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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사찰

광주 망월사, 남한산성 축성을 위해 동원된 승병들을 위해 창건한 사찰

younghwan 2012. 8. 16.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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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한산성 동쪽 해발 467m의 망월봉 아래에 위치한 망월사는 남한산성 축성과 방어를 위해 동원된 전국의 승병들을 위해 창건한 7개 사찰 중 하나로 남한산성에 남쪽편 검단산 방향과 함께 방어에 가장 취약했던 동쪽편 벌봉과 망월봉 주변을 방어하며 성벽을 유지.관리하는 역할을 가지고 있었던 사찰이다. 이 사찰은 남한산성이 축성되기 이전부터 망월암이라는 작은 암자가 있었으며, 남한산성 축성과 함께 사찰의 규모가 커졌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망월사는 구한말 일제에 의해 사찰 전체가 불타버리고 폐사되었던 것을 그 이후에 복원된 것이라고 한다. 그런 이유로 사찰 전각 중 원래부터 있던 건물은 하나도 없고, 건물 터를 잡고 있는 축대에서 옛 망월사의 규모를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통일신라시대 주장성이 있었던 남한산성에 본격적으로 성벽이 축성되고 주요 시설물들이 들어선 것은 이괄의 난과 후금의 위협이 거세진 인조대로 병자호란 당시의 남한산성은 인조 2년(1624)부터 인조4년(1626)까지 축성한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인조 2년에 총융사 이서가 전국의 승려들을 동원하여 남한산성을 축조하였다고 한다. 이때 남한산성 축조에 동원된 승려들을 위하여 장경사, 개원사, 망월사 등 7개의 사찰을 창건하였으며, 산성 중심부에 위치한 개원사는 전군 승병을 총지휘하는 본영이었다고 한다. 남한산성내 사찰들은 일제가 의병의 근거가 될 수 있다는 우려때문에 대부분의 사찰과 관아를 없애버렸다고 한다.



남한산성 동쪽 해발 467m의 망월봉 아래에 자리잡고 있는 망월사 전경. 망월사는 남한산성에 있던 사찰 중 가장 오래된 사찰로 작은 암자였지만, 남한산성 방어를 위해서 동원된 승병들을 위해 크게 중창되었다고 볼 수 있다. 사찰 건물은 망월산 정상 바로 아래 높은 지대에 축대를 쌓아서 터를 잡고 건물을 올려 놓고 있다.


망월사 들어오는 입구인 일주문.


사찰 입구의 부도군


부도군 아래에 사찰을 들어가기 전에 목을 축이고 손을 씻을 수 있는 석조와 샘물이 설치되어 있다.


망월사 경내로 올라가는 경사진 언덕길


망월사에는 아미타불을 모시는 극락보전과 석가모니불을 모시는 대웅보전이 같이 있다. 원래 있던 불전들은 일제에 의해 화재로 소실되었던 것을 최근에 새로 지은 것이라고 한다.


극락보전 문살과 내부


극락보전 뒷편에는 석가모니불을 모시는 대웅보전을 별도로 두고 있다. 건물의 형태는 극락보전과 비슷하며, 해방 이후에 중건된 불전의 전형적인 형태를 하고 있다.


인도 인디라 간디 수상으로부터 직접 모셔온 진신 사리를 봉안한 13층 석탑.


망월사 승려들이 기거하는 요사채


망월사 범종각


망월사에서 내려다 본 남한산성 주변. 멀리 보이는 높은 산이 검단산으로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군이 검단산 주변을 점거하여 화포로 남한산성을 공략하여 조선군의 사기를 크게 떨어뜨려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하게 된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남한산성 동남쪽 성벽에서 본 망월사와 망월봉. 이 절이 상당히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망월사
망월사는 남한산성 내에 있는 10개의 사찰 중 가장 역사가 깊은 사찰로 망월암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이 사찰은 태조 이성계가 한양에 도읍을 정할 때 한양에 있었던 장의사를 허물고 그곳에 있던 불상과 금자화엄경, 금솥 등을 옮겨 창건하였다고 한다. 옛 망월사는 일제에 의하여 모두 소실되었고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이후에 복원된 것으로, 지금의 법당 자리가 원래의 망월사 중심 전각이 있던 곳이다. 곳곳에 남아 있는 돌 축대는 옛 망월사의 규모와 건물 배치를 짐작할 수 있게 하며, 대형 맷돌이 유물로 보존되어 있다. 대웅보전 우측에 위치한 사리탑은 인도 인디라 간디 수상으로부터 직접 모셔온 진신 사리를 봉안한 13층 석탑이다. <출처:광주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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