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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7월부터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프랑스로부터 145년만에 돌아온 외규장각 의궤를 중심으로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이번에 전시되는 의궤는 서울대 규장각을 비롯하여 각종 기관에서 소장하고 있던 기존의 의궤와는 달리 병인양요때 프랑스 군이 약탈해서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던 의궤를 오랜 외교적 노력 끝에 돌아온 71점의 의궤를 중심으로 관련된 유물들을 같이 전시하고 있어서 우리의 기록문화 유산에 의궤에 대해서 체계적으로 알 수 있게 해주고 있다.

의궤는 조선 왕실에서 국가의 중요행사를 후대에 참고할 수 있도록 기록으로 남기는 보고서 형식의 문서라고 할 수 있다. 조선왕조에서 의궤는 태조 때부터 만들어져 왔으나, 임진왜란 등으로 조선초기의 의궤들의 대부분 남아 있지 않다고 한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의궤는 1601년(선조31)에 만들어진 <의인왕후산릉도감의궤>라고 한다. 의궤는 손을 직접 쓰는 필사 형식으로 만들어지며 어람용 1부와 의정부를 비롯한 관련 기관과 전국에 사고에 나누어 보관하였다고 한다. 현재 남아 있는 의궤는 조선시대 규장각의 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가장 많이 남아 있으며,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도 많은 수의 의궤가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조선후기에 중요한 의궤를 많이 보관했던 강화부 외규장각에서 소장되었던 의궤들이 프랑스로 반출되었으며,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반출되어 일본 궁내청이 소장한 것 또한 상당수 있다고 한다. 의궤에는 글로만 기록을 남긴 것이 아니라, 그림으로도 상세하게 관련 기록을 남겨 놓고 있다. 특히, 규장각을 창설한 정조대에 만들어진 의궤는 그 내용이 상세하고, 그림으로도 아주 세밀하게 행사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조선시대 기록문화의 꽃
조선 22대 왕 정조는 규장각을 발족하였다. 규장각은 조선 왕조의 왕실 도서관 겸 학술연구기관으로 출발하여 출판과 정책 연구의 기능까지 발휘한 특별한 기구이다. 이후 1782년에 강화도 행궁에 외규장각을 완공하여 어람용 의궤 등 왕실으 중요한 자료들을 옮겨서 보다 체계적이며 안전하게 보관하도록 하였다. 의궤란 왕실과 국가에서 의식과 행사를 개최한 후 준비, 실행 및 마무리까지의 전 과정을 보고서 형식으로 기록한 것이다. 왕실의 각종 의식 및 행사를 집행하기 위해서 우선 임시기구인 도감을 설치하였다. 의식이 종료된 후에는 왕의 열람을 위한 어람용과 여러 곳에 나누어 보관하기 위한 분상용으로 구분하여 5~9부 내외의 의궤를 제작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효장세자책례도감의궤, 1725년(영조1). 어람용 의궤의 반차도로 책의 재질이 상당히 고급스럽고 글과 그림 또한 매우 뛰어나다.

이번에 반환된 외규장각 의궤 중에는 동일한 행사에 대해 어람용과 분상용으로 달리 제작된 것이 있다. 이를 비교해 보면 어람용 의궤의 종이 질과 글씨 수준이 월등하게 좋은 것을 알 수 있다. 영조의 장자 효장세자를 왕세자로 책봉한 과정을 기록한 의궤로 세자에게 주는 교법을 실은 요여와 각종 의장물로 행렬을 이루었다. <출처:중앙박물관>


효장세자책례도감의궤, 1725년(영조1).분상용 의궤의 반차도이다. 어람용과 같은 내용이지만 종이의 질과 그림의 수준이 약간 떨어진다. 분상용은 의정부를 비롯한 정부기관과 사고 등에 보관하기 위해서 만든 것이다.

동일한 내용의 분상용 의궤다. 종이는 어람본의 경우 고급 초주지를, 분상용은 초지지보다 질이 낮은 저주지를 사용하였다. 본문의 인찰선은 어람본의 경우 붉은 선을 직접 그었는데 분상용에서는 검정 선이 판으로 찍혀 구획되었다. 어람용은 붓으로 직접 형태를 그린 후 다양한 안료로 칠하였으나, 분상용은 도장을 찍어 인물을 배치하고 색상도 단조롭다. <출처:중앙박물관>


풍정도감의궤, 1630년(인조8), 필사본, 1책, 분상용, 외규장각에서 보관하고 있던 의궤 중 유일본이자 가장 오래된 것으로 왕이 대비에게 잔치를 올리는 의식을 기록하고 있다.
 
인목대비의 장수를 기원하기 위해서 인경궁에서 열린 잔치 행사를 기록한 분상용 의궤다. 당시 후금과의 관계가 긴박하고 흉년이 들어 재정 상태가 좋지 않았으나 인조는 자신의 반정을 합법적으로 인정해 준 대비에 대한 고마움으로 풍정을 올렸다. 한 책만 남아 있는 유일본으로, 외규장각 의궤 중에 그 제작 시기가 가장 빠른 것이다. <출처:중앙박물관>


강화도 지도, 19세기 후반, 서울대 중앙도서관 소장

강화도 북쪽에 위치한 강화부 내에 행궁이 그려 있지 않아 프랑스 군대가 행궁을 파괴한 1866년의 병인양요 이후에 제작된 지도로 생각된다. 강화도 해안에 설치한 포대와 혈수, 돈의 위치를 상세히 기록하였으며 오른쪽에는 한강 입구로 오르는 해안을 따라 산성이 세워져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강화부외규장각형지안, 1857년(철종8). 강화도 외규장각에 보관된 책보, 왕실족보 등의 현황을 기록한 장부이다.

강화부 외규장각에 보관된 책보, 왕실족보, 왕의 글과 글씨 및 서적의 수량과 위치를 적은 형지안이다. '형지안'이란 현재의 상황을 밝힌 장부란 뜻으로 의궤는 아니다. 1857년 9월에 작성한 것으로 의궤는 주로 북쪽과 서쪽의 벽면에 있는 서가에 보관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강화도 외규장각 모습. 강화부 궁전도, 19세기 후반,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4면의 건물도가 수록된 화첩 중 외규장각 모습이다. 서쪽의 건물부터 차례로 제1면에는 강화부 행궁, 제2면에는 외규장각, 제3면에는 숙종의 어진을 봉안한 장녕전, 제4면에는 만녕전과 봉선전이 그려져 있다. 병인양요로 소실된 건물들을 복원하기 위해 고종이 1881년에 그리도록 하였다는 의견과 1858년(철종9)에 봉선전을 복건한 후 병인양요로 소실되기 전의 모습을 그린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강화행궁이 있었던 고려궁지에 복원된 외규장각 건물이다. 앞면 3칸 규모의 건물로 그리 큰 건물은 아니다.




정종정안왕후시호도감의궤, 1681년(숙종7). 도감의 구성과 명단이 적혀 있다.

조선시대에는 왕실의 각종 의식 및 행사를 집행하기 위해서 우선 임시기구인 도감을 설치하였다. 도감은 여러 관청의 관리들을 망라하여 조직하였으며 총책임자인 도제조 1인은 정승급에서 임명하였다. 조선의 제2대 왕에게 '정종'의 묘호를 올리는 의궤로 당시 영의정이었던 김수항이 도제조를 맡았다. <출처:중앙박물관>


도감의 총 책임자 도제조 초상, 김수항 초상, 19세기

김수항은 병자호란 때 청과의 화해를 반대한 대표적인 인물인 김상헌의 손자로서 현종, 숙종 대의 논쟁에서 서인의 정치적, 학문적 견해를 이끌었던 학자이자 관료이다. 남인이 실각한 1680년 이후 8년 동한 영의정으로 있다가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정권을 잡은 후 송시열과 함께 사사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외규장각 의궤의 표지

이번에 돌아안 외규장각 의궤 중 11책은 원래 상태로 정정되어 있고, 나머지 의궤들은 원래의 변철에 표지만 프랑스에서 개장하였다. 개장한 후 따로 보관했던 원표지들이 이번에 함께 돌아오게 되어 의궤 표지에 사용된 직물의 종류와 무늬를 확인해 볼 수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헌종경릉산릉도감의궤, 1849년(철종즉위). 어람용 의궤의 표지에는 초록색 비단으로 싸고 있으며, 분상용 의궤의 표지에는 홍포로 표지를 쌌다. 어람용과 분상용 표지를 비교하여 볼 수 있다.

어람용 의궤의 표지
헌종이 승하한 후 6월부터 11월까지 경릉의 조성 과정을 정리한 어람용 의궤다. 원 표지를 유지하고 있어서 어람본 의궤 표지의 재료와 장정 방법을 알 수 있다. 초록색 비단으로 표지를 싸고 놋쇠로 변철을 대고 5개의 박을못으로 고정시키고, 박을 모 밑에 둥근 국화무늬판을 대어 제본을 했다. 변철의 중앙에는 둥근 고리를 달았다. <출처:중앙박물관>

분상용 의궤의 표지,
표지에 '오대산사고상'이라 쓰여 있어 오대산 사고에서 보관했던 분상용 의궤임을 알 수 있다. 동시에 제작한 어람용 의궤와 장정 형식에 차이를 보여 홍포로 표지를 쌌다. 원래 분상용 의궤는 변철과 박을못 및 원한을 모두 시우쇠로 만들었으며, 박을못은 3개이다. 그러나 이 의궤의 변철부분은 최근 새로 만든 것이다. <출처:중앙박물관>


인조장릉천릉도감의궤, 1731년(영조7), 의궤의 구성,

1731년 3월 16일부터 9월 초2일까지 조선 제16대 왕 인조와 그의 비 인열왕후 한씨의 장릉을 옮겨 새로 무덤을 조성한 과정을 기록한 의궤다. 총7책이나 되는 방대한 의궤의 제 1,2책으로서 도청 이하 여러 부서에서 업무를 세밀하게 분장한 사항과 의궤의 구체적인 체재와 구성을 알 수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왕릉을 옮겨 모시라는 왕의 명령, 계사, 1731년
"여러 대신을 불러들여 입시했을 대 전교하였다. ... 능침에 이미 지극히 더러운 물건이 있는 것을 대신이 재차 살펴보면서 모두 목도하였다. 애통한 마음이 더욱 절실하여 능을 옮기는 일을 조금도 늦출 수 없다. 안으로 대신과 종친, 문무고관, 밖으로 원로와 선비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의 의논에 차이가 없으니, 해당 관청에 명하여 총호사 이하를 차출하는 일을 계축년(1673년:효종의 영릉을 옮겨 모심)의 전례에 의거하여 행하도록 하라. 대저 나라의 백년 가까이 된 능침을 옮겨 모실 때에는 갖춤새가 매우 중대하니 최대한 정성을 다하는 도리가 있어야 한다. 여러 거행하는 일들도 미리 신중하게 준비하도록 도감에 분부하라." - 인조장릉천릉도감의궤 중 - <출처: 중앙박물관>


의궤사목. 의궤 편찬에관한 규칙을 적어 놓고 있다.

도감의궤를 제작할 때 응당 행할 여러 일들을 참작하여 정한 후 뒤에 기록하였으니 이에 의거하여 시행함이 어떻겠습니다.
일. 의궤는 당상 세명과 도청 두명이 이어서 관리 감독한다.
일. 낭청 두 명은 호조정랑 임세집, 부사과 이수보가 이어서 관리 감독한다.
일. 당상, 도청, 낭청은 본사에 숙직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모든 공회에 참석하지 않으며, 제례에도 차출하지 않는다.
일. 당상, 도청의 도장 각 1과는 그대로 사용한다.
일. 의궤 5건 중 어람용은 1건이고 춘추관에 1건, 의정부에 1건, 에조에 1건, 강화부에 1건씩 나누어 보관한다. <출처:중앙박물관>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은 국내외에서 가장 많은 종류와 수량의 의궤를 소장한 기관으로 546종, 1,940책(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기준)의 의궤를 보유하고 있다. 규장각 소장 의궤에는 조선시대 춘추관, 예조, 의정부, 종부시 등 중앙 정부 기관에서 소장하던 의궤들과 정족산, 태백산, 오대산 등 지방 사고에서 보관하던 의궤들이 통합되어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동국신속삼강행실찬집청의궤, 1616년(광해군8),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동국신속삼강행실도를 편찬한 과정을 기록한 의궤이다.

임진왜란 이후 각도 각부에서 보고한 효자, 충신, 열녀 등의 행실을 엮어서 <동국신속삼강행실도>를 편찬한 과정을 기록한 의궤다. <실록청의궤>와 <선원보락수정의궤>류를 제외하면, 서적의 편찬 과정을 정리한 의궤로는 특수한 사례이다. <출처:중앙박물관>


신정황후가상존호도감의궤(1888년, 고종25)와 순명황후추봉순정황후진봉의궤(1907년)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하고 있는 의궤로 신정황후에게 존호를 올린 의식을 기록한 의궤와 대한제국 황제의 어람용 의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신정황후에게 존호를 올린 의식
익종의 비인 신정왕후 조씨에게 존호를 더하여 올린 과정을 기록한 어람용 의궤다. 1888년은 신정왕후의 나이가 망구(81세)가 되는 해이므로, 이를 경하하기 위해 존호를 올렸다. <출처:중앙박물관>

대한제국기 황제용 의궤
규장각 소장 대한제국 설립 이후의 어람용 의궤로서, 황제용이기 때문에 표지에 황색 비단을 사용하였다. 순종 즉위 시에 순종의 전 태자비인 순명후 민씨를 황후로 추봉하고 현재의 태자비인 순정후 윤씨를 황후로 책봉한 기록이다. <출처:중앙박물관>


순명황후추봉순정황후진봉의궤, 1907년, 대한제국기 황태자용 의궤와 분상용 의궤를 비교해서 볼 수 있다.

대한제국기 황태자용 의궤와
대한제국기에 제작된 황태자용 즉 예람용 의궤로서 표지에 붉은색 비단을 사용하였다. 순종의 두 태자비를 왕후로 책봉하고 나서 모두 9건의 의궤를 제작하였는데 황제용, 황태자용의 어람본 외에 태황제로 물러난 고종을 위해 태황제용의 의궤를 제작하였다.

대한제국기 분상용 의궤
순종의 두 태자비를 왕후로 책봉하고 나서 제작한 분상용 의궤다. 동시에 제작한 황색 비단 표지의 황제용, 붉은색 비단 표지의 황태자용의 어람본과 장정형식을 비교해 볼 수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는 현재 287종 490책의 의궤(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기준)가 소장되어 있다. 장서각본은 무주 적상산 사고에 소장되었던 의궤를 의주로 하여 규장각 봉모당에 소장되었던 의궤와 1911년 이후 이왕직에서 제작된 의궤가 통합된 특징이 있다.


종묘영녕전증수도감의궤, 1836년(헌종2),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학고 있는 의궤로 종묘와 영녕전 확장 공사를 기록한 의궤이다.


의궤에 기록된 행사 관련 그림

1835년(헌종1) 10월부터 1836년 3월까지 종묘의 정전과 영녕전을 확장하는 과정을 기록한 분상용 의궤다. 이 공사를 위해 1836년 1월에 종묘와 영녕전에 모셔져 있던 신위를 경희궁으로 옮겼고, 3월 27일에 제자리로 이안했다. 이 공사로 종묘의 정전과 영녕전이 확장되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어진도사도감의궤, 1902년,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하고 있는 고종 황제와 순종 황태자 초사 의궤이다.

고종 황제 어진과 황태자 예진의 제작 과정을 기록한 황태자용 즉 예람용 의궤로서 붉은 비단을 표지로 하였다. 이 행사는 고종이 평양에 지은 황실 이궁인 풍경궁의 태극전과 중화전에 어진과 예진을 봉안하기 위해 열린 것이다. <출처:중앙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