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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고궁박물관] 조선시대 세자의 교육

younghwan 2010. 11. 18.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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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세자가 국왕이 되기까지는 상당히 힘든 시절을 보내야만 했던 것으로 보인다. 세자 교육을 위한 관청이 춘방이라고 불리었던 세자시강원이라는 관청이 조선시대에 존재했었다. 세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특별교육을 받아야만 했고 국왕을 비롯하여 수많은 사람으로부터 평가를 받아야만 했으니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궁박물관에는 세자교육에 관련된 유물이 전시되어 있는데 주로 세자 교육을 당부하는 국왕의 글들을 돌이나 현판, 책에 남겨 놓았던 것이다. 그 중 영조가 내린 글이 많이 전시되어 있다. 드라마 이산에서 세자교육 하는 장면을 보면 신하들이 마음을 먹고 세자를 곤욕스럽게 하는 장면이 많이 등장했는데 당쟁이 심했던 조선후기에 그런 경향이 없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숙종이 아들 연령군에게 내린시. 숙종의 여섯째 아들인 연령군에게 내린 칠언절구 시이다. 조선시대에는 왕이 시를 남기면 대리석처럼 생긴 돌에 시를 새겨놓았던 것 같다. 조선왕실에는 국왕이 남긴 글들을 새긴 돌이 많이 남아 있었다.


춘방에 내리는 임금의 말씀. 영조가 사도세자의 교육을 담당하였던 춘방에 학습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내린 말씀이다. 글씨는 조명정이 왕명을 받들어 썼다. 영조는 사도세자 교육에 상당히 신경을 많이 썼던 것으로 보인다. 영조 어진을 보면 상당히 무섭게 생긴 얼굴인데, 그런 사람 밑에서 세자교육을 받느라 상당히 힘들었을 것 같다.


영조가 세손인 정조를 훈계하는 글. 영조가 세손 정조에게 훈계하는 글을 직접 써서 책을 만든 것이다.


임금이 춘방 관리에게 내린 글. 영조가 세자교육을 당부하는 글을 내려 춘방에 걸게 한 것이다. 글씨는 조명정이 썼다.


영조가 모은 삶은 교훈이 되는 글. 영조 스스로 반성의 자료로 삼으면서 사도세자에게 교훈을 남겨주기 위해 엮은 책이다.


소학, 성현들의 가르침을 집약한 아동용 윤리학습서이다.


춘방. 춘방은 세자시강원의 다른 이름으로 왕세자의 교육을 담당하는 관청이다. 순조의 아들인 효명세자가 쓴 것이다.


경서통과 죽간. 유교경전을 암기하거나 학습한 내용을 평가를 할때 사용하던 경서통이다.


왕세자 성균관 입학식 그림. 효명세자가 8세 (순조17년) 되던 해 성균관에 입학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권학윤음. 성균관에 걸었던 현판이다. 영조 임금이 지은 글로서, 사대부 및 거재유생 등에게 학문이 세도에 필요함을 역설하고 학문에 근면하기를 당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성균관인과 양현고인. 조선 최고의 국립교육기관인 성균관과 성균관 유생들의 식량.물품 공급을 담당했던 관청인 양현고의 관인이다.

세자교육
왕세자의 교육, 즉 서연을 전담하는 기관은 세자시강원이었다. 별칭으로 춘방이라고도 하였다. 시강원에서는 인성교육을 중시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유교의 최고 학목인 효를 가장 중점을 두어 가르쳤다. 그 다음 단계로 정치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바른 역사관, 넓은 식견과 뛰어난 경륜, 역량을 키우는 본격적인 교육을 받게 했다. 강학교재는 유교 경서와 역사책이 주를 이루었다. 천자문,동몽선습,소학,효경을 먼저 익히게 한 다음 사서오경을 배우게 했고 역사 교재로는 중국 역사서인 자치통감과 조선 역대 국왕의 사적을 엮은 국조보감 등을 사용했다. 그 밖에 지도자 교육으로는 왕의 자질을 가르치는 성리학 서적을 중시했다. 강의는 매일 아침.점심.저녁 3번 정규적으로 행해졌으며, 이외에도 시간에 상관없이 밤늦게도 행해졌다. 또 한달에한두번씩 스승을 비롯한 시강원의 관원이 참석하여 왕세자가 그동안 배운 경서와 역사서를 복습하게 하고 평가하는 기간도 있었다. 학습평가는 수업을 시작할 때마다 수시로, 또 미리 정해진 날에 공식적으로 행해졌다. 세자는 왕위에오른 후에도 국왕 교육을 담당하는 경연에서 학문을 연마하였다. 서연이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전적으로 교육 기능만을 가진데 비해 경연은 교육기능 뿐 아니라 각종 현안들을 논의하는 자리로서 정치 기능도 지녔다. 이러한 서연과 경연의 교육 목적은 모두 왕도정치를 실천할 성왕을 기르는 데 있었다. <출처:고궁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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