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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_정원

경주 교촌마을, 경주향교와 최부자집을 중심으로 형성된 전통마을

younghwan 2011. 10. 24. 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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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를 비롯하여 영남지역에서도 손꼽히는 부호였던 경주 최부자집과 경주향교 주변에 형성된 오래된 마을인 경주 교촌마을이다. 이 마을은 신라 천년 세월동안 궁성이었던 월성의 서쪽편에 자리잡고 있으며, 김알지 탄생설화를 간직하고 있는 계림과 인접해 있다. 마을 뒷편으로는 신라 황금문화의 절정기에 조성된 대릉원이 있다. 이 곳은 통일신라시대 최고의 교육기관이었던 국학이 있었던 곳으로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경주향교가 자리잡고 있다. 조선시대 경주는 종2품 외관직인 부윤이 고을 수령으로 있던 큰 고을로 관아는 현재 경주 도심의 경주읍성내에 있고, 지역 유력자들은 향교를 중심으로 이 곳 교촌마을에 많이 거주했던 것으로 보인다.

 교촌마을 중심에는 99칸 대저택이었던 경주 최부자집이 있고, 그 앞쪽으로 옛 요석궁 자리에 지어진 큰 저택을 볼 수 있다. 마을에는 오래된 고택들이 여러채 남아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공개하지 않아서 내부를 볼 수는 없지만, 조선시대 양반가를 중심으로 형성된 반촌마을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도 경주를 찾는 유력인사들이 많았던 것으로 보이며, 주로 최부자집을 비롯하여 이 곳에서 숙박을 하면서 경주를 여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최부자집은 경주를 찾았던 인사들을 접대하는 것 또한 중요한 일로 여겼던 것으로 보이며, 이 집안에서 손님을 접대했던 술인 교동법주(경주법주)가 경주를 대표하는 문화유산 중 하나이다. 현재 마을의 규모는 그리 큰 편은 아니며, 마을 앞쪽으로는 월성해자 역할을 했던 남천이 흐르고 있다. 마을어귀에는 원래의 위치는 아니지만, 경주지역 유력인사들이 정치적인 견해를 교류하던 지방자치조직 역할을 했던 사마소 건물이 남아 있다.



원래부터 이런 모습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마을 중앙에는 넓은 마당이 있고 정면에 솟을대문을 하고 있는 경주 최부자집이 보인다. 이 길을 중심으로 규모가 있는 고택이 여러채 남아 있다.


경주 최부자집으로 잘 알려진 이 가옥 조선후기 대표적인 대지주 집안의 종가로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였던 최준의 생가이기도 하다. 만석군 대지주였던 이 집안은 해방후 전재산을 기부하여 영남대를 설립하였다고 한다.


이 가옥은 18세기에 지어진 가옥으로 원래는 99칸에 이르는 큰 저택이었으나 현재 옛건물로는 안채만이 남아 있다. 사랑채는 화재로 소실되었던 것을 최근에 복원하였다고 한다.


최부자집 안채. 영남지역을 대표하는 큰 부호였던 명성에 비해서 건물은 화려하지 않으면서 소박한 느낌을 주고 있다.


최부자집 옆에 있는 경주를 대표하는 문화유산 중 하나인 교동법주를 만드는 집이다. 조선 숙종때 궁중에서 음식을 관장하던 최국선이 고향으로 내려와 터를 잡은 집으로 보인다.(?) 최부자집은 경주를 찾는 유력인사들이 많이 묵었으며, 손님접대를 위해서 항상 술을 준비하고 있어야 했기때문에 현재까지도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입구에 전시되어 있는 교통법주와 전통음식들


교동법주 기능보유자가 살고 있는 집.

경주 교동 법주,
법주는 경주 교동 최부자댁에 전해 오는 비주로 조선 숙종 때 궁중에서 음식을 관장하던 관직에 있던 최국선이 고향으로 내려와 최초로 빚은 것으로 궁중에서 유래된 술이다. 술빚기는 9월~4월까지가 적기이고, 연중 보관이 가능하다. 술은 그 재료인 물이 중요한데, 이 법주는 최씨댁 마당의 우물물을 떠서 만든다. 원료는 밀술로 밀누룩과 찹쌀을 쓰고, 덧술로 찹쌀밥을 넣어 빚는데 100여 일간을 숙성시킨다. 숙성된 법주는 외관이 발고 투명한 미황색을 띠며 특유의 향기와 감미에 약간의 산미를 내는 부드러운 술이다. 현재 이 술의 기능보유자는 배영신이다. <출처:경주시청>


최부자집에서 경주향교로 들어가는 골목길. 고택들과 함께 오래된 시골집들도 많이 들어서 있다.


골목길에서 보이는 오래된 고택.


지금은 이 마을에 새로이 한옥마을을 조성하고 있으며, 최근에 새로 지은 한옥들을 많이 볼 수 있다.


경주향교 외삼문. 경주향교가 있는 이 자리는 신라 신문왕때인 682년에 세워졌던 교육기관인 국학이 있었던 자리로 고려시대에는 향약이, 조선시대에는 향교가 자리하면서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현재의 경주향교는 조선 성종때 성균관을 본떠서 만들었으며, 전묘후학의 건물배치를 하고 있다. 최근에는 이 곳에서 전통혼례식이 많이 치러지고 있다.


경주향교 대성전


솟을대문이 있는 고택


이 마을을 한옥마을로 조성하면서 최근에 많은 보수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원래는 경주에서 제일 부유한 마을이었지만 지금은 한가한 시골마을처럼 느껴진다.


꽤 큰 저택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지금은 낡아서 작은 시골집처럼 보인다.


교촌마을 골목길


마을 어귀에 있는 조선시대 젊은 유생들이 지역여론을 장악하고자 세웠던 사마소 건물이다. 원래는 향교부근에 있었던 것으로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사마소 서쪽편으로는 김유신 장군과 관련된 설화가 남아 있는 제매정이라는 우물이 있다. 이 곳에 김유신 장군이 살았던 집이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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