후손들이 관리하여 오던 중 1975년 오죽헌 정화사업으로 문성사, 기념관 등이 건립되어 현재와 같은 면모를 갖추고 선생의 위업과 교훈을 길이 추앙하게 된 것이다. <출처:강릉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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