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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

[중앙박물관 특별전] "문자, 그 이후: 한국고대문자전", 문서에 보이는 신라 마을의 모습, 일본 정창원 문서

younghwan 2011. 11. 26. 2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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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반도에서 문자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고대국가가 형성되기 시작한 청동기시대가 아닐까 생각된다. 문헌상으로도 고조선이라는 국가가 존재했고, 기자나 위만의 존재가 있었고, 중국에서 한반도 연안을 거쳐 일본으로 연결되는 해상무역이 활발히 이루졌기때문 낙랑지역을 비롯하여 창원 다호리, 김해 예안리 유적 등에서 다양한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기때문에 비교적 이른 시기에 한자를 사용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나라 한자를 사용한 기록은 고대국가에서 부터 목간이나 토기를 비롯한 생활용품에 새겨진 명문, 특정한 인물이나 사건에 대해서 기록한 비석의 형태로 많이 남아 있다. 반면에 한나라에서 발명된 종이가 비교적 이른 시기에 한반도에 도입되었으나 종이에 적혀진 문서의 형태로는 남아 있는 유물을 그리 많지 않은 것으로 보이며, 이는 재활용이 가능하고 오랫동안 보관되기 어려운 종이의 물리적 특성에 기인것으로  보이며, 이는 중국에서도 비슷하게 남아 있는 문서나 책자는 그리 많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문서도 그리 많이 남아 있지는 않지만,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문서는 석가탑에서 출토된 다라니경이나 붓으로 쓴 불경 등이 일부 남아 있기는 하지만 실생활에 사용했던 종이문서는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찾아 보기 힘든 것으로 보인다. 이번 중앙박물관 특별전시회에서는 실제 진품은 아니지면 현재 존재하는 일본 정창원에서 보관했던 신라의 문서를 볼 수 있게 해 주고 있다. 정창원문서는 일본의 수도였던 나라의 정창원 창고에 보관하고 있던 문서로 주로 동대사 사경소에서 업무를 위해 실무적으로 작성한 문서들이다. 실제 이 정창원 문서가 중요한 것은 사찰에서 사경업무를 한 내용보다는 이 문서들이 관청 등에서 사용했던 공문서를 재활용하여 사용했기때문에 당시 국가에서 사용했던 공식적인 문서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대부분은 일본의 문서이지만, 당시의 문화교류의 형태로 볼 때 삼국시대나 통일신라시대에 공식적으로 사용했던 문서들과 그 용도나 형식 등에서는 큰 차이가 없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정창원 문서 중에는 통일신라에서 만들어졌던 신라촌락문서와 신라의 마을에서 바친 물품을 기록한 문서가 발견되었다. 이들 문서를 통해서 당시 통일신라의 행정체계나 공문서에 대해서 일부나마 알 수 있게 해 주고 있다.

문서에 보이는 신라 마을의 모습
촌락문서는 통일신라시대의 마을 모습을 자세히 알려주는 자료이다. 두 장의 문서에는 지금의 충북 청주(신라 시대 서원경)에 가까운 네 개 마을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 이 문서는 세금을 걷고 노동을 부과하는 기초 장부였는데, 매년 변동 사항을 조사하여 3년마다 다시 작성되었다. 토지는 그 종류와 크기를 기록하고, 사람들의 인구 수와 3년 동안의 사망, 이동 등의 사실을 문서에 기록하였다. 특히 사람은 노비까지 포함하여 남녀별, 연령별로 구분하여 기록하였다. 그 밖에 소, 말, 뽕나무, 잣나무, 호두나무의 수까지 기록하였다. 4개 촌에는 모두 43가구 443명이 살았다. 대체로 10가구 남짓으로 이루어진 한 마을에 남자 49명, 여자 61명, 소는 13마라, 말은 15마리, 뽕나무 1,062그루 정도였다. <출처:중앙박물관>



신라촌락문서(화엄경론질 안에 붙어 있는 문서), 복제품, 752년,

촌락문서, 촌락장적, 민정문서 등으로 불리우는 이 문서는 통일신라시대에 작성된 것으로 작성시기에 대해서는 695년(효소왕 4)성, 755년(경덕왕 14)설 등으로 논의가 갈리고 있다. 이 시기 마을의 모습을 상세하게 알려준다. 이 문서는 세금을 걷고 노동을 부과하는 기초 장부였는데, 매년 변동 사항을 조사하여 3년마다 다시 작성되었다. 문서에는 마을 구역, 인구 수와 논밭의 넓이, 소와 말의 수 등의 증감이 자세히 기록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신라촌락문서가 들어 있던 화엄경론질(복제품). 현재 신라촌락문서는 사진만 남겨놓고 원래의 상태로 봉인되어 보관되고 있다.

문서는 어떻게 발견되었을까
신라촌락문서는 일본 정창원이 소장하고 있다. 해마다 유물의 상태를 점검하는데 그 과정에서 화엄경론 두루마리를 말아 보관하던 물건인 화엄경론질도 조사되었다. 화엄경론질 안의 헝겁 안을 열자, 그 안 쪽 포심을 앞 뒤로 둘러싸고 있던 종이가 있다. 수리하기 위해 배접 상태에 있었던 것을 열자 먹으로 잘 쓴 글자가 보였다. 내용을 읽어 보니, 신라 시대의 촌락문서였다. 정창원 사무소에서는 곧 이 문서를 사진 찍고, 포심을 수리하여 촌락문서를 원 상태대로 배접하였다. 이에 촌락문서는 화엄경론질 안에 넣어진 채 봉인되게 되었다. 이로써 지금은 이 문서는 사진을 통해서만 만날 수 있으며, 문서가 안에 들어 있기 때문에 화엄경론질만을 볼 수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사발을 싼 문서, 좌파리가반 문서(복제품), 752년(경덕왕 11), 통일신라시대 마을에서 관청에 물품을 공급한 내역이 적혀 있는 문서이다.

앞면에는 관청에서 말린 말고기와 돼지고기를 점검, 마을로부터 쌀과 콩을 달마다 상납받은 것을 기록한 문서가 뒷면에는 벼를 도정시킨 내용을 기록한 문서이다. 8세기 중엽 이전에 문서 폐기되고 종이로 재활용되었다. 8세기 전반 공장부 혹은 철유전 같은 공방에서 사발이 제작되고, 그 곳 혹은 왜전, 영객부에서 포장되어 일본에 수출되었다. 960년무렵 정창원 남창에 소장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일본에 수출된 신라 4중 사발, 복제품, 8세기. 이 문서는 용도가 끝난 문서를 재활용하여 일본에 수출한 사발을 포장하기 위해 사용되었던 것이다.

종이 한장도 알뜰하게
종이는 귀하신 몸이라서, 옛 사람들은 종이 한장도 소중하게 아껴 썼다. 문서로 사용된 종이는 문서 수명이 다한 뒤에도 그냥 버려지지 않았다. 같이 쓰여지지 않은 뒷면을 활용하여 다시 기록하기도 하였다. 또는 종이 본래의 재질을 살려, 금속사발을 둘러싸는 포장재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충북청주 근처 4개 마을을 기록한 신라촌락문서는 문서로서 역할을 마친뒤에도 그냥 버려지지 않고 재활용되었다. 신라 마을이 나라에 바친 물품을 기록한 문서(사발을 둘러싼 문서)는 폐기된 뒤에는 사발을 둘러싸 그릇이 서로 부딪히지 않게 하는 종이로 쓰였다. 일본 청정원 문서는 문서 기능이 끝난 뒤에도 그 이면에 또 다시 기록하여 새로운 문서로 다시 태어났다. 경주 월성해자에서 발굴된 목간에는 종이를 얼마만큼 구입하였는지를 소상히 보고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통일신라시대 도장

정창원 문서
나라 정창원 보물창고에는 많은 보물이 있다. 그 가운데 1만 수천통에 달하는 문서가 있다. 이 가운데 대부분은 동대사 사경소에서 업무를 위해 작성한 문서다. 그 내용은 사경하기 위한 예산, 사경 작업 지시, 종이 조달, 급료와 식사 지금 등과 관련된 것들이다. 중앙 관청에서 폐기된 행정문서의 뒷면을 활용한 것이 많다. 이를 통해 일본 고대 율령국가의 문서 행정 실태를 알 수 있다. 일본 나라시대의 불교를 강력하게 후원한 사람은 성무천황의 어머니였다. 754년 그녀가 죽은 직후, 그녀를 추모하기 위해 조동대사사(동대사 건설 사무소) 아래의 사역소에서 사경사업이 시작되었다. 이 과정에서 다양한 사경장부와 문서가 작성되었는데 이를 '사경소문서'라고 일컫는다. <출처:중앙박물관>


정창원 문서를 대표하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문서인 702년에 만들어진 미노국 가모군 하뉴리의 호적(복제품)과 동대사 노비장부.


702년 미노국 가모군 하뉴리의 호적(복제품)

702년 12월에 작성되어 제출된 미노국 가모군 하뉴리의 호적이다. 종이는 곡지를 사용하였다. 이면은 천부법화경의 종이보급 장부 문서로 재활용되었다. 현재 전하는 일본 문서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출처:중앙박물관>


동대사 노비 장부, 7~8세기


히젠국 츠다카군의 세금을 거둔 문서,


백성의 우두머리인 다치마로의 문서, 7~8세기


정창원 소장 문서.


옻칠종이문서(복제품), 7~9세기, 일본

칠지문서: 옻종이문서
옻(칠)은 고대사회에서 희소성이 있는 보물이었다. 한 그루의 나무에서 채취할 수 있는 칠의 양은 매우 적었다. 15년생 나무 60그루에서 채취할 수 있는 옻은 0.9리터였다. 옻종이 문서가 지금까지 남게 된 것은 종이가 옻칠용기의 덮개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덮개 부분에 옻이 스며들어가, 건조나 부식을 막아 오래도록 보존될 수 있었다. 옻칠종이 문서가 무두 둥근 모양으로 남아 있는 것은 덮게부분은 옻칠이 스며들어가 남을 수 있었지만, 다른 부분은 옻칠이 스며들어가지 않아 부식되었기 때문이다. 고대의 종이는 귀중품이었기 때문에 다 사용되고 나서도 칠 용기의 뚜껑으로 재사용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길거리 세운방, 복원품

가가군 관할 지역에 10개 명령을 하달하여 게시한 문서이다. 백성들을 독려하여 농사짓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중앙의 명령은 지역 마을에서는 마을의 촌장이 구역을 돌며 구두로 전달하거나 게시하여 전달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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