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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

[중앙박물관 통일신라실] 문자와 지방 생활

younghwan 2011. 6. 8.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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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경주를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인 국가를 세우기는 했지만, 조선시대처럼 지방관을 파견하여 행정적으로 완전히 지방을 장악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제도적으로는 신문왕때 전국을 9주로 나누고 그 아래 군현을 두는 체제를 완성하였다.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 백제의 수도인 한성, 웅진, 사비가 국제적인 도시로 발전했지만 통일 이후에는 모든 경제력이 경주로 집중되어서 지방은 그 면모를 잃어버린 것으로 보인다. 문헌적으로나 발굴된 유물에서 통일신라시대에는 지방도시들이 큰 번성을 누리지는 못한 것으로 보이며, 신라의 귀족들이 이주한 소경을 비롯한 일부 도시에서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다. 중앙박물관에 전시된 당시 지방의 모습을 보여 주는 유물들은 주로 군사적인 성격을 지닌 산성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있다.

문자와 지방
신라는 삼국통일 직후인 신문왕 5년(685) 전국을 9개의 주로 나누고 그 아래에 군과 현을 두는 주군현 체제를 완성했다. 또한 5개의 소경을 설치하여 지방지배를 강화했으며, 말단 행정 구역으로 촌을 설치했다. 촌에는 대략 10여가구 100여 명이 살았다. 당시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하천 주변이나 들판에서 벼농사와 밭농사를 지었으며, 소와 말을 키우거나 잣, 호두 등을 재배했다. 촌에 대한 국가의 지배는 촌주의 협력 아래 이루어졌으며, 촌주 중 일부는 후삼국시대에 호족으로 성장해서 새 시대의 주역이 되었다. 정비된 지방제도를 바탕으로 행정력이 지방 곳곳에 미치게 되고 소경과 주치 등에 귀족들이 이주하면서 왕경 문화는 지방에 빠르게 전파되었다. 각지에서 출토되는 문자 자료는 당시 지방문화의 단면을 잘 보여준다. 이로 보아 당시 지방에서 문자생활이 보편화되었으며 그 수준도 왕경에 버금갔음을 알 수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사천신라비, 8세기에 세워진 것으로 불교행사와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이 비는 대규모의 국가적 불교행사와 관련하여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앞뒤 양면에 글을 새겼는데, '천'자는 중국 당나라 측천무후 시대에 만든 문자를 사용하였다. 산술이라는 글귀가나오는 것으로 보아 8세기 후반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며, 이 시기 신라의 중앙과 지방의 관계, 중국과의 교류를 알 수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글자가 새겨진 기와에서 문헌에 남아 있는 당시의 지방 이름들을 찾아 볼 수 있다.


'사라와초' 명 암키와, 홍성 석성산성


'양오가불촌주'명 기와, 청원 쌍청리


'마로관'명 암키와, 광양 마로산성


도장, 경기도 일대


청동 허리띠(광주 대쌍령리)와 은 띠고리(광양 마로산성)


당시 지방관이 착용했던 관복의 모습.(복원)


영천 청제비 정원명 탁본, 798년, 경북 영천


'함통육년'명 벼루, 865년, 이천 설봉산성


돌 연적, 양주 대모산성


자물새와 열쇠, 창녕 화왕산성


향로, 광양 마로산성


재갈, 익산 미륵사터와 창녕 화왕산성에서 출토되었다.


칼, 창녕 화왕산성


주머니모양 발걸이, 창녕 화왕산성에서 출토되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군사적으로 지방을 제압하기 위해서 산성을 중요시 한 것으로 보인다. 여러 유물들이 지방의 산성에서 출토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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