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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문화재(탑_석등_범종)

부산 범어사 석등과 당간지주

younghwan 2011. 9. 8. 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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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범어사 경내에 남아 있는 문화재 중 석탑과 함께 그 내력이 가장 오래된 석등이다. 이 석등은 의상대사가 범어사를 창건할 때 같이 조성한 것이라고 하나 실제로는 석탑과 함께 통일신라 후기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석등의 내력은 오래되었지만, 조각수법이 투박하고,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몇자례 수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오히려 전체적인 조화나 균형미가 떨어진다. 통일신라에 만들어졌으면 상당히 오래된 것이기는 하지만, 원형이 유지되지 않았고 조형미가 떨어져서 보물로 지정되지 못한 것 같다.

 범어사에는 석등 외에 오래되어 보이는  여러개의 당간지주가 있는데, 이 또한 조각수법이 떨어지는 편이라서 그런지 문화재로 지정되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범어사 경내에는 다른 사찰과는 달리 옛 당간지주에 당간을 끼워 세워서 실제 사찰에서 당간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해인사 경내에서도 이런 당간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범어사 대웅전 앞 경내에 세워진 석등. 반대편에 세워진 3층석탑과 비슷한 시기인 9세기경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원래 석등은 경내 중심에 위치하거 석탑 앞에 세워진 경우가 많은데, 이 석등은 마당에 홀로 서 있다. 원래는 미륵전 앞에 있던 것을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이 석등은 하대석 위에 8각의 간주석을 세우고, 그 위에 상대석을 높고 있다. 하대석과 상대석에는 연꽃잎 조각되어 있다. 이 석등은 처음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중간에 간주석을 후대에 보완하였다고 한다. 전체적으로 조각수법이 빼어나지 못하며 후대외 보완된 간주석이 다른 부분에 비해서 균형이 맞지 않아 보인다.


석등의 불을 밝히는 화사석. 두께가 너무 두껍고 조각수법 또한 다른 석등에 비해서 많이 뒤떨어지는 편이다. 화사석 벽면에 조각도 거의 하지 않고 있다.


범어사 석등

범어사 석등,
이 석등은 신라의 의상대사가 678년(문무왕18)에 조성한 것이라고 전해오나, 양식상의 특징으로 보아 범어사 3층석탑과 같은 9세기경 작품으로 추정된다. 일반적으로 석등은 금당이나 탑과 함께 사찰의 중심부에 놓인다. 이 석등은 원래 미륵전 앞에 있던 것인데, 일제시대에 종루가 심검당 앞에서 지금의 자리로 옮겨짐에 따라 옮긴 것이다. 형태는 하대석 위에 8각의 간주석을 세우고, 그 위에 상대석을 놓아 석등을 밝힐 수 있는 창이 나 있는 화사석을 받치고, 그 위에 옥개석을 덮었다. 각 석재의 평면은 모두 8각이다. 이러한 양식은 통일신라시대 석등의 전형적이고 기본적인 양식에 속한다. 이 석등은 하대석 윗면의 복련이나 상대석 아랫면의 양련이 모두 복엽으로 8잎이 조각되어 있다. 화사석에는 4면에 장방형의 창을 내었다. 그러나 후대에 보완된 간주석이 빈약하고, 상대석이 두터워서 균형이 잘 맞지 않고, 하대석과의 비례가 맞이 않아 전체적 조화를 잃었다. 또 위쪽 상륜부의 부재들이 없어졌으며, 옥개석 위에 얹힌 노반은 제 짝이 아니다. <출처:부산시청>


당간지주는 당간을 지탱하기 위해 세운 받침대로 불교문화재 가운데 가장 많이 남아 있고 오래된 유물들이다. 모양은 단순해 보여도 보통 사찰의 오래된 내력을 말해주며 보물로 지정된 당간지주가 상당히 많다. 사찰에 폐사된 절터에 당간지주만 남아 있는 경우도 꽤 많은 것 같다.


범어사에는 옛당간지주에 실제로 당간을 끼워사 사용하고 있다. 당간에는 법회 등 행사를 알리는 탱화가 그려지 걸개그림을 걸어 놓아서 멀리서도 사찰임을 알아볼 수 있께 해 주는 역할을 한다.


마당 한편에 있는 또 다른 당간지주.

 

마당 한쪽편에 있는 또다른 당간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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