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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조선 유적_왕릉

남양주 광릉(사적 197호), 후대 왕릉의 모범이 된 세조와 정희왕후의 능

younghwan 2012. 7. 30.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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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릉수목원으로 더 잘 알려진 경기도 남양주시에 소재한 광릉은 조선 7대 세조와 왕비 정희왕후 윤씨의 능이다. 광릉은 조선 왕릉의 표준을 제시한 능으로 세조의 유명에 따라서 당나라의 능묘제도를 받아들인 통일신라시대 이후 왕릉과 귀족들의 무덤에 사용하였던 석실과 십이지신상 등을 새겼던 병풍석을 없애서 왕릉조성에 들어가던 경비를 크게 줄였다고 한다. 왕릉을 수호하는 것을 상징하던 12지신상 대신에 난간동자석주를 새기고, 석실은 회격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또한 능을 배치함에 있어서 정자각을 중심으로 왕과 왕비릉이 양쪽 언덕에 배치되는 동원이강의 형식이 처음 적용되었다고 한다. 이는 조선의 왕릉제도를 크게 바꾼 것으로 후대 왕릉 조성의 모범이 되었다고 한다. 광릉을 지키는 원찰로는 근처에 위치한 봉선사가 있다.

 단종의 왕위를 찬탈한 수양대군으로 잘 알려진 세조는 세종대왕의 둘째아들로 1453년 황보인, 김종서 등을 살해한 계유정난으로 권력을 잡은 후 단종을 폐위하고 왕위에 오른 인물이다. 세종대에는 불경을 한글로 번역한 월인석보상절 저술을 주도하는 등 한글 창제에 큰 역할을 하기도 했으며, 왕위에 오른 후에는 집현전을 폐지하고 의정부 중심에서 육조를 비롯한 집행기관 중심으로 정치제제를 바꾸었으며, 국왕 중심의 정치제제와 제도를 정비하였다. 또한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고, 국방을 강화하여 북방 만주족의 위협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였다. 세조는 불경을 한글로 번역하는 등 불교를 가까이 한 인물로 오대산 월정사.상원사, 속리산 법주사, 금강산 건봉사 등 전국의 많은 사찰들이 세조와 관련되어 있다. 세조의 왕비인 정희왕후는 예종과 덕종을 낳았으며, 조선초기 불교가 살아남는게 큰 역할을 한 인물로 성종초에는 조선에서는 처음으로 수렴청정을 하였다.


왕릉은 궁궐과 마찬가지로 바깥세상과 분리해 주는 하천인 금천이 흐르며, 입구에는 작은 돌다리인 금천교가 있다. 광릉입구에는 작은 하천이 흐르지만, 돌다리인 금천교는 원래부터 없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은 남아 있지않고 최근에 만든 작은 다리가 놓여 있다.


다리 앞에 세워진 하마비


왕릉 입구에 위치한 제실


광릉으로 들어가는 숲속길. 조선왕릉 중에서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광릉은 숲이 잘 보전된 곳으로 울창한 숲을 자랑한다.


왕릉 입구임을 알려주는 홍살문


왕릉에서 홍살문부터 봉분 아래의 시설들을 제향, 전이공간이라고 하느는 제사를 모시는 정자각을 중심으로 수복방, 수라간 등의 건물과 비각, 축문을 태우는 예감 등 제례시설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 중 '丁'처럼 생겼다고 하여 정자각이라고 부르는 이 건물은 제사를 지내는 공간이다. 광릉은 하나의 정자각을 중심으로 양쪽 언덕에 왕과 왕비의 봉분을 두는 동원이강릉을 처음으로 조성한 왕릉이다. 이는 왕릉 조성에 드는 경비를 절감하여 검약함을 강조한 것으로 후대 왕릉 조성의 모범을 보였다고 한다.


광릉에는 다른 왕릉과는 홍살문에서 정자각에 오르는 길인 박석을 깔아 놓은 신도와 어도를 조성해 놓지 않는 것이 특색이다.


광릉 정자각 건물은 앞면 3칸으로 장식을 거의 하지 않고 있다.



내부공간에는 전돌을 깔아놓고 있으며, 제사상 외에는 특별한 장식이나 가구 등을 비치해 놓고 있지 않다.


전돌을 깔아 놓고 있는 정자각 월대


광릉에는 수복방과 수라간 건물이 남아 있지 않고, 단지 수라간 건물터만 남아 있다.


정자각 동쪽편에 위치한 비각


비석


광릉 정자각


서쪽편 언덕에 위치한 세조의 능. 광릉은 능침영역을 격일제로 개방하고 있는데, 세조의 능은 홀수일, 정희왕후의 능은 짝수일에 개방하고 있다.


동쪽편에 위치한 정희왕후 윤씨의 능.


세조의 왕비인 정희왕후 윤씨의 능침공간. 세조의 유훈에 따라 간소화된 모습으로 후대 왕릉의 모범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기존 왕릉에 사용하였던 석실과 12지신상 등을 새겼던 둘레석을 없애고 회벽을 사용하였다.


광릉은 봉분을 둘러싸고 있는 둘레석과 12지신상을 없애고 간략하게 난간석만 남겨 놓고 있다.


봉분을 둘러싸고 있는 석수. 석양 2쌍, 석호 2쌍이 배치된다.


봉분 앞 제를 올리는 혼유석.


혼유석 옆으로는 1쌍의 망주석이 세워져 있고, 앞에는 불을 밝히는 장명등이 놓여 있다. 장명등은 불교 사찰의 석등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왕릉을 수호하는 의미를 갖는 1쌍의 문.무인석. 중국 당나라의 능묘제도를 받아들여서 조성한 통일신라시대 이후에 왕릉에서 볼 수 있는 석물이다.


문.무인상 뒤편에는 석마가 배치되어 있다.


왕릉 봉분 앞 석물들


왕릉 봉분 앞에서 내려다 보이는 제향.전이공간과 주변 지역. 광릉 주변이 풍수상 길지라 하여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있는데, 왕릉 봉분에서 내려다 보이는 풍경이 산과 물, 계곡 등의 조화를 이루고 있어 보인다.


왕릉 주변의 울창한 숲


광릉으로 들어오는 길


광릉 입구에 흐르는 작은 냇물


광릉 출입문 주변 숲


광릉 입구를 지나는 국도. 광릉수목원을 지나는 이 국도는 우리나라에서 대표적인 아름다운 길 중 하나이다.


울창한 숲속을 지나는 국도


광릉에서 동쪽으로 약간 떨어진 곳에 위치한 광릉을 지키는 원찰인 봉선사. 조선시대 불교에서 중요한 사찰이었고, 꽤 오래된 사찰이지만 한국전쟁으로 건물대부분이 불타버렸다고 한다. 현재 사찰건물들은 대부분 그 이후에 지었다고 한다.



광릉, 사적 197호
광릉은 조선 제7대 세조와 왕비 정희왕후 윤씨(1418~1483)의 능이다. 세조는 태종 17년(1417) 제 4대 세종대왕의 둘째아들로 태어나 세종 27년(1445) 수양대군으로 책봉되었다. 1452년 단종이 어린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1453년 황보인, 김종서 등을 살해하여 권력을 장악하고, 아우 안평대군을 제거하였으며, 1455년 단종으로 하여금 왕위를 넘겨주겠다는 교서를 내리게 하여 왕위에 올랐으며, 성삼문 등의 집현전 학자들이 단종을 복위시키려다 발각되자 모두 사형에 처하고 집현전을 폐지하였다. 세조는 정관정요주해, 본국지도 등을 편찬하게 하고 변방의 경비를 굳건히 하며 국세의 조사에 힘을 기울였다. 국조보감의 찬술.군제개혁.찰방 신설. 팔방통화 주조 등 문무 제도를 정비하였다. 그리고 동국통감.역학계몽요해.잠서.선종영가집.금강경언해.원각경.오륜록 등을 간행하게 하였다. 규형.인지의를 제작하여 토지 측량을 쉽게 하었다. 또한 북쪽 변방을 침범하는 만주족을 정벌하였다. 세조는 재위 14년 동안 많은 업적을 쌓아 중앙집권적 왕권강화에 크게 공헌하였으나, 말년에는 단종에게서 왕위를 빼앗은 것에 대한 인간적 고뇌에 싸여 번민하다가 불교에 가르침에 의지하였다. 정희왕후 윤씨는 파평부원군 윤번의 딸로 태어나, 세종 10년 (1428) 혼인하였고 1455년 왕비가 되었다. 덕종.예종.의숙공주를 낳았다. 성종이 왕위에 오른 후 7년 동안 나이 어린 왕을 대신하여 나라를 다스린 조선시대 최초의 수렴청정을 한 왕후로 유명하다. <출처: 광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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