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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궁박물관특별전] 다시 찾은 조선왕실 의궤와 도서, 왕실을 행사를 기록한 의궤

younghwan 2012. 2. 4.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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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조선왕조의궤', '일성록'을 비롯하여 당대의 역사와 사건들을 기록한 많은 기록문화유산을 남겨놓고 있다. 국가에서 발간한 많은 서적들은 중앙의 홍문관, 규장각을 바롯하여 지방의 4대 사고에 분산.보관하는 등 체계적으로 관리하였다.

 이런 기록문화유산 중 당대의 역사를 기록한 '조선왕조실록'과는 달리 의궤는 왕실을 중심으로 한 다양한 행사를 후세에 참조할 수 있도록 행사를 진행하기 위해 사용되었던 문서, 담당자 명단, 물품과 경비내용 등 아주 세밀하게 기록으로 남겨 놓고 있다. 의궤에 기록된 내용은 왕실의 혼례, 왕세자 책봉, 장례, 잔치 등 왕실 주관의 행사와 궁궐의 건축과 수리, 실록 등의 편찬 등 다양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의궤는 조선이 개국한 이래로 꾸준히 작성되었지만, 오늘날 볼 수 있는 화려한 그림이 포함된 의궤들은 주로 조선후기 정조대 이후에 정형화된 형식을 갖추면서 작성되었다. 의궤의 작성은 왕이 열람하는 어람용을 비롯하여 6~8부를 작성하여 여러곳에 분산 보관했으며, 정조대 이후에는 잔치를 기록한 의궤는 많은 사람이 볼 수 있도록 활자로 인쇄하여 배포했다고 한다. 이번 특별전에서 전시된 의궤들은 일본으로부턴 반환받은 의궤를 중심으로 배포하고 있는데, 정조대에 만들어진 것도 있지만 주로 구한말 고종대에 만들어진 의궤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조선왕실 문화의 보고, 의궤
의궤에 기록된 내용은 왕실의 혼례, 왕세자 책봉, 장례, 잔치 등의 왕실 의례를 비롯하여 궁궐의 건축과 수리, 실록과 족보의 편찬, 사신 접대, 왕의 초상과 어보 제작 등 매우 다양하였다. 그리고 국왕의 결정 사항, 관청 사이에 주고 받은 문서, 담당자 명단, 동원된 이원, 소용된 물품, 경비 내역, 포상 내역 등 행사에 소용된 작은 못 하나에서 왕의 명령까지 모든 행사 내용을 상세히 포함하고 있다. 특히 행사의 가장 중요한 행렬장면을 그린 반차도와 행사에 사용되는 각종 물품 그림까지 포함되어 있어 뛰어난 기록성을 가진다. 보통 6~8부를 만드는데 그 중 1부는 왕에게 보고하기 위한 어람용으로 고급 닥종이에 붉은 쾌선으로 구획하여 상세한 기록과 책색도안을 배치하고 비단으로 표지를 만들어 국화문 고정쇠가 있는 놋쇠로 철하였다. 나머지는 분상용으로 여러곳에 나누어 보관하기 위해 일반 닥종이에 무쇠로 철하였다. <출처:고궁박물관>

왕실의 혼례, 가례
왕이나 왕세자가 일생의 배필인 왕비나 왕세자빈을 맞이하는 경사스러운 혼례는 중요한 왕실행사로 성대하게 치러졌다. 조선시대에는 혼례를 위해 가례도감이라는 관청이 임시로 설치되었으며, 행사가 끝난 이후 '가례도감의궤'에 모든 혼례의식 절차와 진행 과정을 기록하였다. 고종.순종 시대에는 모두 3차례의 혼례가 이루어졌다. 1866년(고종3) 고종의 혼례와 1882년과 1906년 두차례 순종의 혼례이다. 특히 1906년 순종의 혼례는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한 이후 거행한 유일한 황실 혼례로 제후국에서 황제국 의례로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고종과 명성왕후의 혼례
고종은 왕이 된 지 3년 만에 혼례를 치렀다. 고종의 나이 15세, 왕비의 나이 16세였다. 명성왕후는 당시 수렴청정을 하고 있던 대왕대비 조씨가 1866년(고종3) 1월에 12세에서 17세에 이르는 전국의 처녀들에게 금혼령을 내린 뒤 3개월에 걸쳐 시행된 세번의 간택에서 최종 간택되었고, 운현궁으로 안내되어 왕비 수업을 받았다. 가례는 육례에 따라 진행되었으며 3월 21일 고종이 운현궁으로 가서 왕비를 대동하고 창덕궁으로 돌아오는 친영이 행해졌다. '고종명성왕후 가례도감의궤'에 실린 천연색의 반차도에는 총 2,433명의 인원이 등장하는데, 이전에 1,200명 정도가 참여했던 행차에 비해 두 배 정도 큰 규모였다. 또한 대원군과 여흥부대부인도 왕과 왕비의 가마를 뒤따르고 있어 당시 어린 고종을 대신하여 흥선대원군이 섭정을 맡고 있던 역사적인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고종과 명성왕후 혼례식 의궤( 고종명성왕후 가례도감의궤), 1866년, 오대산 사고본
1866년 3월 민치록의 딸을 고종의 비로 책봉하는 과정을 기록한 의궤이다. 왕비 간택에서부터 가례의식의 전 과정을 생생하게 담고 있다. 총 82면의 의궤반차도는 별궁인 운현궁에서 친영례를 마치고 왕과 왕비가 함께 궁으로 돌아오는 행렬로 구성되어 있다. 현존하는 가례도감의궤 반차도 가운데 분량이 방대한 편에 속하며, 19세기에 한층 화려해진 국왕 가례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육례 중에 왕비를 책봉하는 책비례 때 내려진 교명, 금보, 옥책이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명성왕후 혼례식 비녀목록(보잠발기), 1866년(고종3) 고종과 명성왕후의 혼례식 때 사용한 비녀 목록이다. 붉은색의 고급 종이에 궁서체로 기록하였다.



고종비 명성왕후 책봉 교명,


금보, 옥책. 1866년 고종의 비로 명성왕후를 책봉하면서 내린 교명, 금보, 옥책이다. 왕비나 왕세자, 왕세자빈 책봉 시에는 왕의 훈유를 담은 교명, 책봉자의 인장인 금보, 책봉자의 공덕을 새긴 옥책을 내렸다.

순종의 혼례
순종은 1882년(고종19)과 1906년 두차례에 걸쳐 혼례를 거행하였다. 순종은 1882년 왕세자 시절에 당시 10살인 순명왕후 민씨와 첫번째 혼례를 치렀다. 1904년 황태자비 민씨(순명왕후)가 사망함에 따라 1906년에 순정효황후를 두번째 황태자비로 맞아들였다. 두 차례의 혼례의식과 절차는 1882년과 1906년 '가례도감의궤'에 기록되었으며 왕실에서 황실로의 혼례변천 내용을 살펴볼 수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순종과 순명효황후 혼례식 의궤(손종순명효황후 가례도감), 1882년, 태백산사고본
1882년(고종 19) 순종이 9세가 되던 해에 민태호의 딸 민씨와의 혼례식을 기록한 의궤이다. 1월26일 삼간택에서 선택된 세자빈은 안국동 별궁에서 세자빈 수업을 받기 시작하였으며 이후 육례에 따른 의식이 차례로 거행되었다. 납채례는 2월3일, 납징례는 2월7일, 고기례는 2월9일, 책빈례는 2월19일 인정전에서 거행하였다. 2월21일에는 초계례, 친영례, 동뢰연을 거행하고 2월22일에는 조현례를 행했다. 혼례식이 끝난 뒤 편찬된 의궤에는 세자가 세자빈을 데리고 궁으로 들어오는 70면의 <친영반차도>가 실려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순종과 순정효황후 혼례식의궤(순종순정효황후 가례도감의궤), 1906년, 오대산사고본
1904년 황태자비 순명황후 민씨가 세상을 떠나자 1906년에서 1907년까지 윤택영의 딸을 새로운 황태자비로 책봉하는 과정을 기록한 의궤이다. 가례는 종래대로 육례를 갖추어 진행되었는데, 이전에는 없던 납길례가 추가되고 황제가 의식에 참여하지 않고 황태자와 대신들이 황제를 대신하여 집행하는 권정례를 따랐다. 권정례에 따라 이전과 달리 한 날에 책비, 봉영, 동뢰연, 조현례를 치렀다. <출처:고궁박물관>


왕실의 잔치
조선시대 왕실에서는 왕과 왕비의 생신, 세자의 탄생이나 왕세자의 책봉, 외국 사신의 영접, 명절 등 경사스러운 날에 왕실 가족과 친인척 및 신하들이 모여 이를 경축하는 화려하고 웅장한 잔치를 열었다. 이러한 궁중 잔치를 연향이라 하였다. 왕실에서는 이를 계기로 왕실의 위엄과 존엄을 과시하고, 문무백관들과의 친목과 화합을 도모하였다. 연향은 왕이 주인공이 되어 왕세자와 문무백관을 초대하는 잔치인 외연과 왕비.왕대비.대왕대비 등 여성이 주인공이 되어 왕세자빈과 내외명부를 초대하는 잔치인 내연으로 구별되었다. 궁중 잔치는 그 규모에 따라 크게 진연, 진찬, 진작으로 불렸으며 그 중 진연이 가장 큰 규모였다. 잔치가 끝난 뒤에 행사 시작부터 끝까지 이루어지는 모든 과정을 상세하게 의궤에 기록하였다. <출처:고궁박물관>


정조의 화성 행차 의궤(원행을묘 정리의궤), 1795년 (정조19)
1795년 윤 2월에 정조가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기념해 현륭원(사도세자릉)에 행차한 내용을 기록한 의궤이다. '원행을묘 정리의궤'는 활자로 인쇄한 최초의 의궤로 금속활자로 간행되었으며 내용을 항목별로 편집하여 다양화된 도식을 한 권에 모아 보기 쉽게 하였다. 인쇄본이기 때문에 간행수량이 증가하였고 배포범위가 확대 되었으며, 종이와 제책 등이 모두 동일하여 어람용과 분상용이 구분되지 않았다. 이 의궤의 체제나 내용, 활자체 등은 이후 왕실 잔치를 기록한 의궤 제작의 모범이 되었다. <출처:고궁박물관>


순조비 순원왕후 육순 기념 축하잔치 의궤(진찬의궤), 1848년(헌종14)
1848년에 당시 대왕대비였던 순조비 순원왕후의 60세를 축하하기 위하여 창경궁 통명전에서 행했던 잔치를 기록한 의궤로 활자본이다. 잔치관련 의궤는 1795년 '원행을묘 정리의궤' 이후로 활자로 간행하는 것이 관행으로 자리 잡았다. <출처:고궁박물관>


헌종계비 효정왕후 고희(71세) 기념 축하잔치 병풍(효정왕후고희축하진찬도,1901년)와 접이식의자(용교의), 궁중 잔치에서 왕이나 왕비.대비 등 주빈이 앉았던 접이식 의자.

1901년 5월 황실의 가장 큰 어른인 헌종계비 효정왕후의 71세 축하잔치 모습을 그린 병풍이다. 정운궁의 중화전과 당시 자전이었던 준명당에서 3일동안 밤낮으로 개최했던 잔치 장면들과 진찬소 관리들의 이름을 기록하였다. 종전에 붉은색으로 표현했던 기물들을 황색으로 채색하고 의장기에 태극기가 나타나는 등 대한 제국기의 특징이 나타나고 있다. 이 병풍 제작에 관한 내용이 '신축 진찬의궤'에 실려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헌종계비 효정왕후 고희(71세) 기념 축하잔치 의궤(진찬의궤), 1901년
고종이 대왕대비인 헌종계비 효정왕후의 71세 생신을 축하하기 위하여 1901년 경운궁 경운당에서 열렸던 잔치에 관해 기록한 의궤이다. 잔치에 관련된 의궤는 모두 1798년 편찬된 '원행을묘 정리의궤'에 의거해 작성되 19세기의 잔치 의궤와 동일하나 황제국이 됨에 따라 목차의 일부 명칭이 달라졌거나 추가되었다. 의궤에는 병풍보다 간략화된 잔치 장면과 잔치에서 사용했던 각종 물품 등이 실려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고종황제 50세 기념 축하잔치 의궤(진연의궤), 1901년
고종황제의 50세를 경축하기 위하여 황태자의 간청에 의해 1901년 경운궁 황녕전에서 행했던 잔치에 관해 기록한 의궤이다. 잔치 장면을 비롯하여 궁중의 복식, 악기, 행사물품 등의 그림이 다수 수록되어 있어 대한제국 시기의 변화된 궁중 잔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고종황제 51세 기념 축하잔치 의궤(진연의궤), 1902년
1902년 11월 고종이 51세를 맞이하여 기로소에 들어가고 즉위 40주년이 되는 것을 기념하는 잔치를 기록한 의궤이다. 기로소는 경로효친 사상에 입각하여 정2품 이상의 원로대신이 70세가 넘어면 들어가던 기관으로 왕도 나이가 들면 기로소에 들어갔다. 조선왕조 27대 왕 중 기로소에 든 왕은 태조, 숙종, 영조, 고종 4명 뿐이었다. <출처:고궁박물관>


고종 후궁, 순빈 엄씨 황비책봉 의궤(순비책봉의궤), 1901년
1901년 고종황제의 후궁이자 영친왕 이은의 어머니인 순빈 엄씨를 황제국의 위상에 맞추어 황비로 올려 책봉한 과정을 기록한 의궤이다. 어람용 또는 예람용 의궤의 내지는 고급 종이인 초지지를 사용하였으며 붉은색 인찰선을 둘렀다. <출처:고궁박물관>

어진, 왕의 초상 제작과 봉안
조선왕실에서는 전통적으로 역대 왕들의 어진을 전각에 봉안하고 정기적으로 제사를 모셔왔다. 선대왕들의 어진을 가까이 봉안하고 참배하는 일은 조상에 대한 효성을 표현하는 행위이자 왕실의 영속성을 상징하며 국왕 자신의 위상을 과시하는 일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왕구너을 강화하고자 했던 국왕들은 선왕의 영정을 제작하여 진전에 봉안하는 행사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조선시대에는 태조부터 순종까지 어진 제작이 활발하게 행해졌다. 어진을 제작할 때에는 업무를 주관하는 임시 관청인 도감을 설치하고 엄격한 심사를 거쳐 선발된 당대 최고의 궁중화가로 하여금 어진을 그리도록 하였으며 전 과정을 의궤에 수록하였다. 완성된 어진은 궁궐 안팎에 설치한 어진 봉안처인 진전에 임금을 직접 모시듯 최고의 예를 갖추어 봉안하였다. 진전 또한 그 관리가 매우 철저하였으며, 전각의 증.개축 시에도 의궤에 그 과정과 절차를 꼼꼼하게 기록하였다. <출처:고궁박물관>


태조.숙종.영조.정조.순조.문조.헌종 어진 제작의궤, 1901년, 강화사고본
1900년 경운궁 선원전의 화재로 소실된 태조, 숙종, 영조, 정조, 순조, 문조, 헌종의 어진을 새로 모사하는 과정을 기록한 의궤이다. 영흥 준원전의 태조 어진, 영희전의 숙종.순조 어진, 육상궁 냉천정의 영조 어진, 평락정의 정조.문조.헌종 어진을 경운궁 흥덕전으로 가져와 모사했다. 이 때 제작된 어진 중 영조 어진만이 현존한다. <출처:고궁박물관>


영조임금 어진(영조어진), 1900년, 보물 932호, 복제품
1900년 8월 21일 경운궁 선원전의 화재로 잃어버린 일곱 임금의 어진을 모사할 때 제작한 영조의 어진으로 1744년(영조20)에 그린 것을 본 떠 만들었다. 채용신과 조석진이 주관 화사로 참여하였다. <출처:고궁박물관>



고종.순종의 초상화 제작 의궤
1902년 고종황제의 51세와 즉위 40년을 경축하기 위해 고종황제와 황태자의 어진과 예진을 그린 행사를 기록한 의궤이다. 대한제국기에 편찬된 어람용 의궤로 황제국의 격식에 맞추어 표지에 황색 비단을 사용하였다. 황태자를 위한 예람용 의궤는 표지로 붉은색 비단을 감쌓으며 내지는 최고급 종이인 초주지를 사용하였다. <출처:고궁박물관>


순조.문조 어진 보수 의궤(순조.문조 영정모사도감보완의궤), 1899~1900년
1900년에 순조 어진의 장황을 보수하고, 문조 어진의 표제를 황제로 개정한 과정을 기록한 책이다. 이 책은 34장의 간단한 책으로 현재 규장각에 붉은색 비단표지의 시강원본(예람용)과 이번에 반환된 의궤(어람용) 2건이 남아 있다. 이번에 반된된 의궤 중에 유일한 어람용 의궤이다. <출처:고궁박물관>


경운궁 선원전 중건공사 의궤, 1901년, 강화사고본
1900년 10월 14일 화재로 소실된 경운궁 선원전을 1901년 다시 중건하는 과정을 기록한 의궤이다. 새로운 선원전은 1901년 6월에 완공되었으며, 6월 13일에 새로 모사한 태조.숙종.영조.정조.순조.문조.헌종 어진이 각 실에 봉안되었다. 경운궁 선원전은 1907년 고종이 폐위되고 순종이 창덕궁으로 옮겨가면서 어진들을 창덕궁으로 옮기게 되어 본래의 기능을 상실하였고, 1919년에 헐려 창덕궁의 신선원전을 짓는데 활용되었다. <출처:고궁박물관>


향용정
어진제작, 왕실혼례, 장례 등의 왕실의 행사에서 향합이나 향로와 같은 향 관련 물건과 축문을 받치는 축판, 혹은 임금의 조서, 옥책, 금보 등을 실었던 정자모양의 가마이다.

왕실아기의 탄생
조선왕실에서 아기의 탄생은 나라의 큰 경사였다. 따라서 아기의 장수와 복을 빌며 풍수적으로 길한 장소를 선택하여 탯줄을 묻는 의식인 장태의식이 거행되었다. 아기가 태어나면 탯줄은 깨끗이 씻어 태항아리에 담았다. 태앙항리에 담은 탯줄을 돎함에 넣어 탯줄의 주인과 묻은 날씨를 쓴 지석과 함께 석실에 넣어 안장했으며 이를 태실이라고 불렀다. 태실이 완성된 후, 태실 조성과 관련된 모든 내용은 임금에게 보고되었으며 의궤로 만들어져 상세한 기록으로 남겨졌다. 그리고 탯줄의 주인공이 왕위에 오르면 태실에 각종 석물을 쌓아 올리고 새로운 태실비석을 세웠다. 태실은 조선시대에는 전국 명당지에 산재해 있었으나, 일제 강점기에 식민통치의 일환으로 태항아리 54기가 현재의 서삼릉으로 옮겨졌다. <출처:고궁박물관>


순종 탯줄 봉안 의궤(원자아지씨장태의궤), 1874년(고종11)
1874년에 고종의 둘째 아들인 순종의 태를 봉안한 과정을 기록하고 있다. 표지에는 의궤로 기록하고 있으나 본문에는 등록으로 표기되어 있다. 1873년 경복궁 화재로 고종은 창덕궁으로 이어 했는데, 다음해 2월 8일 명성왕후가 창덕궁 관물헌에서 원자를 낳았다. 순종의 장태지는 충남 홍성군 구항면 난산으로 최종 결정되었고, 이 후 본격적인 공사가 시작되어 6월 13일 수고한 사람들에게 상을 내리면서 끝을 맺었다. 1929년 순종의 태실은 경기도 서삼릉으로 이장되었다. <출처:고궁박물관>


순종태지석(순종황제 태지석)과 태내항아리, 1874년


영왕 태외항아리, 1897년
영왕 이은의 태를 담아두었던 백자 외항아리다. 영왕은 고종의 일곱째 아들로 순헌황귀비의 소생이며, 순조의 이복동생이다. 1900년 영왕에 책봉되었다가 1907년 황태자에 책봉되었다.


순조태봉도(복제), 1806년(순조6)
순조의 태를 묻은 태실의 석물을 단장하고 주변의 산세와 경관을 어람용으로 묘사한 그림이다. 태실은 충북 보은군 내속리면 사내리 속리산 안에 위치하며 태보의 아래 부분에는 법주사가 묘사되어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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