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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는 백두대간이 지나가는 산악지역이 대부분을 이루고 있는 지역으로 조선시대에 고관들을 많이 배출하는 상류사회가 크게 형성되지는 못했다고 할 수 있다. 지역적으로는 동해안 일대의 어업과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들, 배두대간 산악지역에서 화전을 일구며 힘들게 살았갔던 사람들, 남한강과 북한강이 지나가는 영서지방의 원주나 춘천지역 등으로 나눌 수 있으며, 다양한 지역적 특징들을 가지고 있는 곳이라 할 수 있다. 이런 까닭에 다른 지방에서 볼 수 있는 양반사회의 특징을 보여주는 유물들이 많이 전해내려오지는 않고 있다. 다만, 삼국시대 이래로 넓은 농토와 함께 문화가 발달했던 동해안 강릉이나 삼척지역, 남한강의 원주지역, 북한강의 춘천지역에는 많은 양반사회의 모습을 보여주는 많은 고택들이나 관아건물 등이 남아 있다. 또한 금강산, 설악산, 오대산 등 이름난 산에는 불교문화가 발달하여 전통깊은 사찰들이 많이 남아 있으며, 조선시대 관동지방 유람의 전통과 함께 왕실과도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었다. 춘천박물관에서는 강원도 사람들의 생활모습을 보여주는 조선시대의 공문서를 비롯한 문서류, 강원도만의 생활도구, 항일의병활동 유물들을 전시하여 강원도에 대한 이해를 높게 해 주고 있다.


강원의 자연과 사람
강원도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산이다. 예로부터 강원도에 사는 사람들을 산골에 사는 순박한 사람들이라는 '암하노불'이라 하였다. 이들은 은둔하여 들어온 선비들로부터 산을 의지하여 사는 농민과 화전민, 그리고 동해바다를 생활터전으로 삼은 어민들까지 다양한 신분과 생업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리하여 강원도만의 독특하고 다양한 생활문화와 풍속을 이어오게 되었다. 바닷가를 따라 있는 너른 평야와 산과 산 사에 자리한 들판을 소유한 양반들은 조선의 상류 문화를 들여와 누리고 있었다. 여기서 농사를 짓는 농민들은 마을마다 정겨운 공동체 문화를 이어왔다. 이름난 산이 많아 유서 깊은 절들이 곳곳에 자리잡게 되어 조선시대에도 불교가 성행했다. 그리고 산촌이나 어촌에는 다른 지방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무속신앙과 척박한 환경을 이겨내는 생활 문화가 형성되고 있었다. 원주의 강원감영, 강릉의 오죽헌과 선교장, 이름난 기와집과 서원, 향교들은 유학을 숭상한 강원도의 상류문화를 상징하고 있다. 또한 산간에 있는 너와집, 굴피집 등은 산과 어우러져 살았던 사람들의 지혜가 담겨있다. 이들이 사용한 물품들은 서울이나 다른 지역에서 북한강과 남한강을 이용하여 유통된 고급도자기나 생활용품도 있었다. 그리고 강원지역의 특산물 등이 생산되어 다른 지역으로 팔려나가거나 중앙의 왕실과 관청에 바쳐지기도 하였다. <출처:춘천박물관>



청풍부원군 김우명 상여장식품, 17세기. 현종의 장인이자 숙종의 외할아버지였던 김우명이 죽자 궁구러에서는 상여를 비롯한 장례에 필요한 모든 물품을 내려주었다. 상여에는 화려하게 장식하는 용도 이외에 죽은 사람의 영혼을 저승까지 안전하게 데리고 간다는 의미로 동방삭과 새조각상 등의 조각품을 만들어 끼웠다. 김우명의 묘역은 강원도 춘천시 서면 안보1리에 조성되었으며, 현재 강원도 기념물 20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출처:춘천박물관>


동여도, 조선시대

김정호와 동여도
강원지역에 펼쳐진 산하와 길을 따라 옛 사람들은 터전을 잡고 서로 교역을 하며 생활하였다. 동여도에는 그러한 강원의 산하와 지형이 반영되어 있다. 1834년, 30대의 나이로 <청구도>라는 전국지도를 제작한 김정호는 이후 지도연구와 지리지 편찬 작업을 병행하면서 <동여도>와 <대동여지도>를 제작하게 되었다. 언제, 어떤 계기에서 두 지도 제작이 시작된 것이진 정확하진 않다. 김정호는 18세기 후반 지도의 문제점을 개선하고자, 새로운 경위선 체계를 활용하고 산줄기와 물줄기의 흐름과 위치를 대폭 교정하였다. 특히 국토를 사람의 몸에 비유하는 유깇적 국토관에 입각하여 크고 장근 모든 산줄기가 백두산에서 뻗어 나오도록 구성하였다. 동여도와 대동여지도는 체재와 크기가 같고 내용 또한 유사하다. 이러한 이유로 동여도의 제작자를 대동여지도의 제작자인 김정호로 추정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차이점도 적지 않다. 동여도는 채색필사본으로 제작되어 목판인쇄본인 대동여지도와 외견상 큰 차이가 있다. 또한 대동여지도에는 대부분 기재되지 않은 면 단위의 지명이 기록되는 등 지명이 5,500여개 더 많이 기재되어 있다. 대신 지형 표현 방법에 있어서는 대동여지도가 훨씬 상세하다. 산줄기의 크기나 험준함을 차별화하여 표현하였고, 물줄기도 단선과 쌍선으로 구분하고 있다. <출처:춘천박물관>


김석려의 가족사항 문서 (Family Register), 조선시대.
"김석려는 김종전의 양자로서 친아버지와 양아버지가 있었고, 남자 종 연용을 데리고 있다." 내용이 적혀 있다. 철종 3년(1852) 정월 모일 강원도 삼척부에서 원본과 확인하는 문서이다.


김병서의 가족사항 문서와 김시영의 가족사항문서, 19세기
"김시영이 죽구 김병서가 호주가 되었으며, 종 연용을 물려받았다"는 내용이 적혀 있는 고종17년(1880) 삼척부 확인문서, "김시영은 부인 없는 상태이고, 아버지로부터 종 연용을 물려받았다"는 내용이 적혀 있는 고종13년(1873)년 삼척부 확인문서


화전을 매매한 문서(Contract, 1864년)와 토지매매문서(1861년)
화전을 매매한 문서는 "김소사는 글을 몰라서 서명대신 오른쪽 손바닥을 그렸다. 남내이작 의암리 후곡 금송괘의 하루갈이 화전과 소망동 반나절 갈이 화전과 은곡의 하루갈이 화전과 어두막동의 하루갈이 화전을 합하여 6건을 위의 사람에게 판다. 옛 문서를 잃어 버렸기 때문에 새로이 이 문서 1장을 작성하여 팔고 돈 3량을 수대로 받았다." 1864년, 함씨의 노비 정심에게 준 명문이다. 토지매매문서는 "곽응룡은 집과 토지를 30량에 사서 여름에 곡식으로 값을 치르며, 박옥강은 상중이어서 압인(서명이나 도장)을 하지 않았다." 1861년 3월11에 곽응룡에게 준 명문. 명문은 증명서를 말하며 토지매매문서가 많다. <출처:춘천박물관>


토지문서와 김병서의 가족사항을 적은 문서, 대한제국


김시영의 진성서(1865년)와 노예연분의 진정서(1904년), 김봉업의 진성서(1887년). 김시영의 진성서는 근덕면 맹방에 거주하는 죄인 김시영의 소지. 장례에 쓸 나무를 구했고 관에서는 열 그루를 허락했다. 노예 연분의 진정서는 1904년 옥계면 산계리에 사는 유주사 댁의 계집종 연분의 발괄(민원관계 문서), 계집종 연분이 주인댁의 제사에 소를 잡을 수 있도록 허가를 청했다. 김봉업의 진정서는 1887년, 근덕면 맹방하동에 사는 어린 아이 김봉업이 백번 절하여 올린 진정표. 김봉업이 벌목하다 옥에 갇히 아버지 대신 옥살이를 하겠다고 진정서를 올렸다. <출처:춘천박물관>


결혼문서(혼서),와 이장을 계획한 문서. 결혼문서는 나주사람 정재우가 아들 정이상을 장가보내며 사돈댁에 납폐를 올렸다.


'소학' 합격문서, 1876년. "강릉사는 윤자명은 나이 45세에 소학과정을 합격했다. 학례(성균관 또는 향교 소속 노비) 이소가 작성하여 주는 건.

생활과 도자기
도자기는 인간의 생활과 가장 밀접해 있는 생활도구로 한시대의 삶과 문화를 담고 있다. 1차로 높은 온도에서 구운 후 유약을 씌우고, 2차로 다시굽기 때문에 단단하고 아름다운 윤택을 내게 된다. 강원도에서 도자기가 제작된 것은 고려시대부터이다. 12~13세기경 삼척 천은사 경내에서 조사되었고, 강릉과 원주지역에서도 고려백자가 조사되고 있다. 한편, 조선초 분청사기를 제작했던 흔적도 평창과 강릉에서 발견되고 있다. 조선시대가 되면, 원주와 양구 방산이 강원도에서 주요 백자 생산지로 주목된다. 원주와 양구는 조선시대 분원에 백토를 공급하던 곳이었다.  원주에는 귀래리 등에 40여기의 가마터가 확인되고 있으며, 양구는 품질 높은 백토 생산지로 주목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언급된 자기소 139곳 가운데 강원도에 위치한 곳은 중품 자기 생산지 2곳, 하품 생산지 2곳 뿐이지만, 중품 자기 생산지 2곳도 모두 양구 방산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양구 백토를 채굴하는 과정에서 백성들의 고초가 많음을 여러 차례에 걸쳐 상소로 올렸음에도 왕실에서는 양구 백토가 좋기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진행했던 일화도 있다. <출처:춘천박물관>


조선시대 백자와 백자 모란무늬 항아리(Jar), 조선후기


향을 피우는 화로(Incense Burners), 향을 담는 합(Incense Bowls), 백자 제기(Ritual Wares),

강원도 목공예품
조선시대 목공예품들은 그 지방에서 얻기 쉬운 나무를 그 특질에 맞게 사용하였다. 여기에 사용자의 기호 등이 더해져, 지방에 따른 특성을 드러낸다. 이중에 주목할 만한 것으로는 삼척과 강릉에서 만들어진 책상반과 원반이 있다. 특히 원반은 통목을 물레질로 깍은 단순 목물로 키가 큰 것은 거꾸로 놓고 절구로 대용되기도 하였다. 방안의 물건은 낮은 천장과 좌식 생활에 편리하게 만들었으며, 재료도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목재를 이용하여 나무결의 무늬를 살려 자연미를 강조하는 가구를 만들었다. 반닫이, 농, 장, 문갑 등은 강원 전지역에서 두루 제작되었으며, 그 중 반닫이나 농은 지역적 특색을 보이는 대표적인 예이다. 주방 가구 중 나무독이나 채독도 특이한 예이다. <출처:춘천박물관>


나무뚜가리(Wooden Bowls)와 강원반(Table), 도시락(Lunch Basket), 반상은 강원도 특유의 반상으로 판재로 만든 다리에 다리받침이 붙어 있는 것이 특징이며, 다리 옆판에 여러가지 문양으로 창을 내었다. 도시락은 버드나무 가지나 싸리채 등을 이용하여 만든 도시락으로 통풍이 잘되어 여름에도 음식이 잘 상하지 않는다.


등잔걸이(Rack for Lamp-oil container), 나무독

나무독
강원도에서 볼 수 있는 특이한 주방가구 중 나무독이나 채독이 있다. 강운도에서는 굵은 피나무의 속을 파내고 뚜껑과 밑판을 달아 옹기 항아리를 대신하여 썼다. 이렇게 만든 나무독은 김치를 저장하는 김칫독으로 사용하기도 하고, 곡식을 보관하기도 하였다. <규합총서>에는 나무독이 인제 지역의 특산품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태백 산간 지역을 중심으로 강원도 전 지역에서 나오고 있다. 전시된 큰 나무독은 뚜껑이 있고, 자물쇠를 달 수 있게 한 것으로 보아 곡식류를 저장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작은 나무독 뚜껑에는 조그만 구멍이 있는 것으로 보아 돈궤의 용도로 사용한 듯 하다. <출처:춘천박물관>


강원도 반닫이와 찬탁

강원도 반닫이. 반닫이란 윗부분의 반쪽을 여닫을 수 있는 궤를 지칭한다. 강원도 반닫이는 강원지역에서 쉽게 구할 수 있었던 소나무와 두터운 무쇠장식이 어울린 투박함이 특징이다. 다른 지방에서는 판재의 무늬가 좋은 느티나무로 만드는데 강원도 지역에서는 소나무를 많이 썼다. 반닫이에는 복을 기원하는 박쥐날개 모양의 풍혈이 있는 다를 받쳤다. 반닫이 위에 문이 달려 있는 장을 결합시킨 특이한 반닫이장도 있다. 장문은 한쪽 문을 여닫이로 열고, 달려 있는 다른 쪽의 문은 미닫이로 열고 닫게끔 되어 있다. 이러한 반닫이장은 생활용품보다도 책을 보관하도록 만들어 사랑방에 두고 사용했을 것이다. <출처:춘천박물관>

찬탁은 부엌에서 그릇과 음식을 보관하던 목가구이다. 조선시대의 자기와 유기그릇은 비교적 무게가 있는 편이라 찬탁을 튼튼하게 만드는 편이며, 힘을 받는 기둥이 다른 가구보다 굵다. 그리고 옛날 부엌은 맨 땅이 많았기 때문에 다리를 높게 세운다. 이 찬탁은 크기가 비교적 작고, 다리도 상대적으로 높지 않은 것으로 보아 부엌의 선반 위에 설치하고 썼거나 따로 찬방에 두었던 듯 하다. 아래 위로는 그릇을 얹고, 문이 달린 중앙에는 음식을 보관했을 것이다. <출처:춘천박물관>


나무쟁반(Wooden Trays), 둥근 소반 (Wooden Tray), 종이로 만든 사각상자(Square box)


부젓가락(Fire Tongs), 인두(Small Irons), 화로(Brazier), 실패(spool), 다듬이판과 다듬이 방방이(Cloth Fulling board and Cloth fulling clubs),

신앙과 제사
조선시대에는 조상에 대한 제사를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강원도의 경우 상류집안에서는 유교식 제사를 지냈지만, 민간에서는 동제나 마을굿 등과 같은 이른바 잡사(잡신을 모시는 제사)가 많았다. 이러한 제사를 통해 마을과 마을 사람들의 안녕을 기원하고 제사음식을 같이 나누어 먹으면서 제사에 함께 참여한 사람들간의 굳은 결속을 꾀하였다. 이밖에 산간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산메기 제사를 지내고, 심마니들은 삼을 채취하러 가기 전에 제사를 행하여 산신에게 드리는 정성 또한 대단하였다. 심마니들은 새옹에 쌀을 담아 제사를 지낸 후 새옹째 밥을 지어 먹고 잠을 청했다. 그러면 꿈에 산신령이 나타나 삼이 있는 곳을 가르쳐 준다고 믿었다. <출처:춘천박물관>


향을 피우는 화로, 향을 담는 합, 책상반, 위패보관상자, 나무제기, 제상, 죽은 사람의 위패


자바라와 무당방울, 놋쇠로 만든 타악기로 마치치면 소리가 나며, 사찰이나 무속에서 의식용으로 사용하였다.


놋제기잔, 놋제, 놋촛대, 놋새옹, 놋새옹은 놋쇠로 만든 밥을 짓는 작은 솥으로 주로 의식을 행할때 사용한다. 특히 심마니의 제사에는 쌀을 담아 제사지내고 그 밥을 먹어 산삼캐기를 기원하였다.


괭이, 외따비, 손괭이


썰매와 설피,  겨울에 사용한 썰매로 신발은 바닥에 있는 구멍을 이용하여 끈으로 묶어서 고정하였다.


창과 돼지창(Spearhead), 멧돼지와 같이 큰 짐승을 사냥할 때 쓰인 창으로 나무 자루를 끼워서 사용하였다.

강원도의 전통주거
생활문화 특성은 그 지역의 자연환경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강원 산간지역에서는 나무결이 바른 적송이나 전나무를 이용하여 지붕을 이어 만든 너와집을 지었다. 강원도의 전통주거 형태라고 하면 흔히 너와집, 굴피집, 샛집(억새집)이 떠오른다. 하지만 이러한 주거형태는 강원도의 대표가옥이 아니라 특수가옥이라고 보아야 한다. 강원도는 태백산맥을 중심으로 동서로 양분되고 산악지대가 많은 지역적 특성을 가지고 있어서, 주거형태도 다양하게 나타난다. 영서지방은 서울이 가깝고 교통이 편리하므로 서울형 또는 중부형 주택을 기본 구조로 하고 있고, 영동지역은 동서의 교류보다 남북간의 교류가 활발했기 때문에, 북부형 주택을 기본으로 구성하였다. 산 속 깊이 들어갈수록 너와집이나 굴피집이 남아 있으며 참나무로 잘라 만든 울타리가 많다. 너와로 이은 지붕은 너와와 너와 사이에 틈이 있어 단열효과도 컸으며,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 따뜻하다. 벽은 중간에 수수깡으로 '외'를 엮고, 이를 중심으로 양쪽에 흙을 발라 만드었다. 추위와 바람을 피하기 위해 지붕의 높이를 낮게 하고, 천장에는 고무를 누르기도 했다. 이것은 단열기능을 하였다. 방안에는 한쪽 벽면에 관솔을 태워 조명으로 하던 벽난로와 비슷한 형태의 '코클'이 있었다. 방안의 물건은 낮은 천장과 좌식생활에 편리하게 만들었으며, 가구의 재료로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목재를 이용하면서 나무결의 무늬를 살려 자연미를 강조하는 가구를 만들었다. 집은 대체로 기단이 높으며 부엌은 넓고 불씨를 보관하기 위한 '화티'가 있었다. 또 외양간이 부엌과 연결되어 가축을 추위와 맹수로부터 보호하려는 구조가 남아있었다. 이러한 구조는 강원지역의 강설량과의 관계도 깊다고 할 수 있다. <출처:춘천박물관>


주춘시화(근대기)  강릉 추월전(작자미상), 조한림전(작자미상). 주춘시화는 강릉지역 문인들이 모여 만든 시화집이다. 조한림전은 조선후기 유행하던 영웅소설로 강릉에 사는 조한림의 영웅적인 활동을 그렸다.

강원도의 한말의병
한말의벼은 1895년 을미년 이후 약 20년 동안 국가와 민족을 수호하여 일어난 관군이 아닌 민군을 말한다. 강원도의 한말의병은 다른 지역의 의병과 달리 초기부터 유생을 비롯하여 군인, 포수, 상인, 농민들이 참여하였다. 이들에게 주목되는 사실은 사상적으로 잘 무장되어 있었고, 산포수가 많아서 전투력이 강했던 점이다. 이들은 강원도가 산악지대라는 지리적인 조선을 살려 여러 차례의 유격전을 승리로 이끌었고, 무기제조소를 두어 대일항쟁을 보다 치열하게 전개하였다. 주요한 강원도의 의병은 춘천 이소응, 제천 유인석, 강릉 민용호를 비롯하여 주천.홍천.양구.삼척.울진 의병과 원주 민긍호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재기한 원주의병은 13도 창의군을 결성하여, 일본을 상대로 선전포고를 하고, 연합의병부대로 대오를 정비해 서울진공작전을 시도하였다. 그 중 강원도에서 활약한 유인석, 박장호 등의 의병은 지속적인 대일항쟁을 위해 만주와 연해주 등지로 이동하여 투쟁을 계속하였다. <출처:춘천박물관>


용담유사, 최제우. 동학을 포교하기 위한 가사집으로 일반 백성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한글의 기사체로 쓰여졌으며, 서양세력에 맞서기 위해 동학을 주장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윤희순여사 의병가(복제품), 1896년


화약통과 화승총,


왜적토벌을 논한 편지, 강건선(1875년), 홍제구(1866년)


안부를 묻는 편지, 유인석(1897년), 이소응(1903년)


사진엽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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