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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박물관] 능산리사지 목간에 남겨진 이야기

younghwan 2012. 6. 3.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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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冊)이라는 한자의 어원이 되는 목간은 종이가 발견되기 이전에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던 문서로 폭 1cm, 길이 20~30cm 정도로 끈어로 묶어서 사용했는데, 지금의 책과 비슷한 크기라고 할 수있다. 목간은 춘추전국시대 이후 다양한 저서들이 적혀있는 오늘날의 책과 같은 용도로도 많이 사용되었지만, 실제로는 교역을 위한 영수증, 물품표, 교역내용의 기록한 장부 등의 목적으로 많이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반도에서는 한.중.일 해상무역이 활발했던 지역에서 교역의 목적으로 한자를 도입하고, 이를 목간에 기록해 놓은 유물들이 많이 출토되고 있다. 목재로 만들어진 목간은 물품표 등이 경제적인 목적으로 종이가 만들어진 이후에도 상당한 기간동안 사용되었는데, 목재의 특성으로 우리나라에서 잘 부패되지 않는 연못, 뻘 등에 묻힌 상태로 많이 발견된다.

 백제인의 문자생활을 보여주는 목간은 능산리절터에서도 많이 출토되었는데 주로 중문지 부근의 배수로에서 출토되었다고 한다. 대부분의 목간은 능산리 절의 목탑이 건립된 567년 부근의 시기에 많이 사용된 것이라고 하며, 이는 이 절이 성왕의 무덤이 있는 능산리고분군의 원찰로서 역할을 수행했던 시기와 비슷하다. 이 절터에서 발견된 목간들은 불교의식, 제사, 주술 등의 행위를 위한 내용이 많으며, 꼬리표와 같은 일반적인 문서행위를 보여주는 것들도 다수 발견되었다고 한다.

 능산리절터에서는 목간과 함께 많은 나무로 만든 생활용품들도 많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그 중 고대칠기제작방법이나 백제의 회화연구에 중요한 제료가 되는 붉은색 꽃무늬가 화려하게 장식된 칠기편도 발견되었으며, 백제인들이 목화로 직물을 만들어 사용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직물도 출토되었다고 한다.

목간이 들려주는 능산리 절 이야기
능산리사지에서 발굴된 목간은 주로 중문지 남서쪽과 동남쪽의 초기 자연배수로에서 출토되었다. 이 목간의 대부분은 554년 관산성 전투 무렵부터 목탑이 건립된 567년 전후의 시기에 사용되다가 폐기된 것으로 보인다. 이보다 조금 늦은 시기의 목간 1점이 8차조사에서 발굴되었는데 이것은 6세기 후반에 제작되었다가 폐기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능산리사지에 남겨둔 목간들은 내용에 따라서 불교의례.제의.주술, 물품의 이동, 문서행위 등을 기록한 것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출처:부여박물관>


'보희사'명 복간(복제품), 물품이동(꼬리표) 목간, 부여 능산리절터, 백제


'숙세명'명 목간, '삼귀명' 목간, 부여 능산리절터, 복제품, 불교의례.제의.주술 등의 목적으로 사용된 목간이다.


'이전'명 목간, '육부오방'명 목간, 복제품


기타목간,


'지약아식미기'명 목간, 복제품,  문서행위를 보여주는 목간이다.


남근형목간. 나쁜 기운을 막기 위한 주술적인 용도로 사용했던 남근형 목간이다. 이 목간에 보이는 길가에 세운다는 뜻의 '도연립'은 도성 바깥에서 사악한 기운이 들어오는 것을 막는 이본의 도향제와 관련지어 설명하기도 한다. 하지만 남근숭배사상은 생산 풍요를 기원하는 민간신앙으로서 남근의 왕성한 생명력을 바탕으로 사악한 기운이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한 의례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관산성 전투에서 뜻하지 않게 죽음을 당한 성왕의 명복을 빌고 아울러 취약했던 위덕왕 정권에 대한 백제의 중흥을 기원했던 것으로 보인다. <출처:부여박물관>


목간껍질과 부스러기, 부여 능산리절터

능산리사지 목제품 이야기
목간이 출토된 곳에서 다양한 목제품이 함께 발굴되었다. 접시, 빗, 구유통, 나막신, 자, 칼, 새모양 목제품, 숟가락, 젓가락, 지게발채, 수레바퀴편 등이 함께 나왔다. 다양한 생활용품 중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붉은색 꽃무늬가 화려하게 장식된 칠기편이다. 남아 있는 칠기편의 형태로 보아 대접의 형태였을 것으로 보이는데 현재는 옻칠한 무늬만 부분적으로 남아 있다. 이 칠기편은 고대 칠기 제작방법이나 백제 회화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출처:부여박물관>


나막신(복제품), 나무빗, 능산리절터,


칠기조각


칠그림, 부여 능산리절터 공방지. 공방지 중앙칸 수조에서 금동대향로와 함께 출토된 칠기편이다. 여기에는 꽃무늬가 부분적으로 남아 있는데, 그 형태가 돈황석굴 321굴 북벽의 무늬와 정창원 소유의 채색상자의 무늬와 비슷한 점으로 볼 때 당초문으로 추정된다. 이 칠기편은 칠기 제작기법이나 백제 회화사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출처:부여박물관>


가공목제품,


칼모양 목제품, '井'자형 목제품


문익점보다 800년 빠른 백제의 면직물. 부여 능산리사지 서쪽 돌다리의 백제 유적 층에서 출토된 면직물은 이곳에서 함께 출토된 '창왕명사리감'의 제작연도가 567년임을 감안할 때, 고려의 문익점이 중국 원나라의 목화씨를 처음으로 갖고 들어왔다는 14세기에 비해 무려 800년이나 앞서는 국내 최고의 면직물로 볼 수 있다. 이 유물은 목화에서 실을 뽑아 독특한 방법으로 직조한 고대 직물로, 당시의 제직기술과 복식사 연구에 있어 매우 귀중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이 직물은 고대의 일반적인 직조법과는 달리 강한 꼬임의 위사를 사용한 독특한 직조방식의 직물로 중국에서도 아직 그 예가 보고된 바 없으며, 이 직물을 통해 백제인의 독창적인 직조기술을 확인할 수 있다. <출처:부여박물관>


나무구유, 능산리절터


백제인의 머리카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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