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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박물관] 신라와의 전쟁과 익산경영, 왕궁리유적지 출토 유물

younghwan 2012. 6. 11.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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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북 익산시 왕궁리에는 국보 289호로 지정된 왕궁리 5층석탑을 중심으로 옛 절터가 남아 있다. 이 절터를 발굴 조사한 결과 사찰건물터와 함께 궁궐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건물터와 주변에 성벽터가 발견되어 이 곳이 백제 무왕이 미륵사 건립과 함께 백제 왕궁을 조성했다는 것을 추정하게 해 주고 있다. 왕궁리 절터에는 무왕이 조성한 왕궁지와 후대의 사찰 유적이 같이 남아 있는데 후대의 궁궐과 마찬가지로 앞쪽에는 정전을 중심으로 한 의례적인 공간이, 뒷쪽으로는 생활공간의 흔적이 남아 있다. 절터에서는 중앙정부가 있는 곳이란 의미의 '수부'명 기와가 발견되어 이 곳이 왕궁으로 조성한 곳임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또한 관북리유적지 등에서 출토된 당시의 행정관제를 나타내는 글씨가 찍힌 기와들이 왕궁리유적지에서도 출토되고 있다.

 백제 부흥을 꿈꾸던 성왕을 계승한 무왕은 비교적 오랜 기간인 40여년을 왕위에 재위했는데, 그 기간 동안 미륵사와 제석사를 익산에 세우고, 궁남지를 조성하는 등 많은 토목공사를 일으켰다. 또한 성왕대 이후 신라와의 뿌리깊은 갈등은 무왕대에도 이어졌다. 무왕대에는 총 14차례나 신라와 전쟁이 있었으며, 그 전장은 주로 한강유역과 신라의 동쪽에 해당하는 지리산 동쪽지역이었다고 한다. 당시 중국 당나라는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 양국간 화해를 요구했으나 이루어지지 않고 무왕의 적극적인 공세는 신라로 하여금 위기감을 고조시켜 통일전쟁의 시발점이 되었다고 한다.

무왕이 정복해야만 했던 나라, 신라
무왕이 통치한 600년부터 641년까지 백제와 신라 사이의 충돌과 갈등은 치열하였다. 모두 14회의 전쟁 중 11회의 선제 공격을 통해 신라를 위협하며 영토를 확장하였다. 운봉 및 함양을 점령하면서 소백산맥을 넘어 경상도 공략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한강유역을 탈환하기 위한 공격도 감행했다. 무왕의 격렬한 대신라 전쟁은 선대의 구원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동맹을 맺어 되찾은 한강유역을 553년에 신라에 빼앗기면서 벌어진 관산성 전투에서 성왕이 전사하였고, 이로 인해 신라에 대한 백제의 원망은 깊어졌다. 이와 같은 치열한 백제의 공격은 신라의 위기감을 고조시켜 통일 전쟁의 시발이 되었다. 전북 익산에는 대사찰인 제석사와 미륵사의 터가 남아 있다. 위덕왕대 후기부터 무왕대에 걸쳐 본격적으로 조성된 왕궁리 유적에서는 많은 건물지와 목탑지, 공방시설과 대형화장실, 정원시설 등의 유구와 함께 중앙정부가있는 곳이란 의미의 '수부'명 기와가 발견되었다. 이는 백제 후기에 건립된 또 하나의 왕궁으로 추정된다. <출처:부여박물관>



화살촉, 큰낫, 부여지역 출토


도끼, 칼, 갈고리창, 부여지역 출토


갈래창, 발걸이, 마름쇠, 철갑옷 편, 투겁창, 부여지역 출토


7세기 백제와 신라의 격전지와 변경. 무왕대에는 백제와 신라간에는 많은 전쟁이 있었으며, 그 무대는 백제에서 신라로 들어가는 길인 남원에서 함양, 합천 주변 지역과 한강유역의 쟁탈을 위한 충북지역이 대부분이다.


시루, 자라병, 그릇(반), 임실 성미산성, 백제


'서부후항'이 기록된 나무조각, 궁남지 출토. "서부후항에 사는 시달사사 일행은 메라성 법리원에서 가서 5형을 개간하다"라는 내용이 적혀 있다고 한다.


익산 왕궁리 유적지. 무왕이 왕궁을 건설할 목적으로 제석사라는 큰 절을 세운 장소로 고려시대 석탑인 왕궁리 5층 석탑을 중심으로 많은 건물터와 성벽터가 남아 있다.


'수부'글씨 도장을 찍은 기와, 익산 왕궁리유적. 수부는 서울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한다.


'후부갑와', '전부갑와', '신부갑와' 글씨 도장을 찍은 기와, 익산 왕궁리유적, 백제. 이들 글씨는 백제의 행정체제를 뜻하는 내용이다.


여성용 변기, 익산 왕궁리유적, 백제


구리.주석덩어리, 유리, 익산 왕궁리 유적, 백제


왕궁리유적 출토 도가니, 전 달린 토기,


그릇, 원통모양 토기, 익산 왕궁리 유적


귀때 달린 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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