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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문화재(탑_석등_범종)

[부여박물관] 부여 석조 (보물 194호), 관북리 왕궁터에서 발견된 백제 왕궁에서 사용했던 수조

younghwan 2012. 6. 17. 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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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조(石槽)는 물을 담아 두는 그릇으로 큰 돌을 넓게 파고 물을 받아 사용하도록 만든 일종의 돌그릇으로 백제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많이 사용되었다. 흔히 사찰에서 샘물과 연결하여 물을 담아두는 석조가 오늘날까지 많이 남아 있다. 이는 카톨릭 성당이나 이슬람 사원을 출입하기 전에 손과 발을 씻는 곳과 비슷한 성격을 갖는 것으로 불교의 전파와 함께 사원을 구성하는 요소로 전파된 것으로 보인다. 석조는 단단한 화강석을 파서 만든 큰 구조물로 그 재료의 견고성 등으로 인해서 삼국시대 이후 만들어진 많은 석조들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으며, 지금도보물 1523호로 지정된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불국사 석조는 오늘날까지 불국사를 찾는 사람들에게 시원한 샘물을 제공하고 있다. 

 부여박물관 중앙에는 백제의 마지막 왕궁터로 추정되는 부여 관북리 유적지에 있던 보물 194호로 지정된 백제 왕궁에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석조가 있다. 이 석조는 사찰 입구에 놓여 있던 손을 씻고 샘물을 받아 먹던 기존의 석조와는 그 형태와 용도가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工형 받침 위에 둥근 꽃봉오리가 형태를 하고 있는 이 석조는 연꽃을 심어 그 꽃을 즐겼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는 화분과 비슷한 기능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사찰과 마찬가지로 성역화된 궁궐의 위상을 반영하고 있던 유물이라고도 볼 수 있다.



부여박물관 중앙에 전시되어 있는 보물 194호로 지정된 부여 석조.


이 석조는 工자형 받침 위에 꽃봉오리 모양의 석조가 올려져 있다. 일반적인 석조와는 다른 형태를 하고 있는 유물이다.

부여 석조, 보물 194호, 부여 관북리 추정 왕궁터
이 석조는 왕궁에서 연꽃을 심어 그 꽃을 즐겼다는 전설이 전해오는 것으로, 工자형 받침 위에 둥근 꽃봉오리 형태의 석조가 올려져 있다. 본래 이 석조가 있었던 장소는 백제의 왕궁터로 전해지고 있어 당시 왕궁에서 사용된 것으로 짐작된다. 형태가 풍만하면서도 깔끔한 곡선으로 처리되어, 백제인의 간결하고 소박한 미적 감각을 잘 보여주고 있다. 석조의 표면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세로줄을 새기고 그 사이에 글을 새겨 넣었으나, 지금은 흔적만 보인다. 글은 당나라가 백제를 평정했다는 내용으로 부여 정림사터 오층석탑(국보 9호)의 1층 탑몸돌에 새긴 것과 같은 것이다. <출처:부여박물관관>


석조, 6~7세기, 부여 관북리에 백제 왕궁으로 추정되는 유적지에서 발견된 또 다른 석조이다. 배모양을 하고 있는 이 석조들은 사찰 등에서 출토되는 석조와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으며, 사찰처럼 성역화된 백제 왕궁의 위상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석조, 6~7세기, 부여 관북리


석조들이 발견된 백제 왕궁 후원 터로 추정되는 부여 관북리 유적지


석조, 6~7세기, 부여 동남리, 부여 현북리,


석조, 6~7세기, 부여 용정리


석조는 성역에 해당하는 사찰 경내로 들어가기 전에 손을 씻는 곳이다. 이와 비슷한 형태로 이슬람사원에서는 안뜰에 손을 씻는 큰 수조를 두고 있다.

카톨릭성당에는 성당내부 출입문을 들어서면 한쪽편에 손을 씻는 작은 성수대가 놓여 있다.


로마시대의 경우 신전이나 주요 공공건물이 있는 곳에는 큰 광장을 조성하고 한쪽편에 수도시설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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