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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조선 유적_왕릉

파주 심지원묘 및 신도비, 조선시대 최대.최장의 소송이 있었던 역사의 현장

younghwan 2014. 1. 6.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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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주시 광탄면 분수리에 있는 조선후기 문신인 심지원(1539~1662)의 묘이다. 이 무덤은 조선시대 최대이자 최장이었던 소송의 주인공으로 고려시대 여진을 정벌한 윤관장군의 묘와 같은 위치에 있었으나 최근에 양쪽 집안간에 화해가 이루어져 현재의 위치로 무덤을 옮겼다고 한다. 심지원은 조선중기 인조.효종대에 활동한 문신으로 병자호란 큰 공을 세우지 못하고 여러가지 문제가 있어 벼슬길에 나가지 못하다가 인조 21년에 복직되어 효종대에는 벼슬이 영의정에 오른 인물이다.

 산송(山訟), 무덤의 조성과 관련 소송을 일컫는 말로 조선시대 풍수지리설이 일반인에게 널리 유행하면서 명당을 둘러싼 소송이 빈번하였다. 산송은 풍수지리상 명당으로 알려진 다른 사람 또는 집안의 묘역을 침범하면서 많이 발생했는데, 처음에는 지역의 유력간 집안간에 다툼이 있는 경우가 많았으나 후대에는 신분이 낮은 농민, 천민들까지 관아에 소송을 올릴 정도로 중요하게 여겨졌다. 조선시대 무덤을 파헤치는 것은 살인과 같은 정도 중대한 범죄로 여겼기때문에 일단 다른 사람이나 집안의 선산이나 묘역에 시신을 묻기만 하면 이를 처리하기가 상당히 어려웠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조선시대 지방 관아의 수령이 해결해야 할 민원중 가장 골치 아픈 부분이 산송이었다고 한다.

 이곳에는 원래 고려때 여진을 정벌한 윤관 장군의 묘역이 있었던 자리인데, 조선시대에 후손들이 그 위치를 잃었버렸다가 조선후기에 그 위치를 다시 찾게되었는데 그 자리에는 조선중기 인조.효종대에 영의정까지 벼슬을 지낸 심지원을 비롯하여 청송심씨의 선산이 조성되어 있었다. 윤관은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인물로 그의 명성과 평가는 조선시대에도 상당히 높았던 것으로 보이며 윤관의 후손인 파평윤씨는 왕비를 4명씩이나 배출한 집안이었고, 심지원 또한 벼슬이 영의정까지 지낸 당대의 뛰어난 문신이었고 심씨집안 또한 세종대왕의 외가로 왕비를 3명이나 배출한 유력가문이었다. 윤관장군 묘역에 대한 산송은 이곳을 관할하던 고양군수가 해결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으며, 영조가 직접 양쪽 집안에 화해를 촉구하였으나 양쪽집안에서 이에 반발하다 곤장에 맞아 죽는 인물이 발생하는 등 불화가 깊어졌으며, 지금도 청송심씨 쪽 무덤이 비석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두 집안간의 산송은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에서 해결하지 못하다가 21세기인 2006년에 양집안간에 화해를 하여 심지원의 묘가 동쪽편으로 이장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심지원묘 및 신도비
조선후기의 문신인 만사 심지원(1593~1662)의 묘이다. 광해군12년(1620) 정시문과에 급제한 후 남인과 북인의 당파싸움이 일어나자 고향에 내려가 숨어 지냈다고 한다. 1623년 인조 반정 때 관직에 복귀했으며 인조8년(1630) 함경도 안찰어사로 파견되어 밀무역을 단속하였다. 6진의 방어 대책을 인조에게 제시하여 신임을 얻었으나, 병자호란 당시 왕을 잘 모시지 못하고 강화도가 함락되는 등 여러 가지가 문제되어 벼슬길이 막히게 되었다. 인조21년(1658)에 그의 억울함이 용서되어 홍주부사로 복직하였고 그후 여러 관직을 거쳐 효종9년(1658)에는 영의정에 올랐다. 봉부인은 전부인 안동 권씨와 후부인 해평 윤씨와의 합장묘이다. 봉분 앞에 묘비와 향로석이 좌우에는 망주석이(멀리서도 무덤이 있음을 알려주는 돌기둥)과 문인석 1쌍씩 배치되어 있다. 묘역 아래에는 김수항이 글을 짓고 신익상이 글씨를 쓴 신도비(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 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운비)가 있는데 숙종 12년(1686)에 세운 것이다. <출처:파주시청>


파주시 광탄면 분수리에 소재한 조선중기 영의정을 지낸 심지원의 묘. 원래 윤관장군 묘소 뒷편에 있었으나 400여년에 걸친 치열한 산송(山訟)의 결과 최근에 양쪽집안이 화해를 하면서 원래의 위치에서 약간 떨어진 곳으로 옮겨졌다.


원래 심지원의 묘와 신도비가 세워져 있던 윤관장군 묘소. 심지원의 묘는 무덤 뒷쪽편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양쪽 집안간 갈등이 워낙 심해서, 뒷편에 있는 심지원의 묘를 막기 위해 높은 담장을 세워 놓고 있다.


윤관장군 묘역은 실제로 청송심씨가 선산을 마련했던 곳으로 지금도 동쪽편에는 여러기의 청송심씨 묘역이 남아 있다.


원래 윤관장군 무덤 옆에 세워져 있다가 최근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진 심지원 신도비


양쪽 집안간의 치열한 갈등의 역사를 보여주는 것으로 보이는 훼손된 비석들


청송심씨 집안의 묘소들


윤관장군 묘역과 청송심씨 선산이 있는 파주시 광탄면 분수리 일대. 멀지 않는 곳에 파주 용미리석불과 고려시대 사찰이자 숙박시설이었던 혜음원지가 있다.


윤관장군 묘역


윤관장군 묘역 앞을 지나가는 도로. 이 길은 파주에서 혜음원을 거쳐 벽제관으로 연결되는 조선시대에는 1번국도에 해당하는 중요한 길이었으며, 중국을 오가는 사신들이 이길을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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