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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박물관 미술관] 신라의 절터 출토 기와, '신라의 미소'라 불리는 얼굴무늬 수막새

younghwan 2011. 10. 30. 2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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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 천년의 수도였던 경주에는 많은 사찰이 있었으며, 그 중 불국사는 오늘날까지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신라가 불교를 공인한 것은 법흥왕때인 527년으로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귀족들의 반발을 잠재우면서 국가적인 종교로 발전하게 되었다. 삼국시대 경주에는 7처가람이라 하여 신라인들이 신성시 여기던 숲이 있던 곳에 큰 사찰들이 들어서게 된다. 경주 동쪽편의 분황사와 황룡, 남쪽편 낭산 끝자락에 세워진 사천왕사, 서쪽편 오릉 주변의 영흥사, 영묘사, 담엄사, 흥륜사가 있다. 특히 신라 시조인 박혁거세의 능이 있는 오릉 주변에 많았다는 것은 불교 공인을 반대한 세력을 박씨들이 대표한다고도 볼 수 있지만, 원래 경주의 중심이 오릉 주변이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 같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면서 칠처가람에서 벗어난 새로운 세상이라고 할 수 있는  불국사가 경주에서 남쪽으로 멀리 떨어진 토함산 아래에 세워졌다.

 경주에 존재했던 수많은 사찰들은 불국사를 제외하고는 오늘날 절터만이 남아 있어며, 옛 사찰들의 규모와 모습은 절터에서 출토되는 유물로 추정해 볼 수 있을 뿐이다. 경주에 있었던 사찰 중에서 불국사는 청운교.백운교 등이 온전히 남아 있고 불전들 또한 옛 축대와 초석 위에 그대로 불전을 다시 세웠기때문에 어느 정도 당시 사찰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른 사찰들은 남아 있는 석탑과 주춧돌, 축대 등으로 가람의 배치나 건물의 규모등을 유추해 볼 수 있으며, 실제로 절터에서 출토되는 기와 등에서 당시 건축기술의 수준을 가름해 볼 수 있다. 
 

칠처가람
신라에서 불교가 공인된 것은 법흥왕 (재위 514~540) 14년(527)의 일입니다. 법흥왕의 불교 공인은 귀족들의 반발을 이차돈의 순교로 잠재웠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왜 귀족들은 반발하였던 것일까요? 이차돈이 천경림에 절을 지은 것에서 귀족들이 반발한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천경림은 불교 유입 이전에 신라 사람들이 신성시하던 곳으로 하늘에 제사지냈던 곳으로 추정됩니다. 그런데 이곳에 절을 짓는다는 것은 각 부족마다 다른 신앙으로 자기의 기득권을 가지고 있다가 그것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삼국유사'에는 흥륜사를 비롯한 7곳의 전불시대 절터가 있는데, 영흥사, 황룡사, 분황사, 사천왕사, 영묘사, 담엄사 등 이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불국토는 저 멀리 있는 곳이 아니라 바로 신라 땅이라는 신라 사람들의 자신감을 엿볼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이 절들이 들어선 곳은 신라에서 전통적으로 신성시되던 곳이라는 점과 불교 공인 후 얼마 되지 않아 절들을 그 곳에 세운 점으로 보아 얼마나 빨리 신라가 불교국가가 되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출처:경주박물관>



얼굴무늬 수막새, 경주 영묘사 터 출토된 기와에 사용된 수막새로 사람얼굴을 하고 있는 유일한 유물이다. '신라의 미소'라고도 불리는 이 수막새는 지금도 경주를 대표하는 이미지나 상징물로 여겨지는 중요한 유물이다.

미소를 한껏 머금고 있는 이 막새기와는 신라 혹은 경주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이미지 가운데 하나 일 것입니다. 사람 얼굴이 새겨진 기와는 익산 미륵사 터, 경주 황룡사 터 등에서도 출토되었지만, 이 막새기와에 사람 얼굴을 나타낸 것은 이 기와가 유일합니다. 이 기와는 일제강점기 영모사 터(현재 흥륜사)에서 나왔다고 전하며, 한 일본인이 보관하다가 1972년 국립경주박물관에 기증한 것입니다. 가장자리 테두리가 넓고, 높은 온도에서 구운 점으로 미루어 보아 삼국시대 만든 것으로 여겨집니다. <출처:경주박물관>



'영묘사'가 새겨진 암키와, 영묘사 터, 8~9세기. 영묘사는 신라칠처가람의 하나로 박혁거세 능이 있는 오릉 북쪽편에 위치하고 있다. 창건후 선덕여왕이 이 절에서 우는 개구리 소리로 백제의 복병을 감지했다는 일화를 남긴 사찰이다. 사천왕사와 함께 신라를 대표하는 조각가인 양지스님이 남긴 작품이 많았던 사찰이다. 이 절터는 원래 흥륜사 절터로 알려져 있었으나 이 곳에서 '영묘사'라는 글자가 적힌 기와가 발견되어 지금은 영묘사 절터로 추정하는 의견도 있는데 확정적이지는 않은 것 같다.


용얼굴무늬 기와, 영묘사터, 8~9세기. 신라 최고의 조각가인 양지스님의 흔적이 남아 있는 사실적이고 힘찬 표현이 돋보이는 유물이다.


흥륜사 절터에서 출토된 기와들로사자무늬 수막새, '사'가 새겨진 암키와, '흥'이 새겨진 수키와, 연꽃무늬 수막새이다. 흥륜사는 신라최초의 사찰로 고구려 승려 아도가 지은 것이라 전한다. 같은 위치에 출토된 것 같은데, '흥'자 적혀 있는 것으로 봐서 흥륜사 절터에서 발견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연꽃무늬 수막새와 연꽃보상화무늬, 경주 석굴암, 8~9세기


연꽃.보상화무늬 수막새, 넝쿨무늬 암막새, 연꽃무늬 수막새, 불국사 출토


악기를 연주하는 천인, 불국사 출토


경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당시 경주의 모습. 지금보다도 도시의 규모가 훨씬 큰 것으로 보이며, 각처에 많은 사찰들이 산재해 있다. 오른편에 있는 낭산 에는 황복사와 사천왕사가 있었고, 그 북쪽으로 분황사와 황룡사, 서쪽편 오릉 주변으로 담엄사, 영묘사, 흥륜사, 영흥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길은 1998년 미술관 터 발굴에서 확인된 것으로 통일신라시대에 실제 사용하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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