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 History Traveling

조선 관아

[창덕궁] 궐내각사 규장각, 조선 왕실의 도서관이자 학술연구기관

younghwan 2012. 9. 25. 23:29
반응형


 창덕궁 궐내각사 중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조선 왕실의 도서관이라고 할 수 있는 규장각이다. 조선초기 세종이 창설했던 학술 연구기관인 집현전의 예를 본받아 정조가 즉위하던 해인 1776년에 창설된 기관이다. 창덕궁 외조 출입문 앞을 흐르는 금천을 기준으로 바깥에 위치하고 있는 규장각은 책을 보관하던 주 건물인 규장각을 비롯하여 검서관들이 근무했던 검서청, 역대왕들의 글과 그림을 봉안하던 봉모당, 입구의 행각, 뒷편의 책고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규장각은 원래 숙종대에 왕이 지은 글인 어제와 왕의 글씨인 어필을 봉안하기 위해 지은 작은 건물이었으나, 정조대에 규장각을 확장하여 창덕궁 후원에 2층건물을 짓고 1층에 규장각 현판을 걸고 정식 정부기관으로 자리잡았다. 정조는 규장각에 기존의 어재.어필 뿐만 아니라 국내외의 방대한 도서를 수집.정리하게 하였으며, 당대 최고의 인재들과 함께 많은 도서들을 간행하였다. 정조가 규장각을 설치했을 당시 규장각에는 국내서적 약 1만여점, 중국서적 약 2만여점을 소장하고 있으고, 부속으로 역대 임금의 글과 그림을 보관하는 봉모당, 국내 서적을 보관하는 서고, 중국서적을 보관하는 열고관 등을 두었다. 정조 사후 규장각은 그 기능이 약해지기는 했으나 1910년 한일병합으로 해체될 때 10만여점의 장서가 있었다고 한다. 그후 규장각 도서들은 총독부 학무국을 거쳐 경성제국대학 부속 도서관으로 이관되었고, 지금은 서울대학교 규장각에서 조선왕조 실록을 비롯하여 규장각 도서들을 보관하고 있으며, 연구기능도 계속 이어오고 있다.



창덕궁 궐내각사 중 핵심건물이라고 할 수 있는 규장각이다. 원래 숙종대에 국왕의 어제와 어필을 보관하기 위한 건물이었는데, 정조대에 기존 역할 외에 국내외 도서을 수집.보관하고 서적을 편찬하는 정부기관으로서 역할이 바뀌었다. 정조는 규장각을 확장하면서 창덕궁 후원에 주합루를 세우면서 그곳에 별도로 규장각 현판을 달았다는 것으로 볼 때 이곳은 기존 규장각 역할 건물을 계속했던 것으로 보인다.(?)


창덕궁 금천 서쪽편에 위치한 궐내각사는 규장각과 부속건물들로 이루어져 있다. 앞쪽에 책 등을 보관하던 창고가 대부분인 행각을 두고 있으며, 그 안쪽에 규장각과 실무관원들이 근무하던 검서청이 자리잡고 있다.


궐내각사 바깥쪽 행각 가운데에 출입문을 두고 있다. 출입문에는 '내각'이라고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창고와 실무관원들이 근무하던 작은 방들로 이루어진 행각


규장각 출입문


규장각은 앞면 5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건물이다. 국왕의 어제와 어필을 보관하는 장소로 통풍을 중요시하여 일반건물에 비해서 마루를 높게 만들었고, 나무계단을 통해 내부로 출입하게 되어 있다. 규장각 건물은 국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건물로 삼도의 형식을 반영한 3개의 계단을 두고 있으며, 추녀마루에는 잡상을 세워 놓았다.


건물은 가운데 3칸은 책을 보관했던 넓은 대청마루로 이루어져 있으며, 양쪽에 1칸씩 작은 방을 두고 있다.


규장각 나무계단


규장각 추녀마루의 잡상


규장각 내부. 가운데 3칸은 넓은 대청마루로, 양쪽 1칸씩 방을 두고 있다.


규장각 서고에서 책을 보관하던 모습. 2012년 초 고궁박물관에서 일본으로부터 의궤를 반환받은 것을 기념하여 개최한 특별전 "다시찾은 조선왕실 의궤와 도서"에서 재현한 모습이다.


뒷편에서 본 규장각


규장각 동쪽편으로는 규장각 관원인 검서관들이 근무했던 건물이 검서청과 행각들이 있다.


검서청은 다른 관아건물들과는 달리 금천 옆에 일반사대부이 사랑채나 정자처럼 지어진 건물이다. 실제로 규장각 관원들은 이곳과 행각의 방에서 근무했던 것으로 보인다. 창덕궁 내에서도 상당히 경치가 좋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이는 집현전이 있던 자리에 세워진 경회루 앞 수정전처럼 학자를 우대했던 당시의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규장각과 검서청 사이의 마당


규장각 뒷편에는 역대 왕들의 글과 그림 등을 보관하고 있는 봉모당이 있다. 사당과 비슷한 기능을 하고 있는 건물로 여겨지며, 삼문의 형식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출입문을 두고 있다.


봉모당은 4칸 정도 규모의 건물로 가운데 3칸과 양쪽에 반칸씩을 두고 있다.


봉보당 앞에는 천연긴념물로 지정된 향나무가 남아 있다. 향나무는 사당에서 향을 피우는 것과 같은 의미를 갖는 것으로 사당 등에 많이 심어져 있다.


규장각 뒷편 서적들을 보관한 창고인 책고로 들어가는 길에는 금천으로 가로막는 담과 작은 출입문을 두고 있다.


봉모당 뒷편 국내외 서적들을 보관하던 서고인 책고로 들어가는 길.


앞쪽편에 있는 책고는 앞면 6칸, 옆면 1칸의 건물이다.


뒷쪽편에 있은 책고


정조가 규장각을 확장하고 정부기관으로 제도화하면서 경복궁 후원에 지은 주합루. 2층건물은 누각으로 사용하고 1층에는 규장각 현판을 들고 정조 자신의 어제, 어필, 인장 등을 보관했다고 한다.


전란등 국가비상사태 등을 대비하여 중요한 책자들을 보관하기 위해 행궁이 있던 강화유수부 관아에 지은 외규장각 건물.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군에 함락되어 불타버린 건물을 복원한 것이다. 이곳에 보관했던 조성왕조의궤들을 비롯하여 많은 서적들이 프랑스군에 약탈당했고 최근에 우리나라에 일부 반환되었다.


고궁박물관에 전시중인 정조어제어필. 이글은 1739년 정조가 규장각 관원들과 창덕궁 후원에서 곡수에 술잘을 띄워 돌리며 시를 짓는 곡수유상을 베풀었던 모임에서 적은 글이다. 이 모임에는 규장각 전.현직 관원 및 그 자제, 승지나 사관을 지낸 사람 등 41명이 참석하였다고 한다. 이 모임에서 정조가 손수 짓고 쓴 시, 신하들이 지은 시 40수가 남아 있어 고궁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다. 정조가 규장각 관원들을 상당히 우대했음을 잘 보여준다.


서울대학교 규장각. 1910년 일제에 의해 규장각이 해체될 당시에 약 10만여점의 도서가 있었다고 하며, 그 도서들은 현재 서울대 규장각에 보관.전시되고 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