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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관아

충주 관아공원, 도심공원으로 변모한 옛 충주목 관아터

younghwan 2011. 11. 3.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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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주 지역은 삼국시대에 중원경이 설치되었고 고려 태조 23년(940) 충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984년(성종 2)에 전국에 12목이 설치되면서 충주목이 설치되어 구한말 행정구역개편때까지 그 지위를 유지했다. 조선시대 행정단위인 목(牧)은 정3품의 외직문관이 고을 수령으로 있었던 큰 고을로 고려시대에는 전국에 12목을, 조선시대에는 전국의 20목을 두었으며, 감영인 설치된 지역에서는 관찰사가 겸직하기도 했다. 충주지역은 남한강 중류에 위치해 있으면서 한강조운에서 매우 중요한 곳이었으며, 조령과 죽령을 통해 영남지방과 한양을 연결해주는 육상교통로의 중심이기도 했다.

 충주 관아공원은 충주시 성내동 옛 충주읍성에 있는 조선시대 관아터에 조성한 도심공원으로 충주목 동헌인 청령헌과 영빈관으로 사용했던 제금당이 남아 있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들은 구한말인 1870년(고종7) 화재로 소실된 것을 중건한 것이라고 하며, 1980년대까지 중원군청 건물로 사용하던 것이라고 한다. 공원내에는 청령헌과 제금당 외에 부엌과 같은 용도로 사용된 수직청건물과 수령 500년이 넘는 느티나무 등이 남아 있으며, 최근에 복원한 것으로 보이는 2층누각형식의 관아아문 등이 있다.



충주 도심에 위치한 충주 관아공원. 조선시대 충주목 관아가 있었던 이곳에는 1980년대까지 중원군청이 자리하고 있었다고 한다. 현재는 옛 군청건물들을 철거하고 공원으로 조성해 놓고 있다.


충주 관아공원 출입문인 충청감영문. 2층 문루 형식의 전형적인 관아 아문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옛 건물은 아니고 복원한 것으로 보인다.


충주목관아 동헌인 청령헌. 이 건물은 구한말인 1870년 화재로 불타버린 것을 중건한 건물이다. 앞면 7칸, 옆면 4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건물로 지방 관아 건물 중에서는 그 규모가 큰편이다. 왼쪽 2칸은 온돌방, 가운데 3칸은 대청마루, 오른쪽 1칸과 왼쪽끝 1칸은 누마루 형식으로 되어 있다.


충주목 관아 영빈관으로 사용되었던 제금당. 이 건물은 조선시대 지방 관아 건물 중 동헌 별관으로 지어진 건물로는 유일하게 남아 있는 건물이라고 한다. 건물은 앞면 7칸, 옆면 3칸으로 규모가 큰 편이며,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충주지역은 남한강 조운과 조령.죽령과 연결된 육상교통로의 중심지로 이 곳을 오가는 고위 인사의 방문이 많아서 공식적인 숙소인 객사 외에 영빈관을 두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제금당 건물은 겹처마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상당히 격이 높은 건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산고수청각은 조선후기 관아에서 식사 등을 준비하던 수직청 건물로 제금당에 묵은 손님을 접대하기 필요했던 건물로 보인다. 앞면 4칸의 크지 않은 건물로 부엌과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건물에는 큰 대청마루는 두지 않고 걸터 앉을 수 있는 작은 툇마루를 두고 있는것으로 보아서 실무자들을 위한 공간임을 알 수 있다.


충주목관아에서도 구한말 천주교 신자의 심문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를 기념하는 비가 세워져 있다.


관아 마당 서쪽편에 있는 수령 500년이 넘은 느티나무


충주목관아 마당


관아 남쪽편에는  충주축성사적비가 세워져 있다. 이 비석은 1866년 병인양요 이후 충주목사 조병로가 읍성을 개축하면서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이라고 한다.


관아 동쪽편 고목


예성별관으로도 불렸던 제금당 출입문인 외삼문이다.


충주 관아공원 골목길과 관아 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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