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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

[중앙박물관 특별전] '145년만의 귀환, 외규장각 의궤', 왕권과 통치

younghwan 2011. 7. 25. 2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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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궤는 국가적으로 중요한 행사나 통치행위를 기록으로 남겨 후대에 참조할 수 있게 해주는 역할을 가지고 있다. 그중에서 국왕의 공식적인 활동은 국가를 통치하는 정치적인 행위라고 할 수 있으며 국왕의 공식활동을 통해서 왕권의 정통성과 위엄을 드러내고 있다. 국왕의 공식적인 활동으로는 국가적으로 행하는 종묘제려, 사직제례, 선농단 등의 공식적인 제례를 주관하는 일, 궁궐이나 종묘 등을 수리하거나 새로 짓는 일, 국가를 위해 공을 세운 신하에게 공신의 칭호를 내리는 일 등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이런 국왕의 공식적인 활동들은 도감을 설치하여 그 과정을 의궤로 남겼다고 한다.

왕권과 통치
조선은 국왕을 정점으로 하여 중앙집권체제로 운영된 왕조국가였다. 국왕의 공식적인 활동은 곧 통치로 연결되었다. 특히 국왕은 국가의 주요 제사의 최고 집전자로서 왕권의 정통성과 위엄을 드러냈다. 종묘제례는 유교 사회에서 국가 권력의 정통성을 상징하였다. 사직제례는 민본주의, 농본주의를 바탕으로 왕도정치를 구현하고자 그 중요성이 강조되었다. 또한 농업과 곡식의 신을 모신 선농단과 누에의 신을 모신 선잠단에 지내는 제사 역시 국가 제사로서 중요하게 여겨졌다. 궁궐은 정치와 행정이 이루어지는 통치의 중심 공간, 국가 최고의 관부였다. 전란이나 화재로 궁궐이 불탔을 때에는 영건도감을 설치하여 궁궐을 수리하거나 새로 지었다. 이 외에도 국왕은 국가나 왕실을 위하여 공을 세운 신하들에게 공신의 칭호와 함께 여러 특전을 내렸다. <출처:중앙박물관>


종묘수리도감의궤, 1637년(인조15), 종묘 수리와 신주제작 과정을 기록으로 남긴 의궤이다.

병자호란으로 훼손된 종묘를 보수하고 종묘의 신주를 수리하고 새로 만든 사실에 대한 의궤다. 1636년 12월 청나라 군대를 피해 신주를 강화도로 옮겨 묻었다가 훼손된 경위에서 이듬해 7월 6일 종묘와 신주의 보수를 마치기까지의 과정이 기록되었다. 목록 없이 바로 문서가 시작되어, 체재가 정형화되기 전인 17세기 초 의궤의 양식을 보여준다. <출처:중앙박물관>


종묘친제규제도설병풍, 19세기 후반, 종묘제례관련 그림과 설명이 적혀 있는 병풍이다.

종묘에서 치르는 주요 의례를 그림과 함께 기록한 8폭 병풍이다. 각 폭에는 종묘와 영녕전의 전각, 의례에 사용된 각종 제구, 행사 장면 등이 그려져 있다. 조선 25대 왕인 철종의 책보를 모신 기록이 있어 19세기 후반 이후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중앙박물관>


종묘제례에 사용하는 제기


친경의궤, 1739년(영조15),왕이 직접 밭을 가는 의식을 기록한 의궤이다. 친경은 지금의 동대문구에 위치한 선농단에서 제사를 지내고 왕이 직접 밭을 가는 의식으로 공식적일 절차에 의해서 진행되었다고 한다.

영조가 거행한 친경 의식에 대한 의궤로, 친경이란 국왕이 풍년을 기원하고 농업을 권장하기 위해 선농단에 제사를 지내고 직접 밭을 가는 의식이다. 친경 의식에는 왕세자, 신하들뿐만 아니라 백성들도 함께 참여했다. 친경행사장의 배치도인 관경대도에는 국왕을 비롯한 참가한 인원의 위치와 수, 각각 쟁기를 미는 횟수 등이 표시되어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영녕전수개도감의궤, 1667년(현종8), 영녕전의 증축에 관한 기록이다.

현종 대 종묘 영녕전을 수리하고 증축한 과정을 기록한 의궤다.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가 계속해서 추가되어 모실 방이 부족하자 증축하게 되었다. 영녕전은 기존 구조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좌우의 익실을 각각 4칸으로 증축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창덕궁수리도감의궤, 1647년(인조25). 창덕궁의 수리에 관한 기록으로 인조반정 이후 창덕궁을 보수했던 내용이다.

인조반정으로 불타버린 창덕궁의 대조전.선정전.희정당 등 주요 전각을 다시 세운 과정에 대한 의궤다. 인조는 광해군이 조성한 인경궁을 해체하며 그 건축 자재를 활용하여 창덕궁의 보수를 완료하였다. 이 의궤를 통해 인경궁의 어떤 전각이 창덕궁의 어떤 전각의 축조에 재활용되었는지 파악할 수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경덕궁수리소의궤, 1693년(숙종19), 경덕궁의 수리공사

경덕궁의 대전과 광명전을 수리한 과정에 대한 의궤다. 경덕궁은 인조 대 이후 창덕궁의 이궁으로 역할을 했다. 1760년(영조 36)에 '경희궁'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공사를 담당한 공장의 명단을 보면 광명전 수리에 목수 65명, 석수 34명, 기와장 29명, 화원 18명을 비롯하여 총 180명의 장인이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경희궁의 재건,1823년(순조31), 화재로 절반가량 소실된 경희궁을 중건한 과정을 기록한 의궤다. 서궐은 경희궁으 별치이다.


분무공신 이삼의 초상화, 1750년(영조 26)

정장 광모와 관복을 입은 이상의 모습을 세밀하게 묘사한 반신상이다. 이 화첩은 1705년 분무공신 15명의 초상이 충훈부에 보관되에 있지 않아 각 공신들의 집에 보관하고 있던 것을 새롭게 본 떠 그린 것이다. 풍원군 조현영이 지은 기문과 이상의 아들인 이회일이 쓴 발문이 뒤에 붙어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분무녹훈도감의궤, 1726년(영조4), 난을 평정한 신하에게 공신의 칭호를 내림. 이인좌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운 신하들에게 공신의 칭호를 내린 기록으로, 녹훈도감에서 편집하였다.


이삼 공신교서, 1728년(영조4)와 영조가 분무공신 이삼에게 하사한 은잔. 영조는 이인좌의 난을 평정한는 데 공을 세운 오명항과 이삼 등을 분무공신으로 책봉하였다. 이 교서는 이삼을 2등 공신으로 책봉하면서 발급한 것으로, 윤혜교가 짓고 이경렬이 썼다. 1734년 9월18일 영조가 분무공신들을 불러 영화당에서 잔치를 베풀고 어필시와 함께 하사한 은잔이다. 잔 바닥과 밑면에 물고기가 새겨져 있다.


보사복훈도감의궤, 1694년(숙종20), 삭제되었던 공신의 칭호를 회복시킴

1689년 남인이 집권하면서 삭제되었던 보사공신을 1694년 서인이 재집권하면서 다시 회복시킨 과정에 대한 의궤다. 5월 29일 숙종이 복훈을 명하였고, 10월 12일에는 인정전에서 보사공신을 회복시키는 교서축을 반포하였다. 그 과정에서 일부 공신의 명단은 조정되기도 했다. <출처:중앙박물관>


보사녹훈도감의궤, 1682년(숙종8), 역모를 막은 신하에게 공신의 칭호를 내림

1680년(숙종6) 허견 등의 역모 사건을 막은 신하들에게 공신으 칭호를 내린 과정을 기록한 의궤다. 김만기.김석주의 1등 공신 2인을 비롯하여 총 6명의 공신을 3등급으로 나누어 녹훈하였다. 그 중 3등 공신이었던 정원로는 역모의 공모자로 몰려 공신에서 삭제되고 죽음을 당했는데, 이 사건과 관련한 기사에 한글 세주가 있어 주목된다. <출처:중앙박물관>


집상전수개도감의궤, 1667년(현종8). 집상전의 건축
인선왕후가 창덕궁에 거처할 처소를 마련하기 위하여 경덕궁 집희전을 철거하여 집상전을 지은 과정을 기록한 의궤다. 12월8일, 집상전의 기둥에 보를 올리고 상량문을 바치는 상랑의를 거행하였다. 공사는 빠른 속도로 진행되어 이듬해 1월에 완료되었다.

상량문을 올리는 의식 上梁儀
그날 상량할 시각이 되면 인의가 제조 이하를 인솔하고 검은 색의 단령을 갖추어 입고 자리에 나아간다. 찬의가 '네번 절하시오'라고 외치면, 제조 이하가 모두 네번 절한다. 찬의가 '무릅을 꿇으시오'라고 외치면, 제조 이하가 모두 무릅을 꿇는다. 사항 2인이 향안 앞으로 나아가 무릅을 꿇고 세번 향을 올린 후 물러난다. 독문관이 상량문을 읽고 마치면 물러나 자리로 돌아간다. 찬의가 '엎드리고 일어나 절하기를 네번 하시오'라 외치면 제조 이하가 모두 엎드렸다가 일어나 절하기를 네번 한다. 인의가 상량문을 취하여 대들보 위에 올린다. 인의가 제조 이하를 인솔하여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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