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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규장각, 조선왕실 기록인 실록과 의궤

younghwan 2011. 2. 21.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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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왕조실록>은 태조에서 철종까지 조선왕조 472년 간의 역사를 기록한 방대한 역사책이다. 1997년에 유네스코 기록유산으로 기록된 실록은 왕과 관련된 정치뿐만 아니라 외교,경제,군사 등을 비롯하여 민간생활까지의 다양한 내용들을 기록한 역사책으로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을 정도로 방대한 역사책이다. 조선사회는 역사를 기록하는 관리인 사관을 두어 왕이 주관하는 모든 행사에 참석하여 그 내용을 기록하였으며, 실록의 편찬은 왕의 사후에 사관이 기록한 사초를 근간으로 해서 당시의 모든 자료를 참조하여 실록을 작성했기때문에 그 내용의 객관성을 상당한 수준으로 유지할 수 있었다.

 유교사회인 조선왕조에서는 역사기록을 매우 중요시 여겨 당대의 집권자들이 정치를 함에 있어서 후대의 평가를 두려워하게 하여, 공명정대하게 일을 처리하게 하고자 했으며, 편찬된 역사서들은 후대 사람들이 행동을 함에 있어서 모범이 되게 하였다. 조선왕조는 실록이외에도 <승정원일기>와 각종 의궤를 통해서 국왕과 관련된 행사나 국가적으로 중요한 일에 대한 기록을 철저히 남겨 놓고 있다. 물론 실록을 제외하고는 전시대에 걸쳐서 고르게 역사기록을 남겼다고 보기는 힘들고, 주로 조선후기 영.정조대에 의궤를 포함한 많은 기록들을 남겨 놓고 있다.



태조실록(복제본), 숙종실록(복제본). 실록은 현재 서울대 규장각에서 보관하고 있으며, 한글로 번역하는 작업 또한 최근에 규장각에서 완성한 것으로 보이며, 인터넷 등을 통해서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수준까지 올라간 것으로 보인다.

<조선왕조실록>은 조선 태조로부터 철종에 이르기까지 25대 472년간의 역사를 연월일의 순서에 따라 기록한 책이다. 완질의 분량이 1,707권 1,188책에 이르는 방대한 기록으로, 조선시대의 정치.외교.경제.군사.법률.통신.종교 등 각 방면의 역사적 사실을 망라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은 일시에 편찬된 것이 아니라 국왕 사후에 임시로 실록청을 설치하고 전왕대의 실록을 편찬한 것이 대대로 축적되어 이루어졌다. 실록편찬에 이용된 자료는 사초와 시정기, <승정원일기>, <일설록> 등 정부 기관 기록, 개인문집 등이었다. 특히 사초는 사관이 국가의 모든 회의에 참여하여 보고들은 내용을 직필한 것으로, 사관 이외에는 국왕조차도 볼 수 없게 하여 사관의 신분을 보장하고 기록의 진실성을 확보하였다. 편찬이 완료된 실록은 특별히 설치한 사고에 1부씩 보관하였다. 조선 전기에는 서울에 있던 춘추관과 충주.성주.전주사고에 보관하였는데, 왜란과 호란을 거치면서 춘추관과 충주.성주사고의 실록은 소실되고 전주사고본만 남게 되었다. 이에 전쟁이 끝난 후 전주사고본을 바탕으로 재간행하여 춘추관.정족산.태백산.정상산.오대산 등 네곳의 사고에 보관하였다. <조선왕조실록>은 중국이나 월남 등 다른 국가의 실록과 비교해 볼 때, 한 왕조의 역사적 기록으로는 가장 긴 시간에 걸쳐서 작성되었고 가장 풍부하면서도 엄밀한 내용을 담고 있다. 또 세계에서 유일하게 활자로 인쇄되었고, 보존.관리에도 만전을 기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가치를 인정받아 1973년 12월 31일에 국보 151호로 지정되었고, 1997년 10월 1일에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을 등록되었다. 현재 규장각은 정족산본 1,187책, 오대산본의 낙질 27책, 기타 97책 등 총 1,311책의 실록을 소장하고 있다. 특히 정족산본 실록은 전주사고본에서 이어진 것으로, 조선전기에 편찬된 실록의 원형을 그대로 보여주는 유일본이다. <출처:규장각>


인조 무인사초. 조선후기 인조때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사초이다. 원래 사초는 실록작성시 제출하여 실록완성시 세검정에서 세초하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사초 작성자가 개인적으로 복사본을 남겨놓은 것으로 보인다. 병자호란 등으로 혼란한 시기였던 인조대의 문란상을 보여주는 사례 중의 하나라고도 볼 수 있다.

인조대에 승지를 지낸 이현이 작성한 가장사초이다. 본서에는 저자와 연대가 명기되어 있지 않으나, 제1책의 제목과 표지 이면에 기록된 관직 및 성명, 그리고 <비변사등록>,<승정원일기> 등의 기록을 통해 이현이 1638년에 기록한 사초임을 알 수 있다. 1638년 6월 13일에서 9월 17일까지 매일의 사초가 1책씩 편집되어 있는데 중간에 빠진 날짜가 많이 있으며, 1책당 3장에서 5장 정도씩 묶여져 있어 전체 분량은 그리 많지 않다. 수록된 내용은 신료들의 계문이나 승정원에서 정무를 처리한 사항, 관리의 인사이동 등에 관한 것이다. 가장사초는 사관이 개별적으로 작성하여 보관하다가 국왕 사후에 춘추관에 제출하여 실록편찬의 자료로 사용된 다음 세초되어 없어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따라서 본 사초가 남아 있는 것은 아마도 부본을 따로 만들어 보관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규장각>


영조묘호도감의궤, 1890년. 구한말에 작성된 의궤로 어람용과 일반용 의궤의 차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왕이 보는 어람용 어궤는 상당히 고급스럽게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1889년 12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조선 21대 국왕 영조의 묘호와 시호를 고쳐 올리고, 영조와 영조비의 존호를 추가로 올리는 과정을 기록한 의궤. 1889년 12월 5일에 영조의 묘호는 '영조', 시호는 '정문선무희경현효'로 고쳤으며, '중화융도숙장창훈'이란 존호도 추상되었다. 이와함께 영조비 정성왕후와 계비 정순왕후의 존호도 추상되었다. 이같은 사실은 이듬에 정월에 종묘에 친상되었고, 3월에는 원릉에 새로운 표석도 건립하였다. 초록 비단과 완전한 형태의 5개 국화동과 변철은 어람용 의궤의 품격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분상용 의궤의 삼베표지와 구별된다. <출처:규장각>


보인소의궤, 1876년. 구한말에 작성된 궁중에서 사용하는 도장을 개보수한 기록이다.


의궤에는 그림으로 그 형태와 목적, 기능 등을 아주 상세히 설며하고 있는데, 그중 그림으로 묘사된 국왕의 도장이다.

1876년 궁중에서 사용하는 보와 인의 개주, 개조, 수보 과정을 기록한 의궤. '보인'은 국왕 사용한 옥새와 도장을 의미한다. 1876년 11월 8일 궁중에서 사용하는 각종 보와 인이 닳았으므로 무위소와 호조가 그 수리 및 개조를 담당하라는 고종의 지시에 따라 이루어졌다. 의궤의 기록은 1876년 11월8일부터 1877년 1월 4일까지이다. 당시 왕실에서 사용된 도장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다. 고급 초주지를 사용하고 사자관이 해서체로 정성들여 글씨를 쓰고 붉은 선을 두른 어람용 의궤는 저주지를 사용하고 검은 선을 두른 분상용 의궤와 구별된다. <출처:규장각>


화성성역의궤, 1801년. 수원 화성 축조의 전과정과 소요된 비용, 인원 등에 대해서 아주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는 <화성성역의궤>이다. 이 의궤에 기록된 내용이 아주 세밀하기때문에 수원화성이 18세기에 축조선 읍성이지만, 동아시아를 대표하는 읍성으로 유네스코문화유산에 등재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의궤에 묘사된 수원화성의 성문.


다산정약용이 만든 거중기의 기능과 형태를 아주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이 기록을 근거로 여러곳에 거중기를 복원할 수 있었다.

화성(수원성)을 축조한 뒤에 그 공사에 관한 일체의 내용을 기록한 의궤. 화성 축조 공사는 1794년 1월부터 시작되어 1796년 8월까지 계속되었는데 본 의궤는 1796년에 완성되어 1801년 활자로 간행되어 보급되었다. 성곽의 축조와 관련된 공식문서와 참여인원, 소요물품, 건축 설계 등에 관한 기록과 그림이 함께 수록되었다. 공사의 총책임은 채제공이 맡았으며, 정약용은 축성법과 공사에 사용된 거중기 등 기계류 제작에 공헌하였다. 18세기 건축공사에 들어간 비용, 물품, 참여인원 등이 일목요연하게 나타나 있어서, 건축술과 함께 당시 국가의 경제력을 살펴보는데도 참고가 되는 자료이다. <출처:규장각>


대사례의궤, 1743년

1743년 윤4월에 영조가 성균관에서 행한 대사례 의식을 기록한 의궤. 대사례는 국왕과 신하가 한자리에 모여서 활을 쏘고 그 맞힌 수에 따라 상벌을 행하는 의식이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1477년에 처음 대사례가 시행되었으며, 1543년, 1743년, 1764년에 각각 시행된 기록이 있다. 의궤의 앞면 에는 <어사례도>,<시사례도>,<시사관상벌도> 등의 그림이 그려져 있어서 대사례의 구체적인 모습을 접할 수 있다. 또 대사례에 참가한 이들의 명단, 시행세칙 및 의례, 관련 경비, 궁시, 과녁 등 행사와 관련된 내용들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출처:규장각>


자경전진작정례의궤, 1827년. 의궤의 내용을 한글로 번역한 것이다. 조선후기 한글이 대중화되어 생활 깊숙히 파고 들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한글은 실제로 궁중에 일하는 여자들을 중심으로 많이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827년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가 대리청정을 할 때 순조 내외에게 존호를 올린 것을 기념하여 자경전에서 치른 진작례를 거행한 사실을 기록한 의궤늘 번역한 책. 3권3책의 필사본으로 중궁과 세자빈에게 보이기 위하여 한글로 번영한 것으로 보인다. <출처:규장각>

규장각의 서적 간행과 수집
규장각은 본래 어제와 어필을 보관하던 전각이었다는 사실에서 드러나듯이, 처음에는 왕실문헌을 보존하는 것이 본래의 기능이었다. 정조가 즉위한 1776년, 학술연구기관으로서의 규장각을 창설하면서 많은 서적으 편찬이 규장각에서 이루어졌다. 규장각 주변에는 중국본 서적을 보관하는 개유와와 열고관, 조선본 서적을 보관하는 서고 등의 부속 건물이 세워졌다. 1777년에는 국립출판소에 해당하는 교서관을 규장각에 통합시켰고, 임진자.정유자.생생자.정리자 등의 활자를 주조하여 서적으 출판을 규장각이 주도하게 하였다. 정조대 규장각에서 편찬되 서적은 <군서표기>라는 책자에 정리되어 있는데, 정조가 직접 편찬한 어정서와 신료들이 분담하여 편찬한 명찬서로 구분되어 있다. 정조는 <고금도서집성>과 같은 중국본 도서의 구입에도 힘썼다. 1781년 규장각에 소장된 서적의 분류목록과 해제가 정리된 <규장총목>을 완성하였다. <출처:규장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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