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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

[중앙박물관 특별전] "문자, 그 이후: 한국고대문자전", 문자의 수용

younghwan 2011. 11. 12.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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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반도에서 문자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고대국가가 형성되기 시작한 청동기시대로 중국과 비슷한 시기가 아닐까 생각된다. 고조선은 전국시대부터 중국 연나라와 교역이 활발했으며, 명도전이나 오수전 등의 화폐들이 중국과의 교역통로에 위치한 지역에서 많이 출토된다. 또한 전국시대나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이후 많은 연나라지역 사람들을 중심으로 많은 사람들이 고조선으로 망명했다는 기록이 있고, 고조선으로 망명했다는 기자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볼 때 고조선은 중국과 비슷한 수준으로 문자를 사용했다고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한반도에서 문자 사용은 비교적 이른 시기인 고조선시대일 것으로 추정되지만, 현재까지 발굴되고 있는 문자와 관련된 유물들은 주로 한.중.일 해상교역로에 분포해 있는 삼한지역과 한사군 중 낙랑군이 설치되었던 평양지역에서 많이 출토되고 있다. 특히, 중국과의 교역으로 큰 부를 축적했던 것으로 보이는 창원 다호리지역과 김해 예안리 유적에서는 당시 교역에 사용했던 붓과 손칼, 숫돌 등이 발견되었으며, 낙랑지역에선 호구목간을 비롯하여 편지등에 사용했던 도장들이 많이 출토되고 있다.


문자의 수용
그림이나 기호를 사용하던 단계에서 문자를 사용하게 된 것은 선사시대에서 역사시대로의 진입을 의미한다. 고조선에는 중국과의 전쟁, 혹은 경제교류를 통해 문자를 수용하였다. 명도전과 오수전 등의 화폐가 이를 말해준다. 한반도 북부 지역에 낙랑군 등 한의 군현이 설치되면서, 군현을 중심으로 중국의 문서행정이 펼쳐지게 되었다. 호구를 기록한 문서, 문서를 봉함하고 진흙을 채운뒤 도장을 찍은 봉니가 남아 있다. 삼한시대에도 중국과의 정치적 교류와 교역이 활발하였다. 삼국지 위지 한전에 따르면, 삼한의 군장들은 한 군현에 인장과 인수를 요구하였다고 한다. 경남 창원 다호리 유적과 김해 예안리 유적에서는 붓과 손칼, 숫돌이 발견되었다. 칼은 목간에 쓴 것을 깍아 지우는 데 쓰였으며, 숫돌은 그 칼을 가는데 사용되었다. 수용 초기의 문자란 지배자의 권위를 상징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글새김뼈, 중국 상나라,


새김뼈와 점뼈, 삼한.삼국시대, 부산기장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해지는 중국의 갑골문과 같은 용도로 보인다.

새김뼈.점뼈, 갑골문
중국 은(상) 시대에 만들어진 가장 오래된 한자이다. 점을 칠 때 거북껍질이나 소뼈에 구멍을 뚫거나 불로 지져 거기에 생기는 갈라짐을 보고 길흉을 판단하였는데, 점을 친 뒤에는 그 내용을 새겨 놓은 것이 바로 갑골문이다. 갑골은 오래 전부터 발견되었으나 처음에는 이를 글자로 파악하지 못하고 용골이라 하여 부수어 가루를 내어 약재로 사용했다. <출처:중앙박물관>


'秦(진)'새김 청동창, 중국 전국시대, 평양

근거리 전투에 사용하였던 무기로 긴 자루 손잡이에 꽂아 적을 끌어당겨 죽이는데 쓰였다. 기년 즉 만든 떄나 만든 사람 혹은 건물의 주인공 이름을 넣거나 "매우길함. 大吉', '富貴'와 같은 좋은 문구가 표현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西口宮'새김 세발솥, 삼한, 김해

청동솥은 음식을 끓이거나 데우는데 쓰이는 것이데, 중국에서는 관청이 운영하는 공방에서는 제작되는 고급 용기로 권위를 상징하는 물건이다. 솥 밑부분의 서구궁은 섬서성의 지명으로 확인된다. 낙랑유물에서도 자주 보인다. 중국 섬서성에서 제작된 것이 낙랑군을 거쳐 남부지방으로 수입되었거나, 낙랑군에서 만들어져 남부지방에 들어 온 듯하다. 지역 유력자의 위세를 과시하기 위한 물품으로 세대를 넘어 전래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亞'새김 네발솥, 중국 상나라

"육류를 끓이는 용기로 상대에는 원형의 정이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다. 방형의 정은 이형으로 보통 대형으로 제작되었다. 다리에 매미무늬가 있고 그릇 안쪽에 명문이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죽간 모형


벼루와 동물모양연적, 낙랑 1세기, 평양


밭가는 모습이 새겨진 청동기, 대전 괴정동

농경문청동기는 앞면에 농경의례를 뒷면에 솟대를 표현한 청동의기로서 생산과 풍요를 비는 의식에 사용된 듯하다. 둘레와 가운데를 구획한 후 다시 아래 위로 나누어 그림을 새겼다. 위에 있는 여섯 개의 구멍 가운데 양 끝의 두개는 닳은 흔적이 있어 어딘가에 매달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앞면의 새가 나뭇가지 위에 앉은 모습은 농촌 마을의 솟대를 연상시킨다. 새는 죽은 사람의 영혼을 하늘로 인도하는 매개자인 동시에 풍요를 상징하기도 한다. 뒷면의 왼쪽에는 사람이 손을 내밀어 앞에 있는 항아리에 무언가를 담고 있는 장면이 있다. 오른쪽에는 머리에 긴 깃이 달린 모자를 쓴 사람이 따비로 밭을 가는 모습인데 벌거벗은 몸을 상징하듯 성기가 노출되어 있고, 밭고랑 아래에는 또 한 사람이 괭이를 치켜든 장면이 있다. 조선시대 문헌에 의하면 함경도지역에서 입춘 때 옷을 벗고 밭을 가는 행위를 통해 농사의 풍년을 비는 모습이 있었다고 한다. <출처:중앙박물관>


'大吉' 새김 청동방울, 삼한, 청주

'대길'은 크게 길하라는 뜻이다. 이 방울은 청주지역에서 드물게 발견된 고대의 문자유물로서 금강유역의 마한이나 초기 백제 집단이 중국 한나라나 낙랑과의 교류과정에서 입수한 유물로 추정된다. <출처:중앙박물관>


봉함용 점토를 담은 통, 낙랑, 평양. 후대에는 밀납이나 촛능 등으로 문서로 봉인하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는데 고대국가에서는 점토를 이용해 봉인했던 것으로 보인다.


청동도장, 낙랑, 평양. '王根信印(왕근신인)' 새김 청동도장, 낙랑, 평양


도장이 찍힌  점토 봉합, 낙랑, 평양. 실제로 점토에 도장을 찍어서 봉인한 형태이다.

봉니
편지나 문서를 그릇과 자루에 넣어서 봉인하는데 진흙 덩어리가 쓰였다. 이것을 봉인한 진흙 즉 봉니라고 한다. 봉니는 열어보아야 할 사람 이외의 다른 사람이 열지 못하게 도장을 찍은 것이다. <출처:중앙박물관>


'永壽康寧(영수강녕)' 새김 옥도장, 낙랑, 평양


'晉率善藝伯長印(진솔선예백장)' 도장, 보물 560호, 3세기후반, 포항. 중국 남북조시대 진나라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중국 한대(漢代) 이후 이웃나라 왕에게 수여한 도장으로서, 높이 2.5㎝ 한변 길이 2.3㎝이다. 중국 진(晋)나라 때 만든 것으로, 경상북도 영일군에서 청색의 유리옥 10개와 함께 출토되었다고 한다. 전면에 푸른 녹이 두껍게 덮혀 있고, 도장찍는 면(인장면)에 약간의 손상이 있어 실제로 사용된 듯 보이며, 보존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정사각형의 인장면 위로는 원숭이 모양의 동물이 손잡이 구실을 하고 있다. 꼿꼿이 세운 얼굴에는 두 눈이 움푹 패였고, 입은 앞으로 튀어 나와 있다. 인장을 밟고 있는 4발 가운데 앞발은 조금 움추린듯 하고, 앞발과 뒷발 사이의 허리 아래로는 빈 공간을 두었다. 특히 허리부터 허벅지까지 이어진 곳에는 짧은 가로선들이 여러 개 음각되어 있다. 인장면 바닥에는 ‘晋率善濊伯長’이라고 예서체로 음각되어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기원전 454년 작성한 낙랑군 호구 목간(복제품), 평양 낙랑구역


붓과 깍는 칼(복제), 깍는 칼, 기원전 1세기, 창원 다호리 1호 고분에서 출토된 것을 당시 교역 필요한 영수증 등 거래내역을 목간에 기록하기 위한 문방구라고 할 수 있다. 숫돌은 4~6세기, 김해지역에서 출토된 것이다.


'意字孫(의자손)'새김 청동거울, 국보 161호, 공주 무령왕릉.

공주시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중국 한나라 수대경을 본떠 만든 지름 23.2㎝의 거울이다. 거울 중앙의 손잡이 역할을 하는 꼭지를 중심으로 9개의 돌기가 있다. 그 위 안쪽으로 있는 크고 작은 원에는 7개의 돌기가 있으며, 사이에는 천지사방을 맡아 다스린다는 사신과 상서로운 동물들의 무늬가 새겨져 있다. 안쪽 원들 주위 테두리에는 명문이 있으나, 선명하지 못하여 판독이 불가능하다. <출처:문화재청>


경주 황룡사 출토 청동거울


'癸未年(계미년)' 새김 청동거울 (복제), 일본. 제작년도는 443년설과 503년설이 있다. 503년설에 따르면, 백제가 만들어 일본에 준 것이 된다. 사마斯麻는 백제인명이라고 한다. 3개의 청동거울은 비슷한 크기와 형태를 하고 있다.


글씨 새김 고리자루 큰칼, 6세기, 창녕
우리나라 유일의 현존하는 삼국시대 명문도검이다. 부식되어 정확한 판독은 어렵지만 길상구(상투적인 좋은문구)를 새기고 금을 입힌 것으로 보인다.


칠지도(복제),

7개의 가지가 있는 칼인 칠지도는 389년에 백제에서 만들어져 일본으로 전해진 칼이다. 남쪽으로 영역을 확장한 백제가 왜와 외교관계를 맺으면서 선물로 준 듯하다. 일본에서는 보물로 간직되어 천리시 석상신궁에 보존되고 있다. 강철로 만들고 금으로 글씨를 상감해 새겨 넣은 우수한 제품이다. 칠지도는 당시 백제가 제철기술, 금속공예 기술뿐만 아니라 문자를 외교에도 활용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걸작품이다. <출처:중앙박물관>


'辛亥年(신해년)' 새김 쇠칼 (복제품), 일본, 471년

신해년은 471년이고, 이 칼이 출토된 고분의 축조연대는 5세기 말에서 6세기초이다. 따라서, 제작된 뒤 한 동안 사용되다가 부장되었던 칼이다. 이 칼은 중앙 수장이나 지역의 상급 수장이 무사시 지역의 수장에게 준 것이다. 장도인은 칼을 쥐고 있는 사람이란 뜻으로 왜왕 곁을 호위하는 무관을 일컫는다. <출처: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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