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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문화재(탑_석등_범종)

경주 굴불사지 석조사면불상 (보물121호), 백률사 언덕아래 남아 있는 통일신라 전성기 조각수법을 보여주는 불상

younghwan 2012. 6. 18.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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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시 동천동 소금강산 기슭에 위치한 이차돈 순교 설화가 전해내려오는 백률사 아래 절터에 남아 있는 거대한 사면석물인 보물 121호로 지정된 경주 굴불사지 석조사면불상이다. 이 불상은 거대한 돌에 불상을 새겨 놓고 있는데 서쪽에는 아미타삼존불, 동쪽에는 약사여래상, 남쪽에는 삼존불입상을, 북쪽에는 여래입상과 11면 관음입상을 새겨놓고 있다. 통일신라 전성기에 만들어진 석조불상으로 입체감과 생동감이 넘치는 표현을 하고 있어, 당시의 빼어난 조각수법을 잘 보여 주고 있다. 다만, 전체적인 양식이나 내용에 있어서 통일성이 부족하여, 전체적으로는 조화롭지는 못한 편이다.

 굴불사는 <삼국유사> 기록에 따르면 8세기 경덕왕이 백율사를 행차할 때 땅속에서 염불소리가 들려 땅을 파서 보니 큰 돌이 나와 이곳에 절을 세우고 돌에는 4면에 불상을 새겨놓게 하였다고 한다. 불상이 남아 있는 백율사 부근에 신라가 불교를 받아 들일때 큰 역할을 한 이차돈의 순교와 관련된 설화가 남아 있는 곳으로 이차돈의 목이 이곳에 떨어졌다고 한다. 경주에 있었던 많은 사찰들 중에서도 중요도가 상당히 높았던 곳으로 백률사 대웅전에 있던 금동약사여래입상과 이차돈의 석당이 현재 경주박물관에 소장 전시되고 있다.



이차돈 순교 설화가 남아 있는 백률사를 오르는 길 입구에 남아 있는 보물 121호로 지정된 굴불사지 석조사면불상. 통일신라 전성기때인 8세기 경덕왕대에 이곳에 있던 바위를 파서 사방에 불상을 새기고 굴불사라는 절을 세웠다고 한다.


굴불사 석조사면불상은 큰 바위의 4면에 불상을 새겨놓고 있는데, 자연석 형태를 그대로 이용해서 불상을 새긴 까닭에 세부적인 조각수법은 매우 뛰어난 편이나 전체적으로 통일성과 일관성이 부족한 편이다.


사면불상 서쪽에는 아미타삼존불을 새겨놓고 있다. 아미타여래상은 신체만 돌기둥에 조각하였고 머리는 따로 만들오 올려 놓았다. 신체는 힘있고 굴곡있게 표현되어 있으며 양쪽에 다른 돌로 보살입상을 세워 놓아 삼존불의 모습을 하고 있다.


동쪽에는 양발을 무릎위에 올리고 약병을 들고 앉아 있는 약사여래상을 새겨 놓고 있다. 자연석을 그대로 활용해서 그런지 위쪽은 상당히 입체감있게 부조상을 새겨놓고 있는 반면에 아래쪽은 얇고 간략하게 묘사하고 있다.


남쪽에는 원래 3존상으로 되어 있었다고 하는데, 일본인들이 오른쪽 보살을 완전히 떼어가고 가운데 본존상의 머리도 떼어갔다고 한다. 미래불로 여겨지는 미륵불을 표현한 것인데, 상당히 입체감있게 불상을 새겨놓고 있다. 머리에 상투를 튼 모습이 초기의 미륵보살의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다.


북쪽면에는 입체감 있게 새긴 보살입상과 손이 6개달린 관음보살을 얕은 선으로 새겨놓고 있다.


굴불사지 석조사면불상의 동쪽과 북쪽에 새겨진 불상


언덕위에서 내려다 본 굴불사지 석조사면불상


굴불사지 석조사면불 입상. 동쪽과 서쪽의 불상은 크게 새겨 놓은데 비해서 남쪽과 동쪽은 약간 왜소한 느낌을 주고 있다.

경주 굴불사지 석조사면불상, 보물121호, 경주시 동천동
이 불상은 경주의 북쪽 산인 소금강산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높이 약 3m의 커다란 바위에 여러 보살상을 조각한 사방불 형태이다. 불상은 서쪽면에는 아미타삼존불, 동쪽면에는 약사여래좌상, 남쪽면에는 삼존입상이, 북쪽면에는 보살상 두 분이 새겨져 있는데 특히 북쪽면 보살상 중 한분은 얼굴이 열하나, 팔이 여섯달린 관세음보살입상으로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것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 경덕왕이 백율사를 찾아을 때 땅속에서 염불소리가 들려왔다고 한다. 땅을 파 보니 이 바위가 나와서 바위의 사방에 불상을 새기고 절을 지어 굴불사라고 불렀다고 한다. 최근의 발굴조사에서 고려시대의 건물터가 확인되었다. 출토유물 가운데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금고에는 굴석사라는 명문이 있다. <출처: 경주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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