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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유적_고분

김해 예안리 고분군(사적 261호), 밭으로 변해버린 금관가야 고분군

younghwan 2012. 4. 18.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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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해 예안리 고분군은 낙동강 서쪽편 대동리 들판에 소재한 고대국가인 금관가야의 고분군이다. 다른 고분들과는 달리 봉분이 남아 있지 않고, 지금은 대부분 밭으로 변해버린 곳이다. 평지에 자리잡고 있는 이 고분은 금관가야 지배층이 아닌 일반인들이 묻혔던 곳으로 덧널무넘, 구덩식돌넛무덤, 독무덤, 앞트기식 돌방무덤 등 총 181기의 고분이 발굴되었다고 한다. 이 고분군은 가야시대에 존재했던 다양한 형태의 무덤들이 존재하고 있으며, 시대에 따라 변천한 가야의 매장방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하며 약 2천여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이 곳에서 출토된 유물은 대부분 부산대박물관에서 소장.전시하고 있다고 하며 일부는 김해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다.

 예안라 고분군은 도로변에 있는 밭에서 발견된 것으로 얼마전까지는 다수의 돌덧널들이 노출되어 있었다고 하며, 지금은 대부분 밭으로 변해버리고, 시범적으로 도로면에 그 흔적을 남겨 놓고 있는데, 잡초가 무성한 땅으로 안내표지판이 없다면 이곳이 고분인가 하는 느낌을 준다. 지배층의 무덤인 현재까지 남아 있는 가야 고분들은 대부분은 전망이 좋은 구릉에 자리잡고 있는데 비해서, 예안리 고분군은 일반인들의 무덤으로 평지에 남아 있어서 특이하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김해 예안리 고분군(사적 261호), 김해시 대동면 예안리
김해시에서 서낙동강을 따라 상동으로 가는 도로 가에 위치한 고분군으로 도로 건너에는 예안리 패총이 있다. 1947년경까지 다수의 돌덧널들이 노출되어 있었지만, 지금은 대부분 밭으로 변해 있다. 고분군은 서북의 까치산에서 동쪽의 마산으로 길게 연결된 습한 평지에 위치하고 있다. 1976년부터 국립중앙박물관과 부산대학교박물관이 5차례의 발굴 조사를 실시하였다. 덧널무덤 59기, 구덩식돌넛무덤93기, 독무덤 17기, 앞트기식 돌방무덤 12기 등 총 181기의 고분이 조사되었고, 토기류 1,100여점, 철기류 660점, 구슬류 180여점, 귀걸이 41쌍, 골촉 60여점 등 총 2,000여점이 출토되었다. 4~6세기에 걸쳐 계속적으로 만들어진 고분군은 가야지역에서 확인되는 모든 형식의 고분이 중복되고 있어, 가야의 묘제가 덧널무덤에서 돌덧널무덤으로 돌덧널무덤에서 돌방무덤으로 변해가던 과정을 알수 있다. 삼국지는 3세기경의 가야사회에서 아이가 태어나면 돌로 머리를 눌러 편두를 만드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예안리 고분군에서는 두개골 성형으로 앞이마가 심하게 후퇴한 10개체의 두개골이 출토되어, 이러한 풍습이 가야사회에서 실제로 존재했음을 증명해 주었다. 무려 190여개체의 인골이 확인된 예안리 고분군은 가야인 내지는 고대 한국인의 형질을 살펴볼 수 있는 풍부한 자료를 제공하였다. 편두를 포함하여 출토된 유물들은 현재 부산대학교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출처:김해시청>



잡초가 무성한 땅에 울타리가 있고, 도로변에 안내표지판이 있어서 이곳이 가야시대 고분임을 알 수 있다. 주변의 넓은 지역에 고분들이 분포해 있다고 하는데 지금은 대부분 밭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 곳이 가야시대 고분군임을 알게 해주는 유적지 안내 표지판. 그래도 상당히 많은 고분이 발견되고, 출토된 유물 또한 2천여점으로 상당히 많다고 할 수 있다.

예안리 마을로 들어가는 길.


예안리 고분군의 경계가 된다고 할 수 있는 작은 야산


미늘쇠(김해 예안리 무덤, 김해 양동리 무덤). 칼 모양의 몸통에 미늘같은 뾰족한 날이 서 있으며, 아래에는 투겁이 있어 자루를 끼울 수 있다. 긴 덩이쇠의 가장자리에 새모양 장식을 만든 것이 경남 함안과 합천 지역을 중심으로 발견되고 있다. 미늘쇠는 지배자의 신분을 나타내는 의식용 도구로 추정된다.


무늬가 있는 토기조각, 김해 예안리 출토

김해 예안리 고분군
김해시 대동면 예안리 시례마을에 소재하는 예안리분묘군에서는 덧널무덤, 돌덧널무덤, 돌방무덤, 독무덤 등 183기의 무덤이 확인되었다. 또 1,400여 점의 유물과 함께 상태가 양호한 고인골이 출토되어 주목을 끌었던 유적이기도 하다. 무덤들은 190여 평의 좁은 구역 내에 상하 4겹 정도 겹쳐진 것도 있으며, 이를 통해 무덤의 구조가 덧널무덤, 돌널계돌덧널무덤, 구덩식돌덧널무덤, 앞트기식돌방무덤 순으로 변천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처음으로 덧널무덤의 구조가 밝혀졌을 뿐만 아니라, 여기서 출토된 토기에 의해 확립된 편년체계는 삼국시대 토기편년의 기초를 확립한 것으로 평가될 만하다. 상태가 양호한 인골들은 변한과 가야사람들의 체질인류학적 연구 자료를 제공하였을 뿐만 아니라, 연령과 성별에 따른 무덤의 구조와 부장유물의 성격 등을 연구하는데 기초자료를 제공하였으며, 유물의 종류에 따라 주검의 어느 위치에 부장하는지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토양은 산성이 강하기 때문에 고인골과 같은 것은 대부분 부식되어 잘 남아 있지 않다. 예안리 유적의 경우 유적 상부에 형성된 패총의 영향으로 고인골이 매우 양호한 상태로 남아 있었다. 평균 신장은 남성이 164.7cm, 여성이 150.8cm이며, 현대인에 비해 비교적 안면이 높고 코가 좁으며 코뿌리가 편평한 편이다. 그리고 가야에서는 어릴 때부터 돌로 머리를 눌러 납작하게 만드는 '편두'라고 하는 습속이 있었다. 예안리유적의 경우는 4세기대의 여성인골 가운데 30%정도가 편두인 것으로 보아 특수한 신분의 일부 여성에게만 행해진 습속일 가능성이 높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변진조에도 이와 관련된 기록이 남아 있다. <출처:김해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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