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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조선의 법궁] 광화문, 2010년 새로이 복원된 경복궁의 정문

younghwan 2010. 9. 7.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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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 들어서 문화재 관련 큰 이벤트 중 하나가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이 제위치에 원형대로 복원이 된 사실일 것이다. 광복절이후 공사중이라서 가려졌던 가림막이 사라지고, 원래 모습의 광화문이 세상에 공개되었다. 

 복원된 광화문을 도로에서 본 첫 느낌은 바뀐것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원래 콘크리이트로 지었던 광화문의 모습과 별 차이가 없고 방향만 경복궁 근정전을 중심으로 한 축에 맞추어졌다는 것이다. 가까이 가서 보면 콘크리이트로 지었을 때와는 확연히 다른 석축 성문에 전통적인 궁궐 건축의 자재인 금강송으로 지었다는 2층의 문루에서 궁궐 건물의 아름다운 모습을 감상할 수 있다.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은 삼문의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성문 위에는 2층 문루가 세워져 있다. 원형대로 복원된 현재의 광화문 모습은 복원되기전 콘크리이트로 만든 광화문과 멀리서 보면 큰 차이가 없어 보이는데 이는 일제가 광화문을 철거하기전에 일본인 실무자가 정밀한 실측도면을 남겨 놓아서, 그 도면을 바탕으로 콘크리이트로 예전에 복원했으며, 현재의 건물 또한 그 도면을 바탕으로 복원했기때문에 그런 느낌을 갖게 만는 것으로 보인다.


정면에서 본 광화문.


조선 제1의 법궁인 경복궁의 위엄을 말해주는 광화문 문루. 콘크리이트로 복원했을때와 가장 큰 차이점을 보여준다.


원래 현판에 있던 글씨를 복원해서 만든 현판. 예전에는 박정희 전대통령이 한글로 쓴 현판이 걸려 있었다.


왕권을 상징하는 문루 추녀마루의 잡상들. 경회루와 함께 가장 많은 7개의 잡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삼문의 형식으로 된 경복궁 출입문. 북경 자금성의 천안문과 오문은 오문의 형식으로 되어 있다.


광화문 출입문의 아치형 홍예와 배수구인 석누조


광화문 앞 길. 원래의 높이로 복원했다고 한다.


서울시의 상징이 된 광화문 앞을 지키고 있는 해치상. 관악산의 화기를 다스리기 위해서 세워졌다고 한다.


광화문 광장에서 본 광화문


복원하기 전, 복원 공사 중인 광화문의 옛날 모습


경복궁 중심축과 연결된 광화문 앞 대로. 조선시대에는 광화문 양쪽으로 육조를 비롯한 관청건물들이 있었다고 한다.


안쪽 흥례문 앞에서 본 광화문


이번에 광화문과 함께 복원된 궐내각사 등으로 연결되는 출입문


광화문


궁중박물관 마당에 전시된 옛 광화문 잔해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은 태조 4년(1395년) 경복궁 창건당시 함께 지어졌으나, 임진왜란으로 전소되었다. 그 후 고종2년 (1865년)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다시 지었으나,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총독부청사의 건립에 따라 1925~27년 사이에 건춘문 북쪽(현 국립민속박물관 입구)으로 이전하게 되었다. 1950년 한국전쟁시 광화문 문루가 파괴되었고, 1968년 12월 현재 위치에서 북측으로 11.2m, 동쪽으로 13.5m 떨어지고, 경복궁의 중심축에서 약 3.75˚ 반시계방향으로 틀어지게 되었다. <출차:문화재청>

광화문(光化門)은 경복궁의 남쪽에 있는 정문이다. ‘왕의 큰 덕(德)이 온 나라를 비춘다’는 의미로 광화문(光化門)이라 이름 지었다. 1395년에 세워졌으며, 2층 누각인 광화문 앞의 양쪽에는 한 쌍의 해태 조각상이 자리잡고 있다. 광화문의 석축부에는 세 개의 홍예문이 있다. 가운데 문은 왕이 다니는 문이고, 나머지 좌우의 문은 신하들이 다니던 문이었다. 광화문의 천장에는 주작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광화문은 전쟁으로 두 차례 소실되었으며, 월대와 해태 등을 제외한 일부 복원공사가 완료되어 2010년 8월 15일에 공개되었다. <출처: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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