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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박물관] 능산리사지 가람이야기, 공방지 출토 유물들

younghwan 2012. 6. 2. 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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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여군 능산리 고분과 부여 나성 사이에 위치한 능산리 절터는 백제 성왕의 아들 위덕왕이 선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사찰로 원찰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1탑1금당의 전형적인 백제 사찰의 가람배치를 하고 있는 이 사찰은 다른 사찰과는 달리 뒷편 강당과 주변 건물들이 사당으로 먼저 세워지고 그 뒤에 목탑과 금당이 지어지면서 사찰의 모습을 갖추었다고 한다. 능산리 사지 절터 뒷편에는 강당건물과 함께 공방지로 추정되는 건물터가 있는데, 이 곳은 원래 성왕의 제사를 지내던 사당의 부속건물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 절을 세운 위덕왕이 죽고 서동요의 주인공 무왕이 왕위에 오르면서 그 기능이 축소되면서, 공방건물로 바뀌었던 것으로 보인다. 내부에는 굴뚝을 설치하여 동광석을 제련하고 사찰에 필요한 각종 청동제품을 제조하는 공방으로 바뀌었다. 이 공방에서 백제를 대표하는 유물인 백제금동대향로가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공방건물터에서는 장신구로 사용되었던 각종 유리구슬을 비롯하여, 건물이나 가구 등을 장식했던 각종 금동꾸미개와 풍경, 항아리와 연통모양의 토기 등이 출토되었다.
 
능산리 절이 왜 만들어졌을까?
384년 침류왕대 불교가 전래된 이후 백제 불교는 성왕대에 전성기를 맞는다. 중국 남조의 양나라와 빈번하게 교섭한 성왕은 양나라 무제의 영향을 받아 숭불사업에 지대한 관심을 쏟았으나 관산성 전투(554년)에서 신라군에 패하여 죽음을 맞이 하였다. 그 뒤를 이어 즉위한 위덕왕은 불교를 통하여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여 백제를 중흥시키고자 하였다. 결국 위덕왕은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어버지 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사당'을 만들고 이후 사찰로 개편하였다. <출처:부여박물관>



부여 백제문화단지에 재현된 능산리 절의 공방건물. 원래 성왕의 무덤에 부속된 제사기능을 수행하던 건물이었는데 그 기능이 바뀌어 후에 사찰에 필료한 물건들을 만드는 공방건물로 바뀌었다. 백제를 대표하는 문화재인 금동대향로가 이곳에서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며, 이곳에서는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공방지의 기능은 어떻게 변화되었을까?
공방지 1, 2는 원래 초기 건물지군으로 성왕릉의 축조나 성왕을 추복하기 위한 '사당'으로서 각종 제사 기능을 수행하던 시설이었다. 공방지 2는 강당지와 같은 구조로 제사기능이 수행된 공간이었고, 공방지1은 강당 부속건물의 성격으로 공식적인 접견이나 의례준비를 위한 공간이었다. 이러한 기능은 무왕 재위기간 중 익산 천도와 연계되어 상당히 위축되면서 공방지로 전환되게 되었다. 내부구조도 기존의 벽체 하부시설을 훼손하고 굴뚝을 설치하는 등 인위적으로 변형하여 동광석을 제련하고 청동제품 등을 제조하는 공방으로 기능하게 되었다. <출처:부여박물관>



유리구슬, 부여 능산절터 공방지, 백제


골제제옥과 토제구슬, 부여 능산리 절터 공방지, 백제


유리구슬, 꽃모양 금 꾸미개, 부여 능산리절터 공방지


손칼자루(공방지 출토), 토제 거푸집(능산리 절터)


원모양 금동꾸미개, 공방지


금동 꾸미개, 공방지


금동광배, 공방지


풍경판, 공장지


사각형 금동꾸미개, 꽃모양 은 꾸미개, 금동꾸미개, 원모양 금동 꾸미개, 능산리절터


철제모루, 철제공이, 철판, 공방지에서 많은 금속제품들이 만들어졌음을 보여주는 도구들이다.


숫돌, 돌도끼, 철도끼, 능산리 절터


항아리,능산리 절터


연통모양 토기, 능산리 절터. 공방지 건물에서 청동제품을 제련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게 해 주는 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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