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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박물관

[부산박물관] 조선시대의 부산

younghwan 2013. 6. 21.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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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일신라가 멸망하고 고려가 건국되면서 정치.경제의 중심지인 수도가 경주에서 개경으로 옮겨짐에 따라 부산은 중심부와 멀어지면서 그 위상은 변방의 작은 고을로 위상이 격하되었다. 실제로 통일신라시대에는 부산(동래)은 동평현과 기장현을 속현으로 두고 있는 지역의 주요 거점이었나, 고려시대에는 울주(울산)의 속으로 격하되었다. 또한 한반도 동남해안에 위치한 부산의 지리적 특성은 일본과의 교류나 긴장관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지역인데, 고려시대 일본은 귀족문화과 절정을 이루던 시기로 한반도와는 군사적인 긴장관계가 거의 없었던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고려말 대몽항쟁기를 지나고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이 실패로 끝나면서 몽골은 일본과의 교류를 끊었다고 볼 수 있으며, 일본 내부사정도 귀족세력의 쇠퇴하고 막부를 중심으로 무인세력이 권력투쟁을 시작하는 시기였다. 이 시기에 큐슈지방세력을 지원을 받은 왜구들이 한반도 해안과 중국 해안을 약탈하면서 다시 일본열도와 한반도 사이에 긴장관계가 다시 시작되었으며, 부산은 그 접점으로서 그 역할이 부각되기 시작하였다.

 고려시대 울주의 속현이었던 부산(동래)에는 다시 도호부가 설치되면서 한반도 남부해안 국방의 최일선을 담당하는 지역으로 그 중요성이 증대되었다. 조선초기 부산지역에는 부산포에 진과 경상좌수영이 설치되고 왜구를 토벌하고 평화관계를 유지함에 있어서 외교관문 역항를 하였다. 조선시대 일본과의 교류는 거의 전적으로 동래도호부에서 관장했다고 볼 수 있으며, 조선후기에는 현재 용두산 공원 일대에 왜관이 설치되고 동래도호부에서 일본과의 통역을 담당했던 역관의 교육과 운영을 담당하기도 했다. 조선시대 부산지역의 역사는 대부분 동래도호부와 역관이 설치된 부산포와 관련된 부분이라고 할 수 있으며, 임진왜란 과정과 이후 에도막부와 평화협정을 통해 통신사를 파견하는 등이 조선시대 부산의 역할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까닭에 부산에는 다른 지역과는 달리 서원과 같은 양반문화가 크게 발달했다고는 볼 수 없으며 전통적인 조선사회의 모습이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다.


조선시대의 부산
고려말.조선초는 왜구의 피해가 극심하던 시기였다. 왜구의 본거지인 쓰시마와 지리적으로 가까운 부산은 이 시기 국방의 최일선을 담당하는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1397년(태조6) 부산포에 진이 설치되고, 후에 경상좌수영도 설치되면서 국방상 주요 지역으로 부각되었다. 또한 부산은 한.일간의 중요한 외교관문 역할을 담당해 왔다. 오늘날 무역대표부나 외교공관과 같은 역할을 하는 왜관이 동래 부산포에 설치되었고, 조선후기에는 두모포(현 수정동)에 설치되었다가 초량(현 용두산일대)으로 옮겼다. 일본사절과 상인의 출입이 빈번하였을 뿐 아니라, 조선사절이 일본에 파견될 때도 모두 부산을 경유해 감으로써 부산은 조선시대 한.일간 외교와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부산지역의 중심지였던 동래는 읍성내에 객사, 동헌을 비롯한 각종 관아건물들이 들어서 있었다. 그리고 읍치 가까운 곳에 동래향교.안락서원 등 교육기관이 있어 행정과 교육의 중심으로서 기능을 하였다. <출처:부산박물관>

동래의 행정
조선의 지방통치조직은 전국을 8도로 나누고, 그 아래에 부.대도호부.목.도호부.군.현을 두어 각각 중앙에서 지방관을 파겨ㄴ하는 중앙집권적 체제였다. 초기 동래가 현일 때에는 판현사 또는 현령이 수령이며, 그 아래에 향교를 맡은 훈도와 부산포에서 일본과의 업무를 전담한 왜학훈도, 교통행정에 관한 특수직인 역승이 있었다. 그리고 도호부때에는 도호부사가 행정을 전담하였고, 그 아래에 향교의 관리 및 교육을 담당하던 교수가 있었다. 당시 수령(현령, 부사)은 행정권.경찰권.군사권을 가지고 있었고, 그 업무는 이.호.예.병.형.공의 6방으로 나뉘었으며, 아전이라 불리는 향리들이 행정 실무를 맡았다. 중군.장관.군관 등 무임들이 치안이나 군사업무를 담당하였는데, 국방의 요충지인 동래에는 조선 후기에 일반 고을과는 달리 무인들이 많았다. 그 외에 민간 자치기관으로 향청이 있었고, 형.부의 밑에 면.동.리.촌의 우두머리가 있어 현.부의 정치상 명령을 백성에게 주지시키는 한편, 세금납부를 독려하는 일을 맡았다. <출처:부산박물관>


경상도지리지(조선 1425), 세종실록지리지(조선 1454)


내부일기


광서십구년 다대포진 각방중기, 1893년도에 작성된 다대포첨사으 이취임시 인수인계서로 1893년 4월 다대포첨사 민건호가 이임하면서 후임자 박기종에게 인계한 재산목록으로 다대진성의 규모, 각 건물의 칸수, 전함, 무기, 탄환의 보유현황 등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 책은 1894년부터 무든 제도가 바뀌면서 폐지되는 경상좌수영 산하의 군사제도를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다. <출처:부산박물관>


'서면'명 기와, 조선 15~16세기, 기장 교리유적 출토유물,


'동래군'명 기와, '남면동'명 기와, 동평현성지 출토유물, 조선 15~16세기


분청사기 '장흥고'명 바리, 조선 15세기, 만덕사지, 분청사기 '양산'명 접시, 조선 15세기

동래의 인구와 산업
조선전기 기록에 보이는 동래현의 전체 호구는 양인호를 기준으로 389호에 1400~3000명이며, 1740년 조선 후기 동래부의 호구는 5641호에 남자 9616명, 여자 9483명으로 총 19099명으로 나타나 있다. 조선말기인 1888년에는 27275명으로 증가하였다. 주산업은 농업으로 벼.보리.기장.조.콩 등이 경작되고, 수산업으로 대구와 청어잡이가 유명하였다. 목축업으로는 석포.다대포.절영도 목장에서 소와 말이 사육되었다. 전포리.장림리.부산포.명지도 등에는 큰 가마에 바닷물을 졸여 소금을 만드는 염분이 있었다. 그 외 군기를 비롯한 관청의 수요품을 제조하는 관영수공업과 야장.도공.자기공.지장.와장.목공 등의 민영수공업이 있었다. 농촌에서는 면포.마포 등의 직물, 집신.가마니.새끼.덕석.섬, 목제기구 등이 생산되었다. <출처:부산박물관>


사통(조선 1893년), 동래부사서목(조선)


동래정씨족보록, 1674년. 이 족보는 1629년(인조27)에 간행한 보첩에서 빠진 사람들을 위해 1674년(현종15)에 증간한 것으로 우리나라 초기 가승의 좋은 예이다. 일반적으로 족보에서 이름옆에 관직, 생년월일, 사망일자, 묘소위치 등과 부인의 관련 내용이 기록되는데 비하여 부계의 관직만 약칭으로 이름 위나 옆에 기록되어 있다. <출처:부산박물관>

조선시대의 교육
조선시대에는 유교진흥정책에 따라 1393년(태조1) 중앙에 성균관과 4학(중학.동학.남학.서학)을 설치하였으며, 지방에는 남쪽의 제주에서 북으로는 갑산까지 각 주군에 향교를 세우고 인재양성을 위해 교육하였다. 중기 이후에는 사림에 의해 사설교육기관인 동시에 향촌자치기구였던 서원이 각 지역에 설치 운영되면서 교육에 크게 영향을 주었다. 향교와 서원은 모두 유생에게 유학을 가르치는 강학기능과 선현과 충절인에 제사하는 기능을 중시 여겨 이에 필요한 시설을 갖추었으며, 조선시대 지방의 문화적.사회교화적 역할을 담당한 교육기관이었다. <출처:부산박물관>

안락서원과 동래향교
동래향교와 안락서원은 부산의 대표적인 교육기관이었다. 각 지방의 향교와 같이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1605년(선조38) 창건된 동래향교도 지방재정에 의해 설치운영된 교육기관이었다. 성현을 제사지내는 대성전, 동.서무와 강당인 명륜당, 유생들이 기거하는 동.서재로 구성되어 있다. 동래향교의 운영책임자는 동래부사로 매월 유생들의 학업평가를 감사에게 보고하였으며, 종6품의 교수 1명을 비롯한 약간 명의 임원과 정원 70명의 학생들이 있었다. 사립교육기관인 안락서원은 1652년(효종3) 동래부사 윤문거가 임진왜란 때 순절한 송상현공을 향사하던 충렬사를 안락리로 이전하면서 강당.동재.서재를 같이 지어 안락서원이라 이름한데서 비롯되었다. 이후 여러 임란 순절열사들과 다대진 첨사 윤홍신을 합향하였다. <출처:부산박물관>


안락서원재임천망단자(조선), 동래향교장의 천망단자(조선 1900년)


문과급제교지, 조선 17세기


논어, 소학, 대학언해, 명심보감초


경통


문방사우, 조선 17~19세기, 청화백자산수문연적, 청화백자만자문연적, 분청사기필세, 벼루, 붓, 필통, 서판

부산지역의 생활유적
조선시대는 신분에 따라 사람들의 생활문화도 달랐다. 두구동 임석과 기장 동부리에서는 관아시설과 양반마을에 공급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기와가마가 조사되었고, 부산의 곳곳에서 도자기 가마터가 확인되었다. 최근에 동래 복천동과 오륜대유적 등에서 마을을 보호하는 시설물로 추정되는 도랑이 조사되기도 하였다. 평민들은 땅을 약간 파고 기둥을 세우고 볏집이나 풀입으로 지붕을 덮은 초가에서 생활하면서 농사일과 생활에 필요한 여러가지 도구를 직접 만들어 사용하였다. 집 뒤에는 도랑을 파서 빗물을 바깥으로 흘러내리도록 하고, 집을 짓고, 집 가까이에 구덩이를 파서 쓰레기를 버렸다. <출처:부산박물관>


분청사기대접, 백자대접,


백자접시, 오륜대출토유물, 조선 16~17세기


장도


염주 도지미, 염주,  조선 14~15세기, 기장 상장안 유적


범어사명 유제시루, 조선 1664년. 이 시루는 범어사에서 제작 사용된 것으로 아라리 아래에 2~3자씩 점으로 찍어 내려 쓴 총 187자의 명문이 있다. 글의 내용은 경상도 동래 북령금정산범어사에서 54인의 시주자와 불사를 맡은 5~6인의 연화자, 불사의 예물을 담당한 별좌의 이름과 1664년 6월에 무게 삼백근으로 주조되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조선시대 도자기
조선의 도자기는 분청사기와 백자로 나뉜다. 조선초기부터 16세기 중엽까지 민요에서 생산되었던 분청사기는 고려 말 상감청자가 퇴화되면서 나타난 것으로, 그릇 표면을 백토로 분장한 후 회청색의 유약을 입혀 구운 것이다. 장식기법의 종류에 따라서 상감, 인화, 박지, 철화, 귀얄, 덤벙 등 다양하다. 그 중 인화분청은 관사명이 많이 남아 있어 제작시기와 각 지역 분청사기의 특징을 파악하는 데 중요하다. 백자는 조선시대 전기간에 걸쳐 꾸준히 제작되었으며, 그림의 안료나 제작기법에 따라 소문, 상감, 철화, 청화, 동화 등으로 나뉜다. 세종 연간(1418~1450)에는 중국왕실에서 요구할 정도로 매우 정교하였다. 세조 연간(1455~1468)에는 서민들도 백자를 사용할 정도로 보편화되었다. 조선후기에는 도자기 제작을 국가가 주도하여 경기도 광주 일대에 위치한 사옹원 분원을 중심으로 백자가 활발히 제작되었다. <출처:부산박물관>


분청사기철화삼엽문푼주, 조선


백자청화산수문편병, 조선


분청사기 '경주장흥고'명 대접, 백자뚜껑, 분청사기 인화문 접시, 조선 14~15세기, 기장 상장안 유적


분청사기 '울산인수부'명 접시, 분청사기 '관중_'명 대접, 조선 14~15세기, 기장 상장안 유적

조선시대 부산의 매장문화
조선시대의 민묘는 평민이 사용한 널을 안치하는 널무덤과 움무덤, 양반계층들이사용하는 회덧널을 아치하는 회덧널무덤으로 나뉜다. 움무덤이나 널무덤의 경우는 직사각형의 묘구덩이 벽면에 별도의 공간인 감실을 만들어 명기를 묻은 후 봉분을 만드는 형태이다. 부산지역의 민묘에서 출토된 명기로는 분청사기.백자.청동제 수자와 뚜껑그릇 등이 있다. 간혹 가위.반지.유리구슬.수정구슬 등의 장신구도 출토된다. 남산동.덕천동.망미동.기장 교리 유적 등이 있다. <출처:부산박물관>


청동합, 청동숟가락, 기장 교리 유적 출토유물


구슬, 원풍통보, 지원통보


백자접시, 백자바리


명기, 조선 16~17세기, 해운대좌동유적


백자마형명기, 백자철화인물형명기, 조선 17세기


백자청화 영의정 김수항 묘지, 조선 1699년. 각형의 도자기판에 청화안료로 글씨를 쓴 백자청화묘지이다. 조선중기 문신인 영의정 김수항(1629~1689)의 지석으로, 제1편~7편까지는 김수항에 대한 것으로 우암 송시열이 찬술하였고, 제8편~9편은 부인 최씨에 대한 것으로 아들 김창집이 찬술하였다. 마지막에 '숭정기원칠십이년육월일번조'라는 글이 있어 이것이 1699년에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출처:부산박물관>


분청사기 우점문 대접, 조선 15~16세기, 남산동유적


분청사기 '양산'명대접, 조선 15~16세기, 덕천동 유적


숟가락, 청동젓가락, 청동그릇, 지사동유적 출토유물, 조선 15~16세기


동래 해운대,
동래 태종대, 동래 몰운대, 정황, 종이에 담채, 조선시대 18세기, 간송미술관 소장


이덕성이 친우 등에게서 받은 송별시첩(동래별장첩), 보물 1501호, 1688년(숙종14) 1월 초에 이덕성이 동래부사로 나가게 되어을 때 친우 47명과 조카명으로부터 받은 송별시를 모은 첩으로, 건.곤 2첩으로 되어 있다. 건첩에는 남용익 등 27명의 송별시가 실려 있고 곤첩에는 이진안 등 24명의 송별시가 실려 있다. <출처:부산박물관>


이덕성 초상, 보물 1501호, 1688년(숙종14) 1월부터 1689년(숙종15) 4월까지 동래부사를 지낸 반곡 이덕성 선생의 초상이다. 높은 오사모에 녹색 단령을 입고 좌안칠분면의 자세로 교의에 앉은 모습이며 배경은 없다. '완산(전주) 사람으로 호는 반곡이며 을미년(1655, 효종6)에 출생하여 갑신년(1704, 숙종30)에 사명하였으며, 42세 때의 진영이다.'라는 화제가 적혀 있다. 얼굴은 가는 선묘를 사용했으며 홍조를 표현하고 명암을 살짝 가했다. 육리문은 없으며 수염이 길고 구불거리게 묘사되어 있다. 비교적 가늘고 짙은 먹선으로 윤곽과 의습선을 표현하였고 명암을 조금씩 가했다. 쌍학흉배는 밝은 녹색 바탕에 단정학과 오색구름을 세필로 화려하게 그렸고, 삽화금대도 정교하게 묘사하였다. 짙은 먹으로 묘사된 교의를 덮고 있는 표범가죽은 가늘고 구불구불한 선으로 사실적으로 그렸다. 정형화된 공신도상으로부터 보다 자연스러운 형식으로 변모해가던 18세기 초엽의 정교한 작품으로 당시 초상화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출처:부산박물관>


이덕성 초상 중 얼굴


동래고지도(19세기), 
동래부지도(1873)


기장지도,  금정산성진지도, 조선, 18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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