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카테고리

rss 아이콘 이미지


 둔황 막고굴 중 높이 34.5m로 거대한 불상이 있는 북대 시절에 지어진 석굴이 있는 남쪽편 석굴들이다. 북대굴을 중심을 북쪽편 석굴들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모양과 크기를 하고 있는 석굴들이 이어져 있다. 남쪽편 석굴에는 북대굴을 비롯하여 거대한 와불이 있는 석굴 등 대형 석굴이 여러 군데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 곳 막고굴의 석굴들은 전진시대 이후에 조성되기 시작하였다고 하며 수많은 벽화와 불상들이 내부에 있었는데, 이 곳을 안내하는 가이드 말에 의하면 상당수는 북송(서대) 이곳을 지배했던 국가인 서하 시설에 벽화와 불상들이 만들어 지고 보수했다고 한다. 그래서 들어가 본 석굴은 몇 곳 되지 않지만 남북조 시대의 유물보다는 후대에 만들어진 곳이 많고 원.명을 거쳐서 청나라 때까지 보수가 이루어 진 것으로 보인다.


둔황 막고굴을 대표하는 석물인 북대불. 정면에서 보면 누각이 10층이상으로 보이는 이 곳 내부에는 거대한 불상이 모셔져 있다.


와불이 있는 둔황 막고굴의 남쪽편 석굴들. 북쪽편과는 큰 차이는 없어 보이며 다양한 형태의 석굴들이 마치 아파트처럼 이어져 있다.


둔황 막고굴의 북대궁 오른쪽 편에 보이는 석굴. 목조 건축물처럼 기와지붕이 있는 출입문이 있고 입구가 3칸이나 되는 것으로 보아 상당히 규모가 큰 석굴로 보인다. 그 위쪽에는 큰 벽화가 남아 있다.



위층의 석굴과 그 위의 바위를 보면 출입통로를 현재처럼 하지 않았을 때의 둔황 석굴의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다.


주은래 수상 시절에 만들어진 막고굴 석굴 입구를 연결한 통로와 계단들


둔황 막고굴은 수백개의 석굴로 이루진 곳이지만, 한번 방문시 실제로 들어가 볼 수 있는 굴은 5~10개의 굴만 들어갈 수 있다. 워낙 많은 굴이 있고, 내부에 많은 벽화들이 있었던 까닭에 실제로 막고굴을 나서면 내가 어떤 굴에 들어가 보았고, 무엇을 봤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해지고 생각이 나지 않고 북대굴의 거대한 석불과 그 남쪽에 있는 거대한 와불만이 또렷히 기억에 남게된다. 이런 경험은 예전에 이집트 룩소르 서안 왕가의 계곡에 있던 고분들을 보고 난 후 느낌과 비슷하다는 생각이다. 역시 사진을 찍어와 확인할 수 있는 것을 다시 한번 느낀다.


크게 보기




둔황시의 동남쪽 25km에 위치한 명사산 동쪽 벼랑에 남북으로 1,600m에 걸쳐 조성된 막고굴과 서천불동, 안서유림굴, 수협구굴 등 600 여개의 동굴이 있고, 그 안에 2400 여개의 불상이 안치되고 있다. 벽 한 면에 벽화가 그려져 있고, 총 면적은 45,000 ㎢이다. 둔황석굴, 둔황천불동이라고도 하며, 막고굴이라는 것이 광의의 의미에서는 전부를 포함하기 때문에 간단히 막고굴이라고 한다. 막고굴이 만들어진 시기는 오호 십육국 시대 전진(前秦)의 지배하에 있던 355년 또는 366년으로 추정되며, 승려 낙준이 석굴을 파고 불상을 조각한 것을 시작으로, 그 후 법양에서 원나라 시대에 이르기까지 1,000년에 걸쳐 조성되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굴은 5세기 전반에 여기를 지배한 북양의 것으로 그 이전의 것은 후세에 새롭게 굴을 파면서, 훼손된 것으로 보인다. 막고굴의 북부는 장인의 주거지로서 이곳에는 불상과 벽화가 없다. 벽화의 양식으로서는 오호 십육국 시대 북양과 계속된 북위 때에는 서역의 영향이 강하게 나타나며, 제작된 불전, 천불 등이 그 영향을 그대로 드러낸다. 북주와 수당에 이르면서 중국의 영향이 강하게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석가설법도 등도 이때 그려지게 된다. 통치 기간이 가장 긴 당나라 때의 석굴이 225개 굴로 가장 많으며, 그 다음으로 수나라가 97개를 차지한다. 북송 때 서하 지배하에 들면서, 둔황의 가치가 하락하여, 점차 그 수가 적어지고 서하 때의 것은 20개, 원나라 때 석굴이 7개로 추정되고 있다. 그 후 몽골의 침입과 이슬람의 침입을 거치면서, 둔황은 완전한 쇠퇴해진 도시가 되었고, 이후 오랫동안 막고굴은 잊혀진 존재가 되었다. 이 막고굴이 다시 한번 주목을 받은 것은, 1900년, 둔황의 문헌이 장경동에서 발견되면서 부터이다. 발견 이후에도 막고굴은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고, 그 가치가 인정되고, 보호가 시작된 것은 1945년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훨씬 이후의 일이었다. 1965년 문화대혁명을 거치면서 또 한번의 위기가 찾아왔지만, 문화재 보호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던, 저우언라이의 은밀한 보호지시로 추가로 파괴되는 봉변은 피하게 되었다. <출처: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