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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주성은 삼국시대 백제가 토성을 쌓은 이래로 경상도에서 섬진강을 거쳐 호남평야로 연결되는 주요 교통로를 지키는 거점이 되었던 곳이다. 현재의 진주성은 고려말 왜구의 침략에 대응하기 위해 기존의 토성에 석축을 쌓은 형태를 오늘날까지 유지하고 있다. 성은 내성과 외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체 둘레는 4 km 였으나 지금은 1.7 km 정도의 내성만이 남아 있다.

 남강 북안 절벽위에 쌓은 진주성은 전체적으로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은 지형을 하고 있으며, 대체로 평탄한 편이다. 진주성 내성에는 동문이 촉석문, 북문인 공북문과 서문을 두고 있으며, 군사를 지휘하기 위한 장대로는 진주성내에서 제일 높은 서남쪽 언덕에 위치한 서장대, 진주도심이 내려다 보이는 공북문 서쪽 언덕에 서장대, 진주 남강이 내려다 보이는 촉석문 안쪽에 남장대(촉석루)를 두고 있다. 진주성은 백제가 처음 토성을 쌓은 곳으로 성의 입지나 지형적인 측면에서 백제가 선호했던 입지를 갖추고 있다. 진주성 남쪽과 서쪽은 남강과 하천이 천연해자 역할을 하고 있으며, 지금은 진주 도심지로 변한 북쪽에는 인공적으로 큰 못을 파서 해자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했으며, 동쪽으로는 외성을 쌓아 취약한 방어력을 보완하였다. 진주성은 임진왜란 이후에는 경상우병영이 주둔하면서 계속 중수하였는데, 다른 지역의 읍성이나 산성과는 달리 전체적으로 조총의 공격에 대비한 여장이 설치하고, 성문에는 옹성을 설치하는 등 조선후기 이후 화포의 발달에 대응하여 방어시설을 보강하였다고 한다.

진주성
진주성은 임진왜란과 관계가 깊다. 진주성은 삼국시대 거열성(居列城), 고려시대 촉석성(矗石城)으로 불렀던 것으로 조선시대에 이르러 진주성으로 개칭되었다. 석축된 성의 둘레가 약 1,760m(4,359척),높이는 약5m~8m(15척)이며,  성안에 우물과 샘이 각각 3개 있고, 군창(軍倉)이 있었다고한다.  이보다 앞선 동국여지승람에 실린 하륜(河崙)(1347~1416년)의 성문기(城門記)에 보면 성이 옛터만 남아 언제쌓은것인지 알 수 없는데, 왜구의 침입이 빈번하여 고려 우왕 5년(1379년)에 진주목사 김중광에게 석축하게 하였다고 한다.  이 때 성의 둘레는800보이고, 성의 높이는 세길을 넘으며 의정문(서쪽), 지제문(북쪽), 예화문(남쪽)이 있고,성밖은 서쪽으로 청천(靑川)이 남쪽에는 긴강 (남강)이 흘렀으며,북쪽에는 못이 있는데 성과 못 사이에는 참호를 팠다고 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호남으로 진출하려는 왜적을 막는 관문이 되었다.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로 제1차 진주성싸움을 드는것은 3800여명의 군사로 10배에 가까운 왜적을 물리쳤을 뿐 아니라, 이 성을 지킴으로써 곡창지대인 호남을 지킬수 있었기 때문이다.1593년 제2차 진주성싸움에는 민.관.군 7만여명이 왜군12만여명을 맞아 11일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모두 순의하였고, 이 때 논개가 적장을 안고 남강에 투신하여 충절을 다한곳이기도 하다. <출처: 진주성 관리사무소>


진주성 내성 북문인 공북문. 최근에 복원한 성문으로 2층 문루를 두고 있다. 정자처럼 지어진 일반적인 성문 문루와는 달리 조총이 출현한 조선후기 상황을 반영하여 2층 문루에 목재로 만든 총안을 두고 있다. 외형상 서울 동대문(흥인지문)과 비슷하다.


공북문 동쪽편 성벽. 공북문 주변으로는 지형이 평탄하며 방어가 취약했던 곳으로 보인다. 원래는 공북문 바깥쪽에 외성을 두어 방어상 취약점을 보완했다고 한다.


공북문 동쪽편 성벽과 여장


공북문 서쪽편 성벽


공북문 서쪽편 언덕에는 진주 도심을 내려다 보면서 군사를 지휘하는 북장대가 설치되어 있다.


공북문 성문 내부


진주성 내부에서 본 공북문


공북문 동쪽편 성벽


공북문 서쪽편 성벽


진주성 공북문에서 북장대로 올라가는 언덕길 성벽. 여장과 석축은 복원되어 있지만, 복원하는 과정에서 공원처럼 만들어져서 그런지 군사들이 적절히 이동할 수 있거나 방어에 용이하게 만든 일반적인 산성의 모습과는 약간 다른 모습이다. 이는 진주성에서 전반적으로 볼 수 있는 현상이다.


북장대 아래쪽에 있는 성문. 문루를 갖추고 있지는 않지만 우마차가 통행할 수 있는 규모의 아치형 성문이다. 진주성에는 이런 형태의 출입문을 여러곳에 두고 있다.


북장대 주변 성벽. 원래 주변보다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여 성내부에는 여장만 설치되어 있다. 성안쪽은 평탄한 지형을 이루고 있는데 원래 이곳에 토성을 쌓을 인공적으로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북장대 부근 관아가 있던 언덕에서 내려다 보이는 공북문


진주성 공북문 서쪽 언덕에 자리잡고 있는 북장대. 장대는 성곽에서 장수들이 적의 동태를 살피면서 군사를 지휘하는 장소로 큰 규의 누각으로 지은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이는 보통 전망이 좋은 곳에 위치하고 있어 평상시 연회나 모임을 가질 수 있는 장소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다. 진주성 북장대는 앞면 3칸, 옆면2칸으로 꽤 큰 규모의 누각이다.


북장내 내부. '진남루'라고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북장대에서 내려다 보이는 공북문과 북장대 사이의 성벽


북장대에서 내려다 보이는 진주도심. 원래 진주성 북쪽으로는 큰 연못을 파서 해자와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했다고 한다.


진주성 북장대


2006년 진주성 북장대


북장대에서 서문으로 이어지는 성벽길


북장대에서 서쪽편 포루가 있는 곳까지는 평탄한 지형을 이루고 있으며, 지금은 여장과 석축이 설치되어 있지만 그 형태에서 토성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진주성포루, 원래 진주성에는 12곳의 포루가 설치되어 있었다고 하면 현재는 이곳 포루만 복원되어 있다. 진주성 포루는 강화돈대나 수원화성 포루와는 달리 단순한 누각 형태로 지어졌다.

진주성을 방어하는 포진지이다. 선조40년(1607) 병사 김태허에 의해 진주성 내,외성에 포루 12좌가 설치되었는데 '여지도서'의 '경상우도병마절도영'조에 의하면 '내성의 포루는 3곳이니 삼가, 의령, 곤양 등 3읍의 소속이고 외서으이 포루는 9곳이니 진주, 단성, 초계, 거창, 사천, 함양, 남해, 합천 등 8읍 소속'이라고 하였다. 1969년부터 진주성을 복원하면서 상징적으로 1개소만 복원하였다. <출처:진주시청>



진주성 포루에 설치된 화포. 천자총통을 비롯한 여러 화포가 전시되어 있으나 실제 조선후기에는 서구의 화포를 모방하여 만든 블랑기포가 대부분 사용되었으며, 현재의 포루는 블랑기포를 위한 구조는 아닌듯하다.(?) 임진왜란 당시 모습을 재현한 것으로 보인다.(?)


포루에서 내려다 보이는 진주 도심


포루에서 서문으로 이어지는 성벽


진주성은 경사진 언덕에 석축을 쌓은 석축성으로 석축을 그리 높지 않게 쌓았다. 원래 토성을 쌓을때 방어에 용이하도록 정비되어 있었기때문에 석축을 높게 쌓지 않아도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진주성 서문 안쪽. 승병들이 거처했던 사찰인 호국사와 임진왜란 당시 순국한 사람들의 신위를 모신 사당인 창렬사가 있다.


진주성에 설치된 3개의 성문 중 하나인 서문. 공북문.촉석문과는 달리 문루가 없는 출입문이다. 원래 진주성 서쪽으로는 하천이 흘러 해자역할을 하기때문에 서문은 사람의 통행이 많은 곳은 아니었다.


진주성 서문으로 들어가는 길


서문에서 북장대 방향 성벽


서문에서 서장대 방향 성벽


서장대를 오르는 계단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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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성북동 | 진주성 북장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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