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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관아

정읍 태인현 피향정, 신라 유학자 최치원이 세웠다는(?) 호남 제일의 정자 (보물 289호)

younghwan 2010. 11. 22. 2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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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정읍 옛 태인현 중심지에 위치한 피향정은 통일신라 헌강왕태 태인 현감으로 있었던 유학자 최치원이 세웠다고 알려진 정자이만, 그 건축 연대는 정확하게 알려지지는 않고 있다. 실제로 남아 있는 기록에 따르면 현재의 모습은 광해군 때 크게 중수한 것으로 남아 있다.

 정읍 피향정은 원래 큰 연못 중앙에 있던 섬 위에 세워진 정자라고 하는데 현재의 모습도 아름답지만 원래의 모습은 상당히 웅장하고 화려했을 것으로 보인다. 건물은 앞면 5칸, 옆면 4칸으로 남원 광한루나 진주 촉석루처럼 크고 웅장한 것은 아니지만, 현단위 지방 관아의 정자치고는 상당히 화려하다고 할 수 있다.

 피향정은 막돌 기단 위에 28개의 석조 기둥 위에 올려 놓은 정자로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이 정자는 사방이 뚫려있는 형태로 주로 공식적인 연회를 하는 장소가 아닌가 생각된다. 태인현의 지리적 특징을 잘 보여주는 곳에 자리한 피향정은 드넓은 호남평야의 넓은 들판이 끝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북쪽으로는 태인현 관아 뒷편 성황산이 있고, 동쪽으로는 김제 모악산과 정읍 내장산이 연결되는 노령산맥의 험준한 산악지대가 보이며, 서쪽과 남쪽으로는 끝없이 이어지는 호남평야의 드넓은 벌판이 보이는 곳이다. 피향정이 향하는 방향을 볼 때, 아마도 이 곳에서는 들판으로 지는 석양을 바라보는 것이 장관일 것 같다.



정읍 태인의 피향정은 앞면 5칸, 옆면 4칸의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정자로 관아에서 손님 접대를 위한 연회를 하는 장소라는 성격을 가진 정자로 보인다. 피향정이 바라보고 있는 방향은 장애물이 없는 드넓은 호남평야이기 때문에 바닥에서 그리 높지 않게 정자를 세웠다.


피향정은 바닥에서 1.5m 정도의 높이로 28개의 석조 기둥위에 건물을 올려 놓고 있다. 이 정자의 기둥에서 오래된 내력을 느낄 수 있다.


피양정 석조 기둥.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다.


피향정을 오르는 돌계단


피향정 앞쪽에는 '호남제일정'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뒤편에 걸린 '피향정'이라 적힌 현판


피향정으니 기본적으로 연등천정이지만, 양쪽에는 우물천장이 있다.


정자 안에 걸린 피향정 현판


피향정에는 이 곳을 찾은 많은 시인 묵객들이 남겨둔 시들이 적힌 현판들이 걸려 있다.


피향정에 걸린 현판들


피향정 정자 마루


피향정 앞에는 신라시대 유학자 최치원 선생이 거닐었다는 연못이 있고 그 앞으로 드넓은 호남평야가 펼쳐져 있다.


피향정 남쪽편에 있는 작은 교회


 피향정에는 동학혁명과 관련된 유적이 있는데 정자 뒷편으로 이 곳을 거쳐간 관리들의 공덕비가 있다. 그 중 동학농민혁명의 원인이 되었던 탐관오리 조병갑이 이 곳 태인현감을 거쳐간 그의 아버지 조규순의 영세불망비를 세운다는 명목으로 백성들을 갈취하였다고 하며, 그 공덕비가 이 곳에 있다고 한다. 태인은 호남에서도 인물을 많이 배출한 고장이자,  무성서원을 중심으로 유학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아마도 이런 지역 유림들의 영향력때문에 그의 평판이 좋지 않아 공덕비를 세우지 못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후 그의 아들 조병갑이 고부군수로 재직하면서 자비(고부군민에게 강탈한 돈)으로 그 이름도 유명한 조규순 영세불망비를 세운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피향정 북쪽에 있는 성황산. 이 곳 성황산에서는 동학농민전쟁 마지막 전투인 태인전투가 있었다고 한다.


원래 피향정 주위로는 넓은 연못이 있었다고 하는데, 서쪽편을 제외하고 상당부분의 연못이 메꾸어져서 옛날의 아름다운 정취는 많이 없어졌다고 한다.


피향정 앞 연못


전북 정읍 태인의 피향정


피향정은 태인면 소재지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다.

향정은 호남지방에서 으뜸가는 정자 건축이다. 통일신라 헌안왕(재위 857∼861) 때 최치원이 세웠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지은 시기는 확실하게 알 수 없다. 기록에 따르면 조선 광해군 때 현감 이지굉이 다시 짓고 현종 때 현감 박숭고가 건물을 넓혔으며, 지금 크기로는 숙종 42년(1716) 현감 유근(柳近)이 넓혀 세웠다고 한다. 그 뒤에도 몇 차례 부분적으로 고쳤는데 단청은 1974년에 다시 칠한 것이다. 규모는 앞면 5칸·옆면 4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는 새 부리가 빠져나온 것처럼 꾸민 형태로 간결한 구조를 하고 있다. 건물 4면이 모두 뚫려 있어 사방을 바라볼 수 있고 난간은 짧은 기둥을 조각하여 주변을 촘촘히 두르고 있다. 건물 안쪽 천장은 지붕 재료가 훤히 보이는 연등천장이지만 천장 일부를 가리기 위해 건물 좌우 사이를 우물천장으로 꾸민 점이 눈길을 끈다. 또한 이 누정을 거쳐간 시인과 선비들의 시가(詩歌)를 기록한 현판이 걸려 있어 건물의 품격을 더하고 있다. 조선시대 대표가 되는 정자 중 하나로 조선 중기의 목조건축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어 건축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는 문화재이다. <출처: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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