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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풍경

서울 장충단공원, 을미사변 때 희생된 이를 기리는 사당이 있었던 공원

younghwan 2010. 8. 31.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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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충단공원은 가수 배호의 '안개낀 장충단공원'이라는 노래로 유명한 서울에서도 가장 오래된 공원 중의 하나이다. 서울 도심의 허파 구실을 하는 남산 북동쪽 기슭에 신라호텔과 동국대학교 사이에 있는 그렇게 크지 않은 공원이다. 이 곳에는 을미사변 때 일본군에 대항하다가 죽은 많은 이들의 영혼을 기리기 위한 장충단이라는 사당이 있었고, 지금도 그 흔적으로 장충단비가 공원 입구쪽에 있다.

 일제강정기에는 장충단을 없애고 안중근 의사에게 저격당해 죽은 이토히로부미를 기리는 박문사라는 절을 세우고, 이 곳을 일본식 공원으로 바꾸면서 현재까지 시민을 위한 공원으로 남아 있다. 이 곳 장충단 공원에는 해방후 일제에 항거한 유관순 열사, 이준 열사, 이한응 열사와 사명대사의 동상이 세워져 있어 당시를 생각해주는 장소가 되고 있다. 또한 남산에서 흘러내리는 개천에는 청계천에 있던 수표교가 옮겨져 있다.



장충단비. 장충단 앞에 세워졌던 비석으로 일제강점기에 사당과 함께 뽑혀졌다가 광복 후 다시 찾아와 신라호텔에 세워졌다가 1969년에 이 자리로 옮겨졌다고 한다. 비석에 새겨진 글씨는 조선의 마지막 왕인 순종이 황태자 시절에 쓴 글씨라고 한다.

장충단 건립의 내력을 적은 비석 뒷면의 비문은 당시 육군부장이었던 민영환공이 쓴 글씨라고 한다.

장충단비는 을미사변 때 희생된 영령들을 위로하기 위한 장충단에 세워졌던 비석이다. 1895년 을미사변 때 명성황후가 시해되었고, 궁내부대신 이경직과 시위대장 홍계훈을 비롯한 많은 병사들이 일본군에 대항하다 죽었다. 고종황제는 1900년에 이들을 위하여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내도록 장충단을 세웠는데 이때 비석도 함께 세웠다. 1910년 한일병합과 함께 장충단은 폐지되고 비석도 뽑혔다. 1920년 후반에는 이곳에 벚나무를 심어 공원을 조성하고 이곳을 장충단공원'이라 하였다. 1945년 광복과 함께 장충단비를 다시 찾아 지금의 신라호텔 자리에 세웠고, 1969년에 이곳으로 옮겼다. 비석의 앞면에 새겨진 '장충단' 글씨는 당시 황태자였던 순종황제가 쓴 것이다. 당시 육군부장이었던 민영환이 비석 뒷면에 새겨진 비문을 썼는데, 그 내용은 장충단을 세우게 된 내력과 의미를 기리는 것이다. <출처:서울시청>


장충단비 뒷편에 있는 비석과 석등


사명대사 동상. 동국대학교 입구에서 장충단 공원을 내려다 보고 있다.


을사늑약에 반대하다 자결한 이준열사 동상과 이한응열시 순국비가 공원에 있다.


한국유립독립운동파리장서비. 3.1만세운동시 전국이 유림들이 한국 독립을 호소하는 서한을 작성하여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한 것을 기념한 비석


60년대에 청계천 복개시 그 곳에 있던 수표교를 이 곳 장충단 공원에 옮겨 놓았다.


시민들의 휴식공간이 된 장충단 공원


남산에서 흘러내리는 조그만 개천


장충체육관과 신라호텔


창충단 공원에 위치한 어린이를 위한 리틀야구장

동국대학교와 신라호텔 사이에 있다. 청계천의 수표교를 옮겨놓았고, 서울시 유형문화재 1호인 장충단비가 있다. 안쪽으로는 경로당과 체육 시설, 야외 무대 등이 있으며, 사명대사를 비롯하여 이준, 이한응, 유관순의 동상도 세워져 있다. 장충단 공원은 명성황후가 살해된 을미사변 때 순국한 충신, 열사들을 제사하기 위해 1900년 9월 대한제국 고종이 ‘장충단’이라는 사당을 설치한 데서 비롯되었다. 고종은 어영청의 분소로 서울의 남쪽을 지키는 남소영(南小營) 자리에 장충단을 짓고, 봄가을로 제사를 지내게 했다. 처음에는 훈련대 연대장 홍계훈, 영관 염도희(廉道希), 영관 이경호(李璟鎬)를 주신(主神)으로 제향하고, 김홍제(金鴻濟), 이학승(李學承), 이종구(李鐘九) 등 장병들을 배향했으나, 다음해 궁내부 대신 이경직(李耕稷)을 비롯하여 임오군란, 갑신정변 때 죽은 문신들도 포함하였다.그러나 을미사변을 일으킨 일본의 세력이 강성해지면서 제사는 중단되었다. 1909년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에게 살해되었을 때 거국적인 국민대추도회라는 행사가 장충단에서 열렸다. 국민대추도회 추진 세력들은 장충단에 이토의 사당을 짓고 추모제를 지냈다.한일 병합 후인 1919년에는 장충단 일대에 벚나무를 심어 일본식 공원이 조성되었다. 창경궁과 유사하게 역사적 의미가 있는 장소가 위락 시설로 바뀌었다. 일본은 공원에 상하이 사변 때 사망한 일본군 육탄3용사의 동상을 세웠고, 이토 히로부미를 위한 절인 박문사도 1932년 인근에 세워졌다. 해방 후 일본 군인들의 동상과 박문사는 철거되었으나, 한국 전쟁으로 사당의 부속건물이 파괴되었다. 1959년 청계천이 복개되자 수표교를 철거하여 이곳으로 옮겼으며, 1969년에는 영빈관 내에 있던 장충단비를 수표교 옆으로 옮겼다.장충단의 처음 위치는 유실되었으나, 지금의 장충단공원 남쪽 끝인 어린이야구장 건너편 근처로 추정되고 있다. 공원 입구에 남아 있는 장충단비의 ‘장충단’(奬忠壇)이라는 글씨는 대한제국 순종이 황태자였을 때 쓴 것이다. 비 뒷면에는 민영환의 글이 새겨져 있다. 이 공원을 소재로 한 가수 배호의 노래 〈안개 낀 장충단공원〉이 유명하다. <출처: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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