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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곽(산성_읍성)

서울 북한산성, 북한산을 둘러싸고 있는 성

younghwan 2010. 9. 24.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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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산성에는 지금은 고양시쪽 입구에만 일부 주민이 거주하고 있고, 남쪽의 대남문은 아주 높은 지대에 성문이 있다. 북한산성 성벽을 따라서 서울의 경치를 감상할 수 있으며, 삼국시대 한강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유용했으나 고려시대 이후에는 군사적으로는 별로 유용성을 보여주지 못한것 같아 보인다.

☞ 북한산성 주요 유적지
 1. 대남문, 청수동 암문, 문수봉,            2. 성벽을 따라 걷는 대성문, 대동문
 3. 북한산 계곡에 자리잡은 중성문,       4. 진흥왕순수비가 있었던 비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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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성의 남문인 대남문입니다. 문수봉 아래 구기동으로 가는 고갯길을 막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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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비봉 근처에서 바라본 대남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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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 동쪽의 대동문 주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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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성의 정문격인 대서문의 취약함을 보완하기 위해 계곡 한가운데 세운 중성문




 북한산성이란 이름은 삼국사기에 132년(백제 개로왕5)에 이미 나타나고 있고, 신라는 이곳의 비봉에 진흥왕이 순수비를 세우기도 하였다. 603년에는 고구려 장군 고승이 북한산성을 포위 공격하자 왕이 10,000명의 군사로 구원한 기록이 있고, 661년에는 고구려의 장군 뇌음신이 말갈군과 함께 북한산성을 20여일간 포위 공격하자 성주이던 동타천(冬陀川)이 성안의 주민 2,800명으로 필사의 결전으로 물리친 기록이 있다. 특히 이 전투는 신라가 백제를 멸망시키고 백제부흥군의 도전을 받고 있던 때이므로 만약 고구려에게 함락되었다면 삼국 통일 계획에 큰 변화를 초래하였을 것이다. 이 전공으로 성주 동타천은 대사에서 대나마(제10관등)로 승급되었다. 11세기 초 거란의 침입이 있자 고려 현종은 고려 태조의 재궁을 옮겨오고 증축하였다. 1232년 이곳에서 몽고군과의 격전이 있었고, 1387년에도 개축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의 외침을 자주 당하자 도성의 외곽 산성으로 축성론이 일어나 1659년 송시열(宋時烈)에게 명하여 수축하게 하고, 1711년왕명으로 대대적인 축성 공사를 하여 둘레 7,620보의 석성이 완성되었다. 성의 규모는 대서문(大西門)·동북문(東北門)·북문(北門) 등 3개의 성문과 10개의 암문(暗門), 그리고 시단봉위의 동장대(東將臺)·나한봉(羅漢峰) 동북에 남장대·중성문(中城門) 서북에 북장대가 있었다. 성은 다시 중성(中城)을 만들었으며, 처음엔 경리청(을 두었다가 1747년에는 총융청에 속하여 관리되었다. 또한 이듬해에는 상원봉 아래에 130칸의 행궁과 140칸의 군창(軍倉)을 지은 바 있다. 성내에는 승군을 위한 136칸의 중흥사(重興寺)가 승군 총섭이 있는 곳이었고, 이 밖에도 11개의 사찰과 2개의 암자가 있었다. 성 안에는 8개소의 창고가 있었으며, 99개소의 우물과 26개소의 저수지가 있었다. 현재의 북한산성에는 삼국시대의 토성이 약간 남아 있기는 하나 대개 조선 숙종 때 쌓은 것으로 성곽의 여장은 허물어 졌으나, 현재 대서문(大西門)이 남아 있고 장대지(將臺址)·우물터·건물터로 추정되는 방어 시설의 일부가 있다. 성벽은 아직도 잘 남아 있는 부분이 많다. <출처: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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