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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재란 당시 남원전투는 당시 왜군이 전북 남원성을 공격해 조.명 연합군과 전투를 벌린 것으로 각지의 의병들과 군민들이 합세해 벌린 큰 전투였으며, 결국 왜군에 패해 모두 살했당했으며, 그당시 살해당한 관민 일만명의 무덤이 남원에 있는 만인의총이다.

당시 왜군은 칠전량에서 원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을 격파하고 육군도 구례를 함락시키고 남원성으로 총진격하였으며 왜군의 수가 오만이 넘었다고 한다. 당시 남원성은 경상도에서 호남지역을 거쳐서 서울로 북상할 수 있는 길목에 해당되기 때문에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 3,000명이 파견되었고 각지제서 관군들과 의병들이 모여서 일만이 넘는 민.관이 왜군의 침입에 대비하고 있었다. 5만이 넘는 왜군의 주력부대와의 싸움에서 작은 읍성으로는 지키기 어려웠기때문에 남원성에 있었던 조명 연합군과 민간이 대부분이 전사했던 큰 전투였다.

남원성은 우리나라에서는 보기드물게 평지에 쌓은 읍성으로 중국식 읍성을 모방해서 만든 네모 반듯한 형태의 읍성이며 사망에 문을 있었고 성곽 바깥에는 해자도 있었다고 한다. 성내에는 많은 우물과 샘이 있었으며, 남원의 명소인 광한루 정원 또한 전시에 식수를 공급할 수 있도록 조성한 연못으로 보인다. 남원성내에는 도로가 일직선으로 되어 있으며, 중국식으로 도심을 구성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는 남원성 성곽 대부분이 동학혁명과 전라선 철도부설로 허물어지고 서북쪽 일부에만 성곽이 조금 남아 있다.


남원성은 평지에 직사각형 형태로 쌓은 읍성으로 대부분의 성곽은 허물어지고 지금은 일부만 남아 있다.


정유재란 왜군이 그린 작전도에서 당시 남원성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중국식 읍성을 모방해서 만든 사각형 형태의 읍성으로 바둑판 모양으로 가로가 구성되어 있고, 동.서.남.북에 성문을 두고 있다. 성곽 바깥에는 해자를 파 놓고 있다.

남원성 전투에 참여했던 가와가미 후사쿠니(川上久國)가 그린 남원성 침공 작전도입니다. 현재 가고시마 도서관에 원본이 있는것을 이복남 장군의 후손이 발견하여 세상에 알려진 작전도이다. <출처:위키백과>


남원성은 커다란 자연석을 네모형태로 가공하여 석축을 쌓고 있다. 병자호란 이후에 쌓은 산성들은 화강석을 가공해서 만든 큰 돌로 쌓은 석축이 많은 남원성은 그 중간 형태가 아닌가 생각된다.


우리나라 읍성의 특징으로 수원화성을 제외하고는 성벽위에 방어시설인 여장을 두는 경우가 많지 않은데, 이 곳 남원성 역시 여장을 두고 있지 않다. 또한 바깥쪽을 돌을 쌓아서 만든 석축으로 안쪽은 흙을 쌓아서 만든 토성으로 이루어진 석축성이다.



성곽 중간에는 적을 효율적으로 공략하기 위해 만든 돌출된 형태의 치를 설치해 놓고 있다.


남원성에 있는 치는 여장을 두지 않고 있는 단순한 형태이다.


성벽 바깥쪽에는 원래 해자가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남원성 성곽 안쪽의 모습.


남원성을 보좌하는 성격을 갖고 있는 교룡산성이 남원성 북쪽편에 있다. 실제로 우리나라 지형에서는 산성을 활용하는 것이 바람직하고, 삼국시대 이래로 산성을 중심으로 한 강력한 방어전략이 있었기때문에 고려시대 대몽항쟁을 40년간이 할 수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호족의 반란을 억제하기 위해 산성을 활용하지 않고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전국적으로 읍성을 쌓고, 읍성위주의 방위전략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의 경우처럼 대병력이 싸우는 전면전에서는 읍성은 큰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남원성 석축과 성곽


정유재란시 숨진 일만명의 무덤이 만인의총. 사실은 남원성 전투에 대해서 조사하기 전까지는 명나라군이 큰 희생을 했는지 잘 알지 못했는데, 실제로 많은 수의 명나라 병사들이 이 곳에서 전사한 것으로 보이며, 만인의총에도 포함되어 있는 것 같다. 대부분의 역사란 것이 자국 위주로 해석하고 알리는 까닭에 임진왜란 당시 참전한 명나라 군사가 끼친 민폐만 널리 알려져 있고, 그들이 싸운 기록은 무시되는 경향이 많은 것 같은데 이는 아마도 일제가 조장한 식민사관이 일부가 아닌가 생각된다. 예를 들면 이순신장군과 초기에 전략적인 의견 충돌이 많았던 수군도독 진린 장군의 경우 TV드라마 등에서는 별로 좋지 않은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는데, 실제로 그는 이순신 장군의 공을 명나라 황제에게 보고하고 칭찬을 많이 했다. 그의 후손들은 명나라 멸망 후 조선으로 망명해서 전남 해남지역에 일가를 이루고 있으며, 지금은 광동 진씨 성을 가진 우리나라 사람이 되어 있다.

읍성이란 군이나 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적·행정적인 기능을 함께 하는 성을 말한다. 신라 신문왕(재위 681∼692) 때 지방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남원지역에 소경(지방도시)을 설치하였고, 691년에 쌓은 네모난 형태의 평지 읍성이다. 1597년에는 왜군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성을 크게 다시 쌓고 수리하여 담을 높였다. 그해 8월 조·명연합군과 왜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져 왜군에게 크게 패했고, 이때 싸우다 죽은 군인과 주민들의 무덤이 만인의총이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 때 많이 허물어져 약간의 성터 모습만 남아있다. 돌축대의 길이는 2.4km가 넘고, 높이 약 4m에 이르며 성 안에는 70여 개의 우물이 있었다. 성 내에는 남북과 동서로 직선대로가 교차하고, 그 사이에도 너비가 좁은 직선도로가 교차하여 바둑판 모양의 도로구성을 볼 수 있다. 근대에 들어와 도시가 들어서며 성곽은 대부분 헐려나갔으나, 시내 중심부의 도로는 지금도 바둑판 모양으로 되어 있어, 과거 성내의 가로 구성의 흔적을 보이고 있다. 조선시대 읍성의 가장 전형적인 구조를 하고 있으며, 규모가 크고 우리나라 성곽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는 네모 반듯한 구성과 성내의 가로가 직선으로 구성된 점이 흥미롭다.  <출처: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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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남원시 동충동 | 남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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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주테카 2011.08.01 16: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남원성 옆에 꽤 큰 방어용 산성이 있지 않던가요..?
    조선의 장수들이 그곳으로 가서 방어하자고 하는데,
    명나라 장수들이 평지성에 익숙하다는 이유로 남원성에서
    전투를 치루다가 결국 함락되었다던..

    • younghwan 2011.08.01 17:2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고대 이래로 고구려가 정립한 산성 위주의 방어전략이 조선시대에 폐기되고, 왜구의 침입에 대비한 읍성 위주의 방어전략을 만든 것이 큰 전쟁에서 패한 원인이 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지금 남아 있는 산성들의 석축들은 주로 병자호란 이후 숙종대에 보강한 것이 많다고 하네요. 정조가 쌓은 수원화성 또한 전략적 가치는 별로인 것으로 보이는데, 아마도 정치적 목적이 강했던 것 같습니다.

    • 주테카 2011.08.01 18:2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조선이 엄청나게 멍청했죠. 고려 말기에 있었던 일본의 군벌 난립으로 인해 전국이 탈탈 털렸는데도 불구하고 북방이 안정되고 명나라와의 외교가 정상이 되었다고 군사력 양성을 고려의 절반의 절반조차 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정말..........-_-;;;;

      말씀하신 읍성 문제도 심각했죠. 일본의 소규모 해적들에 대항한답시고 만든 것인데 분명히 소규모 전투에서는 나름 효과를 볼 수 있었지만 대규모 전투에서는 아예 쓸모가 없었더군요. 지금 읍성들을 방문하면 딱 이유를 알법합니다. 높이 3~6미터에 불과하고 폭도 2,3미터에 불과해서 방어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게 눈에 훤하더라구요. -_-;;; 고려시대까지는 산성인데도 불구하고 10미터를 훌쩍넘기고 폭이 5~10미터 사이로 규정되어 강력한 방어막이었지만, 조선시대의 성들은 정말이지..

      게다가 더 문제는 조선의 도로 정책입니다. 대군이 다닐 수 있는 길을 없애먀나 한다는 미련한 생각에 고려시대까지 깔끔하게 정비되어있던 도로들을 싹 방치하다보니 결국에는 대군이 지날 수 있는 길도 없고 다리들도 무너지기 쉽상이고... 이러다보니 전국의 통로가 막히고 재물의 교환이 줄어들어 국고가 막장으로 치달았죠. 결국 이게 군사력 약화와 성벽 보수 미비로 이어졌더군요.

      이 세상에 10미터짜리 성벽이 무너져서 5미터가 됐는데, 다시 성벽을 세우는 게 아니라 남은 5미터의 성벽위 잔해들을 치우고 그 위에 여장을 세워서 성이랍시고 내세우는 나라가 대체 어딨답니까.... 세상에나...

      사실 정조가 세운 수원화성의 경우 일종의 새로운 수도로서의 역할을 하려는 의도였던 것이지 방어용으로 만든 것은 아닌게 눈에 훤합니다. 겨우 6미터에 불과한 성벽 높이, 전돌로 쌓아서 적의 포탄을 잘 막게 한다는 의도와 반하는 지리적 위치. 대포가 생겨나서 전쟁의 양상이 바뀌는 그 순간부터 성벽의 높이는 최소 10미터가 되어야 포탄으로부터 방어가 가능하다는 게 뻔한 논리이건만 결국 돈이 없으니 그런 수원화성같이 방어적 측면에서는 졸렬한 성이 나온 것 아니겠습니까... 한탄스럽습니다.

      물론, 수원 화성의 경우 하나의 '수도' 로서 미학적 측면이라면 굉장히 아름답고 단안한 성입니다만.. 결국 정조는 수원 화성을 제대로 써먹지도 못 하고....

      눈물이 앞을 막 가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