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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박물관 미술관] 사리갖춤, 황룡사 목탑 찰주본기와 감은사 사리갖춤(보물 366호)

younghwan 2011. 10. 31.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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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리(舍利)는 부처나 성자의 유골을 의미하며, 사리를 숭배하는 신앙은 불교가 처음 생긴 이래로 성행했다. 석가모니가의 사리를 8등분하여 인도 각지에 탑을 세운 것이 불탑의 시초이며, 아소카왕이 이를 세분하여 84,000개의 탑을 인도 각지에 건립하였다고 한다. 불교가 동아시아로 전래되면서 불상이 신앙의 중심이 되기 이전에는 부처의 사리를 모신 탑이 사찰의 중심이 되었으며,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까지는 탑을 중심으로 사찰의 가람을 배치하였다. 부처의 사리를 모신 탑(Pagoda)은 인도나 서역에서는 반구를 엎어 놓은 모양이었으나 중국으로 전해지면서 전각의 형태를 취하게 되면서 목탑의 형태를 하게 되었다. 목탑은 중국, 한국, 일본에서 비슷한 형태로 많이 세워졌던 것으로 보이며, 이후에 중국에는 벽돌로 쌓은 전탑이, 한국에서는 목탑을 모방한 석탑이 많이 세워졌다. 삼국시대에 불교가 전래된 이래로 통일신라시대까지는 전국적으로 엄청난 숫자의 석탑이 세워졌으며, 선종이 확산되는 고려시대부터는 석탑보다는 불상을 모신 불전이 신앙의 중심으로 변했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시대 이래로 전국적으로 세워졌던 많은 탑에는 부처의 사리를 모신 사리갖춤과 각종 공양물들이 탑 내부에 많이 모셔졌으며, 이들 사리갖춤들은 오늘날까지 석탑을 해체.보수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것들이 계속 발견되고 있다. 최근에는 익산 미륵사지를 해체.수리하는 과정에서 화려한 사리갖춤이 발견되어 세상을 놀라게 했다.  경주박물관에는 경주지역에서 출토된 사리엄 장구와 공양물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경주에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석탑인 분황사모전석탑에서 출토된 사리갖춤과 감은사지 삼층석탑에서 출토된 사리갖춤 등이 전시되어 있다.

호국불교
신라의 불교 공인 과정을 보면 왕권 강화와 불교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시기 불교는 곧 왕실불교이며 국가불교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필연적으로 불교는 국가를 보호하고 왕실의 번영을 이끌어 준다는 호국불교로 발전하였습니다. 특히 6세기 중엽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간의 치열한 경쟁은 이를 더욱 강화시켰습니다. 신라 호국불교의 대표적인 예는 호국경인 '인왕경'이 강설되면서 황룡사에 신라 주변 아홉나라의 침입으로부터 지켜준다는 믿음으로 선덕여왕 때 구층목탑을 세운 것입니다. 이 외에도 문무왕때에는 옛 백제와 고구려 땅에 남아 있던 당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사천왕사를 창건하였습니다. 또한 문무왕은 왜구를 물리치겠다는 의지로 동해에 감은사를 짓기 시작하였으며, 본인이 죽어서도 동해의 호국룡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고 하였습니다. <출처:경주박물관>

분황사석탑 사리갖춤,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 634년
이 것들은 1915년 분황사 모전석탑을 수리할 당시 발견되었던 석탑 속에 있던 사리갖춤과 각종 공양물입니다. 분황사는 신라 선덕여왕 때인 634년에 조성된 절로, 이 사리갖춤이 있던 모전석탑과 역시 같은 때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사리는 비단에 싸여 은합 안에 있었으며, 이 밖에도 수정.금바늘.바늘통.가위.집게.조개 등의 공양품도 함께 납입되었습니다. 이 가운데 여성이 주로 사용하는 바늘, 바늘통, 가위, 집게 등이 있어, 분황사의 발원자인 선덕여왕과 이 사리갖춤을 관련짓기도 합니다. 분황사 석탑은 고려시대 때에도 한번 수리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그 이유는 북송 때의 동전인 송녕중보가 나왔기 때문입니다. <출처:경주박물관>


수정.향유병.장신구. 분황사모전석탑은 경주에 남아 있는 석탑 중 그 연대가 가장 오래된 것으로 선덕여왕때 세워진 것이라고 한다. 이 석탑에는 사리와 함께 수정.금바늘 등의 공양품도 함께 발견되었는데, 비교적 초기의 사리갖춤이라고 할 수 있다.


죽국 북제(550~577년) 때 사용한 동전인 상평오수전과 중국 북송의 동전(1102~1106년 사용) 숭녕중보가 발견되었다.


바늘.바늘통.가위.쪽집게가 발견되었는 선덕여왕과 관련된 것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조개, 일본 오키나와가 원산지인 조개


구슬.옥.수정


금동장식판

황룡사 구층목탑 찰주본기
흔히 황룡사 찰주본기로 일컬어지는 금동판은 황룡사 구층목탑 찰주 심초석의 사리구멍 안에 있던 사리갖춤 가운데 내함으로 언젠지 알 수 없으나 도난 되었다가 1966년에 되찾은 것입니다. 금동판은 네 개를 경첩으로 연결시켜 네모난 상자가 되는데, 한면은 문고리가 달려 있는 것으로 보아 문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문의 앞뒷면에는 부처와 불법을 수호하는 인왕과 신장이 각각 2구씩 새겨져 있습니다. 나머지 세면에는 황룡사 구층목탑을 만든 경위와 탑이 기울어 경문왕 때인 817년 탑을 고친 내용 등을 새겼습니다. 구층목탑을 세운 경위는 '삼국유사' 등에 기록된 내용과 큰 차이가 없는데, 자장이 삼한의 통일과 국가의 안녕을 위해 황룡사 구층목탑을 세우자고 선덕여왕에게 건의 하여 이간 용수를 감독으로 하고 백제 장인 아비를 대장으로 삼아 높이 224자(약 80미터)의 목탑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출처:경주박물관>


황룡사 목탑 찰주본기(복제품), 872년. 황룡사 구층석탑 사리함의 외함으로 목탑에서 부처의 사리를 모시는 사리갖춤의 형태를 잘 보여 준다.


외함 바깥쪽에는 황룡사 구층목탑은 만든 경위와 탑을 수리한 기록이 남아 있는데, '삼국유사'에 기록된 내용과 큰 차이가 없다고 한다.

황룡사 구층목탑 찰주본기



감은사 사리갖춤(보물 366호), 감은사 터 서삼층석탑 출토
삼국통일을 이룬 문무왕을 기리기 위해 그의 아들 신문왕이 682년에 완성한 감은사 서탑의 사리갖춤입니다. 1959년 해체, 복원하는 과정에서 3층 탑신 윗면에 뚫린 장방형의 구멍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사리갖춤은 제일 안쪽에서부터 수정사리병-사리기-금동사리외함의 순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사리외함에는 사천왕을 따로 만들어 부착하였습니다. 서역인을 연상시키는 이국적인 얼굴과 사실적이고 험상궂은 표정, 힘찬 자세, 치밀하게 묘사된 갑옷 등 통일신라 초기 사실적인 조각 양식을 유감없이 보여 줍니다. <출처:경주박물관>


청동 사리함, 경주 동천동 출토, 8~9세기. 감은사지 삼층석탑 서탑에서 출토된 사리갖춤이다. 감은사지 삼층석탑에서는 동탑과 서탑에서 사리갖춤이 따로 출토되었는데, 동탑에서 출토된 사리갖춤은 중앙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다.


사리함 외함에는 사천왕상이 새겨져 있는데 서역인을 연상시키는 이국적인 얼굴과 사실적인 묘사가 매우 뛰어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동시대에 활약한 양지스님의 작품으로 추정하는 의견이 많은 것 같다.


감은사지 삼층석탑 서탑 사리갖춤 내함. 하나의 작은 불전으로 만들어 놓은 것 같다.


청동사리함, 경주 동천동 출토, 8~9세기


사리탑과 사리병

봉화 서동리 동탑 사리갖춤
경상북도 봉화군 서동리에 있는 쌍탑 가운데 동삼층석탑에서 발견된 사리갖춤으로, 1962년 이 탑을 해체 수리할 때 발견되었습니다. 1층 탑신 윗면에 사리를 안히할 수 있는 구멍을 뚫고 그 안에 5과의 사리를 담은 녹색 유리사리병, 또 다시 그것을 다시 담은 곱돌 사리그릇 뿐만아니라 흙으로 빚은 99개의 작은 탑을 봉안하였습니다. 탑은 틀로 찍어 구운 다음 하얀색 호분을 발랐으며, 탑 바닥에는 작은 구멍을 뚫어 다라니경을 넣었습니다. 이 구멍은 다시 나무 마개로 막았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많은 탑을 탑에 봉안하였을까요? '무구정광대다라니경'에는 77개 혹은 99개 탑을 만들고 그 안에 다라니를 넣어 탑 안에 봉안하면, 수명을 연장시킬 수 있고 죽어서는 도솔천에 태어날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출처:경주박물관>


사리그릇과 사리병,


흙탑, 봉화 서동리 동탑 출토, 9세기


포항 법광사 사리갖춤 중 탑지이다. 846년 탑을 옮기면서 넣은 탑지와 1747년 탑을 수리하면서 넣은 탑지이다.


납석제 사리그릇, 포항 법광사


납석제 시리그릇, 봉화 축서사 출토, 86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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