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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조선 유적_왕릉

여주 영릉(사적 195호), 세종대왕과 소헌왕후 합장릉

younghwan 2013. 4. 27. 2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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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주 영릉은 조선 4대 임금 세종과 정비 소헌왕후의 능으로, 조선시대 최초의 합장릉이다. 1469년 여주로 이장하면서 세조 때 만들고 예종 때 선포된 『국조오례의』에 따라 병풍석과 석실제도를 폐지하고 회격으로 하는 조선 전기 능제의 기본을 이루었다. 능의 석물은 난간석에서 영저(靈杵), 영탁(靈鐸), 지초문양(芝草紋樣)을 배제하고 구름 문양과 십이지신상만 조각해 조선 왕릉 난간석의 기본을 확정하였으며, 혼유석을 받치는 북모양의 석물인 고석을 기존의 5개에서 4개로 줄였다. 또한 기존의 왕릉에는 난간석에 십이지신상을 조각하여 방위를 표시하였는데, 영릉은 이를 간소화하여 십이지간 문자로 표현하였다.입지를 보자면 풍수사상에 따라 주산을 뒤로 하고 산의 중허리에 봉분을 조영했으며, 좌우측에는 청룡, 백호를 이루고 남쪽으로는 멀리 안산인 북성산을 바라보고 있다. 

 세종대왕 영릉은 경기도 여주에 자리잡고 있다. 우리 모두가 스승이라고 생각하는 세종대왕의 능을 방문하는 것 자체가 의미가 있다. 여주 영릉내에는 세종의 업적을 기리는 여러가지 전시품들이 복원 전시되어 있는데 특히 과학사적인 업적을 중심으로 전시되어 있어 어린 학생들에게는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된다. 여주 IC에서 가까운 곳에 자리하고 있어 서울에서 당일로 다녀올 수 있는 곳이다. 현재의 여주 영릉은 1970년대 이곳을 성역화하면서 크게 정비하였는데, 다른 왕릉에 비해서 깨끗한 편이지만, 일부는 원래의 모습과는 약간 동떨어진 면이 있기도 하다.

여주 세종대왕.소헌왕후 영릉, 사적 195호,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
영릉은 세종대왕과 소헌왕후를 합장한 능이다. 세종대왕은 조선조 제4대 왕으로 1418년 왕위에 올라 1450년 승하하니 재위 32년에 춘추가 54세였다. 세종대왕은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성군으로 한글(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록)을 창제하고 측우기, 혼천의, 해시계 등 과학기구를 발명하고 제작하였다. 아악을 정립하고 북방의 야인을 정벌하고 4군과 6진을 개설하여 우리나라의 국경선을 압록강과 두만강으로 확정하였으며, 일본 대마도(쓰시마)를 정벌하여 국방을 튼튼히 하였다. 학문을 숭상하여 학자를 기르고 활자를 개량하여 월인천강지곡, 용비어천가, 농사직석, 삼강행실도, 팔도지리지, 석보상절, 의방유취 등 수많은 책을 발간하였다. 또한, 농업을 장려하고 백성을 사랑하였으며, 어진 성덕이 하늘같이 높았다. 영릉은 원래 서울 헌릉 서쪽에 있었던 것을 예종 원년(1469)에 여주로 옮겨왔다. 세종대왕의 위대한 업적을 길이 숭보하고 그 위업을 오늘에 이어 받아 민족문화 창조의 기틀로 삼고자 1975년부터 1977년까지 새로 짓고 경역을 정비하여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갖추었다. <출처:여주군청>


여주 영릉은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합장릉이다. 원래 서울 헌인릉 근처에 있던 것을 세조때 이장을 추진하여 예종 원년에 이곳 여주로 옮겼다.


2008년 여름


영릉 입구 훈인문.


영릉 들어가는 길. 1970년대 이곳을 정비하면서 석재로 길을 깔아 놓고 있다. 원래 흙길로 되어 있는 다른 왕릉과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왕릉입구의 작은 연못. 주위에 소나무를 심어 놓고 있다. 원래는 '천원지방,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 의미로 가운데 둥근 섬이 있어야 하지만, 형식을 따르지 않고 있다.


영릉 전경


금천교. 능 앞으로 흐르는 개울을 높이 일컬어 어구 또는 금천이라 하고 여기에 놓인 다리를 금천교라 한다. 금천교는 주로 능역의 수계가 맞닿는 홍살문 앞에 설치한다. 금천교는 그 안쪽이 바깥쪽과 구별되는 특별한 영역, 즉 임금의 혼령이 머무는 신성한 영역임을 나타내기 위한 것으로 풍수지리설의 배산임수의 의미 또한 지니고 있다. 이에 따르면 물은 산으로부터 흘러온 땅의 기운이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이 금천교는 1930년대까지는 남아 있었으나 그 후 훼손되어 없어진 것을 발굴하여 2008년 5월 복원한 것이다. <출처:여주군청>


왕릉 입구임을 말해주는 홍살문. 70년대 정비하면서 새로 세운 것으로 보인다.


홍살문에서 제사를 올리는 장소인 정자각까지 이어지는 참도. 박석 형태로 깔아 놓기는 했지만, 일반적인 왕릉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원래 왕릉 참도는 혼령이 지나는 신도와 제주(국왕)이 지나는 어도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곳은 3개의 길로 구성되어 있다.


제사를 올리는 정자각 주변. 세종대왕 영릉은 다른 왕릉과는 달리 주말이면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많은 곳이다.


정자각, 제례 때 제무을 진설(차림)하고 제례를 드리던 집이다. 위에서 보면 건물이 '丁'자 모양을 하고 있어 정자각이라 부른다. 동쪽과 서쪽에 오르는 층계가 있는데 이는 원래 제례의식이 동입서출로 진행됨을 의미한다. 뒷벽의 중앙칸에 달린 문짝은 제례를 드릴 때 열어 놓게 되어 있으며 뒤편 서쪽에는 제문을 태우는 자리가 마련되어 있다. <출처:여주군청>


정자각 월대를 오르는 계단


정자각 월대 위


정자각 추녀마루 잡상


2008년 여름


2013년 봄


수복방, 제기를 보관하거나 수릉관(능을 지키는 관리) 또는 수복(청소하는 일을 맡아보던 일종의 관노비)이 거처하던 곳이다. 터만 남아 있던 것을 발굴하여 1977년 원형대로 복원하였다.


수라간, 산릉제례 때 제례음식을 데우고 준비하던 곳이다. 주초석만 남아 있던 것을 1977년 옛 모습을 찾아 복원하였다.


영릉 비각


영릉비. 세종대왕릉은 원래 헌릉 서쪽 산줄기에 있었는데 예종 원년(1469)에 이곳으로 천장하였으며, 왕비 소헌왕후가 합장되어 있다. 영릉비는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약력, 그리고 영릉을 옮긴 사실을 기록한 비석으로 영조 21년(1745)에 세웠고, 비각도 이때에 건조되었다. <출처:여주군청>


서울 청량리 세종대왕기념관에 있는 헌.인릉 부근 원래 세종대왕 능에 있던 신도비. 세조대 이후 왕릉 조성을 간소화하면서 신도비를 세우지 않았는데, 이때 신도비를 땅에 묻었다고 한다.


예감, 정자각 뒤의 서쪽에 있는 사각형의 석합으로 제례가 끝난 뒤 철상(제례음식을 치움) 하면서 축문을 여기에 태워 묻었다.


봉분이 있는 능침공간으로 오르는 길. 조선왕릉은 능침공간을 일반인에게 개방하지 않고 있지만, 세종대왕 영릉을 비롯하여 업적이 많고 후대에 존경을 받는 왕의 능은 일반인들이 가까이서 살펴볼 수 있도록 개방하고 있다.


봉분이 있는 언덕에서 내려다 본 정자각 주변 제향.전이 공간.


세종대왕.소헌왕후 영릉은 하나에 봉분에 합장한 합장릉이다.


2008년 여름


왕릉을 지키는 석물 중 문.무석인


석양. 석마


망주석과 장명등, 망주석은 혼유석 좌.우에 세우는 한쌍의 팔각돌기둥으로 무덤을 수호하는 역할을 한다. 장명등은 사찰의 석등과 마찬가지로 불을 밝히는 역할을 한다.


봉분을 둘러싸고 있는 난간석


서울 청량리 세종대왕기념관 마당에 전시된 헌.인릉 부근 원래의 세종대왕 능에 있던 석물들


봉분을 둘러싸고 있는 담장인 곡장


세종대왕 영릉에서 뒷편 효종 영릉으로 연결되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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