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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박물관 미술관] 신라의 불교조각, 금동불상과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국보 28호)

younghwan 2011. 11. 1. 2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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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상은 부처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으로 좁게는 여래상, 넓게는 보살상과 신장상까지를 포함한다. 불상은 그리스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을 받은 간다라 또는 마투라지방에서 처음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불교의 전파경로에 따라 서역과 중국을 통해서 우리나라로 전해졌다. 불상은 석재를 조각한 석조불상, 금속에 황금빛 도금을 한 금동불상, 철로 만든 철불상, 나무로 만든 목조불상 등이 있다.금동불은 동과 주석,납 등의 합금에 금도금을 입힌 불상으로 동의 제련, 합금, 주물, 도금 등 고도의 숙련된 주조기술과 고가의 재료인 동과 밀납을 필요로 한다. 금동불은 상당한 비용과 기술을 필요로 하지만, 정교한 조각이 가능하고 내구성이 뛰어났기때문에 많이 만들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금동불상은 그 용도에 따라서 수cm 작은 금동불상에서 수십m에 이르는 큰 불상도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불상은 517년에 만들어진 고구려 삼존불이라고 하며, 삼국시대 황룡사 금당에 모셔졌던 장륙상은 높이 5m의 삼존금동불상의 대형불상이었으며, 불국사 비로자나불.아미타불좌상, 백률사 약사불입상이 통일신라시대를 대표하는 금동불상이었으며, 삼국시대를 대표하는 불상으로는 반가사유상 2점을 있다. 또한 구한말 경복궁 중건을 위해 해체되었다고 전해지는 법주사 금동미륵보살입상은 높이 30m에 이르는 큰 불상이었다고 한다.

 금동불은 동의 제련과 합금, 주물, 도금에 이르기까지 고도의 숙련된 주조기술과 당시 상당한 고가였던 동과 밀납 등이 요구되었기 때문에 누구나 쉽게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왜 이 금동불을 많이 만들었을까요? 정교한 조각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내구성 또한 뛰어났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와 아울러 경전에서 일컫는 것처럼 부처의 몸에서 나는 황금색을 표현하기에 안성맞춤이기도 하였기 때문입니다. 금동불은 백률사 약사불처럼 2m 가까운 것이 있는가 하면, 10cm 내외의 아주 작은 것까지 그 크기가 다양합니다. 백률사 약사불 같이 커다란 금동불들은 법당의 주존불이었다면, 10cm 내외의 금동불은 개인이 가지고 다니던 호지불이거나, 사리갖춤 가운데 하나 혹은 이동형 불감에 안치하기 위해 만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작은 금동불은 새로운 불상 양식을 다른 지역으로 전하는 수단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삼국시대 말기 신라의 금동불은 기술적인 미숙함을 보이기는 하지만, 편단우견에 둥근 단지를 쥐고 있는 독특한 금동불을 창안하는 등 독창적인 아름다움을 뽐내기도 하였습니다. 통일 후 신라는 고구려, 백제의 문화를 아우르고 당나라 불상의 영향을 흡수하여 곧바로 주조기술의 측면이나 조각으 측면에서 당대 최고의 금동불을 만들었습니다. 특히 백률사 약사불, 불국사 아미타불과 비로나자불을 신라 3대 금동불로 꼽는데, 이것은 융성했던 신라의 경제력을 가늠하게 합니다. <출처:경주박물관>


불국사 출토 부처상(8~9세기), 금동 반가사유상



금동 반가사유상과 황룡사지 출토 반가사유상 머리, 7세기 전반


금동보살입상(7세기), 금동비로자나불 좌상(8세기), 금동비로자나불 입상(9세기), 금동약사불 입상(8세기)


금동보살입상(8세기), 금동불입상(9세기말), 금동불입상(9세기말)


금동보살입상(달성 공산면 출토, 8세기 후반), 금동불입상, 8세기


금동일광삼존불(6세기 후반), 금동불입상(7세기 전반), 금동탄생불입상, 논산 연산면 출토, 7세기 후반


국보 29호로 지정된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이다. 높이 1.7m로 현존하는 통일신라시대 금동불상 중에서는 가장 큰 규모의 금동불상이다.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 일제강점기에 찍은 사진에는 약단지를 들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어, 약사여래입상이라고 한다.

금동약사불입상, 국보 29호, 경주 소금강산 백률사
이 약사불은 원래 경주 소금강산 백률사에 있던 것인데, 1930년에 박물관으로 옮겼습니다. 소금강산은 불교 공인 과정에서 순교한 이차돈의 머리가 날아갔다고 한 곳으로 신라인들에게는 불교 성지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약단지를 쥔 손이 없는데 무슨 이유로 약사불이라고 부르는 것일까요? 일제강점기에 우리 문화재 사진집인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사진을 보면 왼손에 약단지를 들고 있는데, 경주 사람들은 이 부처를 약사불로 여겼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온 몸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외형 틀과 내형 틀을 고정하기 위한 틀잡이 자국이 있습니다. 뒷면에는 머리 한 곳과 몸체 세 곳에 사각형 구멍이 뚫려 있는데, 모두 턱이 져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별도의 구리판을 끼워 마감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불상의 표면을 자세히 보면, 여러 곳 붉은색, 푸른색, 녹색의 흔적을 볼 수 있습니다. 원래는 부처의 몸에서 금빛이 난다는 경전의 내용을 쫓아 금도금하였을 것이지만, 점차 도금이 없어지자 어느 때인가 불상에 채색하였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신체의 양감이 두드러졌던 8세기 중엽 불상과 달리 다소 밋밋해졌지만, 입가에 자미로운 미소를 머금은 얼굴에서 8세기 중엽 불상에서나 볼 수 있는 종교적 숭고미가 느껴지는 것으로 미루어 8세기 후반에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출처:경주박물관>


최대 규모의 금동불상이라 할 수 있는 높이 30여m에 이르는 법주사 금동미륵보살입상이다. 원래 있던 금동불입상은 대원군의 경복궁 중건때 해체되었고, 일제강점기 이후 시멘트로 만든 불상이 있었으나 최근에 금동불상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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