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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터

양양 진전사지, 우리나라에 선종을 처음 들여온 도의선사가 수도했던 사찰

younghwan 2011. 2. 13.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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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전사는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된 사찰로, 정확한 연대를 알 수 없으나, 통일신라시대인 8세기경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국보 122호인 삼층석탑이 남아 있는 진전사가 역사적, 사회적으로 큰 의미를 갖는 것은 우리나라에 선종을 처음 들여온 도의선사가 이 곳에서 40년 동안 수도했으며, 후대에 선종을 크게 일으킨 염거화상이나 보조선사 같은 고승들을 배출하였고, 고려중기 불교혁신 운동을 주도하고 현재 한국불교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조계종의 뿌리가 되는 사찰이라 할 수 있기때문이다. 

 설악산에는 신흥사가 남아 있기는 하지만, 역사적인 배경 등을 고려하면, 이 곳 진전사가 설악산 지역에서는 중심이 되었던 사찰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사찰은 조선후기에 국가적인 폐불정책 때문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이는 이 사찰이 지역에서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기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현재는 삼층석탑과 도의선사 부도가 남아 있으며, 옛 절터에는 작은 사찰이 세워져 있다. 진전사는 선종계열의 사찰이어서 그런지 인상적인 불전을 두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며, 건물터 흔적은 그리 남아 있지는 않다.


양양 낙산사 북쪽편 해안으로 흘러들어오는 물치천 상류에 위치한 진전사지는 우리나라 불교에 큰 영향을 미친 사찰이었지만, 옛 건물의 흔적들은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다. 특히, 진전사지는 그 위치가 사람들이 통행하는 교통로에 위치하고 있지 않기때문에 이 곳에서 잠시 묵었다가 지나가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을 것으로 보이며, 이로 인해 사찰을 유지하기 위한 경제력이 부족했던 것도 폐사의 원인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국보 122호로 지정된 진전사지삼층석탑. 통일신라 후기를 대표한 삼층석탑 중 하나이다.


양양 진전사지는 부도탑이 있는 상대와 삼층석탑이 있는 하대에 건물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상대에는 작은 절이 들어서 있으며, 옛 건물터의 흔적이 현재는 보이지 않지만, 삼층석탑이 있는 하대에는 옛 건물에 쓰였던 주춧돌의 일부가 남아 있다. 다른 절터에 비해서 건물터가 많이 남아 있지 않은데, 이는 선종계열 사찰을 특징이 아닌가 생각된다.


진전사지삼층석탑 뒷편의 법당 건물터.


옛 건물에 사용되었던 초석들만 일부 남아 있는데 그 수량 또한 많지는 않다.


진전사지 삼층석탑이 있는 아랫쪽 절터에 들어오는 길


옛 진전사지 절터 중간에는 작은 마을이 형성되었는데 가구수는 그리 많지 않다.


윗쪽 절터에는 진전사라는 사찰이 들어서 있다.


사찰옆에는 보물 439호인 도의선사부도가 서 있다.

도의국사는 신라후기의 구산선문 중 하나인 가지산문의 개조이다. 법호는 명적, 속성은 왕씨이며 북한군(지금의 서울) 출생이다. 서기 784년 당나라에 건너가 조계에 가서 헤능대사의 조사당을 참배하니 문이 스스로 열렸고, 절을 세번하니 문이 저절로 닫혔다고 한다. 이후 강서의 홍주 개원사에서 서당지장으로부터 법을 얻고, 도의라는 법호를 받았다. 821년 귀국하여 선(禪)을 일으키려 했으나 당시 신라사람들은 교(敎)만을 숭상하고 무위법을 믿지 않고 비방하면서 받아 들이지 않았다. 그는 아직 시기가 오지 않았음을 깨닫고 이 곳 설악산 진전사에 은거하여 40년동안 수도에 전념하면서 제자 염거선사에게 남종선법을 전하고 입적하였다. 도의국사는 대한불교조계종의 종조이고 부도탑은 보물 439호로 지정되어 있다. <출처:양양군청>


옛 진전사의 가람배치. 사찰규모가 상당히 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진전사는 우리나라에 선종을 들여온 도의선사가 창건한 절이자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스님이 14세 때 출가한 절로 이름나 있다. 도의선사는 당나라의 서당지장(709∼788)에게 공부하고 귀국하여, 당시 교종불교가 절대적이었던 신라 불교에 선종을 소개하였다. ‘중국에 달마가 있었다면 신라에는 도의가 있었다’고 평가를 받는 분으로 도의선사의 법맥은 염거화상과 보조선사로 이어져 한국 불교의 주류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 절이 언제 없어졌는지 알 수 없으나 조선왕조의 폐불정책 때문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마을에는 절이 없어질 때 스님들이 절터 위에 있는 연못에 범종과 불상을 던져 수장하고 떠났다는 슬픈 전설이 전해져 온다. 발굴조사 결과, 절 이름을 알 수 있는 ‘진전(陳田)’이란 글씨를 새긴 기와조각과 연꽃무늬 수막새기와, 당초무늬 암막새기와, 물고기무늬 기와 조각들이 출토되었다. 현재 삼층석탑(국보 제122호)과 석조부도(보물 제439호)가 남아있다. 진전사터는 우리나라 불교사에서 중요한 위상을 지닌 유적이며, 신라 불교가 교종에서 선종으로 교체되는 시기에 그 싹을 틔운 곳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출처: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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