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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유적_고분

충주 누암리 고분군 (사적 463호), 진흥왕이 한강유역을 장악하고자 이주시킨 귀족들의 무덤

younghwan 2011. 10. 16.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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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시 가금면 누암리 일대에 남아 있는 누암리고분군은 신라 진흥왕이 한강일대를 장악하면서 이 지역을 경영하고자 했던 의도를 알 수 있게 해주는 유적지로서 이 일대에는 약 230여기의 고분이 있다고 한다. 이 지역은 신라와 고구려가 한강유역을 장악하기 위해 첨예하게 대립하던 지역으로 누암리고분군들의 주인은 진흥왕이 이 지역으로 이주시킨 신라귀족들로 추정하고 있다. 그 중 앞쪽에 위치한 고분은 그 규모나 출토유물 등으로 볼 때 진골신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누암리고분군이 있는 가금면 일대에는 고구려가 쌓은 산성인 장미산성을 비롯하여 충주 고구려비 (국보205호), 충추 탑평리 칠층석탑(국보6호), 우륵이 가야금을 연주했다고 전해지는 탄금대 등의 유적지들이 남아 있다.

 현재 사적 463호로 지정된 누암리고분군에는 발굴조사가 완료된 26기의 고분이 있다. 무덤의 조성형식은 대부분 굴식돌방무덤이고, 앞트기식돌덧널무덤 2기, 소형 구덩식돌덧널무덤이 3기가 있다고 한다. 이 고분들은 대부분 일제강점기에 도굴이 이루어져 중요한 유물을 출토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짧은 굽다리접시 등 후기신랴 양식의 토기류와 철제무기, 청동제 및 금동제 장신구 등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충주 누암리고분 전경. 삼국시대 말기인 진흥왕대 이후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이 고분군은 당시 무덤의 양식인 굴식돌방무덤으로 봉분의 위치 또한 평지가 내려다 보이는 구릉에 자리잡고 있다. 비슷한 시기의 경주 서악동고분군과 비슷한 위치에 조성되어 있다.


누암리고분군 중 입구에 위치한 봉분은 그 규모와 출토유물로 볼 때 동시대 왕릉과 비슷한 규모로 충주지역으로 이주한 진골성분 신라귀족의 무덤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아래쪽에 위치한 큰 규모의 봉분


뒷편 언덕 높은 곳은 봉분의 크기가 대체로 작은 편이다. 이 누암리고분군을 정비하기 전에는 많은 나무들이 자라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나무를 베어낸 흔적들이 곳곳에 보인다.


뒷쪽편 높은 언덕에 위치한 고분들


고분군 뒷편 언덕에서 내려다 본 누암리 고분군


누암리고분군 앞쪽으로 평야지대가 펼쳐지는 것은 아니지만, 탄금대가 있는 남한강 서쪽편 지역과 연결되고 있다. 멀리 충주 도심이 아파트가 눈에 들어온다.


안쪽편에 자리잡고 있는 봉분들


최근에 정비했던 것으로 보이는 고분


누암리 고분군 전경


고분 앞 가을 풍경


고분 앞에 있는 사과밭


사과밭에 탐스럽게 매달린 사과들



충주 누암리 고분군 (사적 463호), 충주시 가금면 누암리
이 곳은 무지(무덤)고개의 남쪽 기슭 능머리 일대에 있는 수많은 석실 봉토분으로 이 일대의 대부분이 도굴된 상태에서 최근에 발굴조사 된 후 복원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고 있는 곳이다. 그동안 고려장터라고 전해오던 곳으로, 일제시기에 도굴, 파괴되어 훼손이 많이 이루어졌다. 일반적으로 석실 내부에 시신을 놓을 시상대를 설치하고, 위로 오르면서 원형의 궁륭모양으로 점차 좁혀지는 수법의 특징이 있다. 낮은 곳에 있는 가장 큰 무덤의 주인공은 고분의 규모나 출토유물로 보아 진골신분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충주는 고구려 때는 국원성으로 불렸고, 6세기 중엽에는 신라 진흥왕이 한강유역으로 진출한 후 이곳에 소경을 설치하여 '중원소경'이라 하였으나, 왕경에 다음가는 부도로서의 역할을 하였던 6세기 중엽 이후에 조성된 고분군으로 추정된다. <출처:충주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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