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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China)

[실크로드 투루판] 아스타나 고분군

younghwan 2010. 7. 23. 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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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투루판 도심에서 동남쪽에 위치한 아스타나 고분군은 당나라 시대 이 곳 투루판 분지의 중심이었던 고창고성 부근 포도밭 한 가운데에 위치한 고창국과 당나라때의 무덤군이다. 아스타나 고분군에서는 무덤이 약 456기가 발굴되었다고 한다. 전체가 제대로 발굴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이 곳 무덤들에서 무게가 총6톤이 넘는 2,700여 건의 문서가 출토되었다고 하는데 소그드, 위구르어로 쓰인 불교, 마니교, 경교 등의 종교 문서가 있어 사료적 가치가 상당히 높다고 한다.

 이 곳 아스타나 고분군 입구를 들어서면 정면에 12지신상과 함께 이 곳에서 발굴된 사람 얼굴에 뱀의 꼬리를 달고 있는 여와복희상 서 있고, 그 뒷편으로 주변 지역을 감상할 수 있는 이층 누각이 있다. 복희와 여와는 인류의 시조로 여겨지는 신으로 이 곳 고분군에서 여와복희도가 출토되었다고 한다.

 아스타나는 위구어로 휴식처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당대 이전 고창국부터 당나라 시대에 주로 사용된 공동묘지라 한다. 이층 누각에 올라서면 남쪽편에 넓게 고분이 펼쳐져 있는데 우리나라 고분과는 달리 봉분을 크게 만들지 않고 고분인지 구분하기 힘들정도로 낮은 봉분들이 고분군을 형성하고 있다.


이스타나 고분군에서 발굴된 유물을 대표한다고 하여 이스타나 고분군 마당에는 이 곳에서 발굴된 복희여와도에 묘사된 복희여화상이 서 있다.


아스타나 고분군 출입무을 들어서면 복희여와상이 있고, 안쪽에는 이층누각이 있는 마당이 있는데 이 곳은 고분이 발굴된 유적지가 아니고 단순히 공원처럼 조성된 곳이다.


복희여와상 앞.뒤에는 12지신상을 세워 높고 있다.


아스타나 고분군 마당 안쪽에는 이 곳 투루판 지역의 건축 양식이 아닌 중국 본토지역의 건축양식으로 지은 이층 누각이 있다. 이층 누각에 올라서면 북쪽으로는 화염산, 동쪽으로는 고창고성이 있는 지역이 보인다.


이층 누각에서 내려다 본 모습


이층 누각에 올라서면 남쪽편으로 단수히 사막같이 생긴 이스타나 고분군이 보인다. 고분군 중에서 실제로 들어가 볼 수 있는 곳은 2곳이고 나머지는 비공개이다.


아스타나 고분군 중 내부가 공개된 고분은 2개로 그 중 216호분에 유교의 가르침을 풀이한 6첩 병풍이 그려져 있다.


내부가 공개된 216호분


발굴이 끝났고 일반에게는 공개하는 않는 고분


이 곳 아스타나 고분군은 봉분이 동시대의 우리나라 신라 왕릉에 비해서 봉분이 크지 않고, 그냥 사막의 흙덩이처럼 보인다.


아스타나 고분군 출입구


아스타나 고분 바깥쪽에는 위구르인들이 이슬람식 무덤들이 있다.


아스타나 고분군 풍경



 아스타나 고분군은 고창국과 당나라 때의 무덤 456기가 발굴되었는데, 출토유물로 미루어 보면 이 곳이야 말로 문명의 집합장이라는 실감이 난다. 무게가 총 6톤이 넘는 2,700여 건의 문서가 출토되었다. 그 중에서 300여 건은 토카라어나 소그드어, 위구르어로 쓰인 불교와 마니교, 경교 등 종교문서이다. 그런가 하면216 분 묘실 정면에는 유교의 가르침을 풀이한 6첩 병풍이 그려져 있다. 그 중 4첩은 성인도로서 왼쪽 앞가슴이나 등에 '옥인', '금인', '석인', '목인' 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이 것은 공자묘의 네 성인을 말하는 것으로 모두 유교적 윤리도덕을 해학적으로 반영한 것이어서 퍽 흥미롭다. <출처: 실크로드기행, 정수일, 한겨레출판사>


하라훠쭤(哈拉和卓) 고분군-당대 서주(西州)에 위치한 묘지이다. 오늘날 신강 투르판 동남 약 40㎞에 위치하며 고창고성 동북쪽에서 성의 서북 지역에 이르며 동서는 약 5㎞, 남북의 넓이는 약 2㎞ 정도이다. 묘군은 두 개로 구분되는데 하라훠쭤 마을 동쪽은 하라훠쭤 무덤군이고, 마을의 서남 방향은 아스타나 무덤군이다. 아스타나는 고대 위구르 언어로는 정치의 중심지라는 의미이다. 하라훠쭤는 고대 위구르족 대장의 이름이다. 20세기 초 무덤군은 러시아, 독일, 영국, 일본 등 당시 제국주의 들에게 도굴을 당해 상당 수의 문불들이 해외로 유출되었다. 1949년 이해 몇 차례의 발굴을 통해 무덤 400여 개를 정리하였다. 가장 시기가 이른 무덤은 서진(西晋) 태시(泰始) 9년(273), 가장 시기가 늦은 것은 당 건중(建中) 3년(782) 이 곳으로 옮겨 매장된 북정(北庭) 부도호 고요(高耀)이다. 무덤은 대부분 일부일처의 합장묘이며 혹은 1남2녀 혹은 3녀의 묘가 있으며 드물게는 단인장묘도 있다. 형제(形制0는 주로 완만한 계단 묘도인 동굴묘이고, 이른 시기의 것으로는 수혈편실(竪穴偏室) 묘도 있다. 시체의 대부분은 풀위에 안치되어 있으며 목관 혹은 종이관 등도 보인다. 가족장이 유행이었다. 이곳의 피장자는 16국 북량시기의 장군이나 평민들이지만, 고창왕릉의 묘는 발굴되지 않았다. 출토된 문자는 거의 대부분 한자이지만 적지 않은 소수민족의 인명이 보인다. 출토된 13개의 작은 목패(木牌) 가운데, 정면에 붉은 글씨로 "대인(代人)"이라 적혀있고 뒷면에는 소그트 문자로서 한자와 돌궐어가 쓰여져 있다. 이것은 묘주인은 한족으로 거사(車師), 흉노(匈奴), 돌궐(突厥), 소무구성(昭武九姓) 등 소수민족과 같이 있음을 설명한 것이다. 출토문자 정리 후, 2천 여 자를 해독할 수 있어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 이외에도 비단, 묘지(墓志), 전폐, 면(棉)·마(麻) 모직물 등이 출토되었다. <출처:문화원형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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