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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Egypt)

[룩소르 신전(Luxor Temple)] 아멘호테프3세의 탑문, 람세스2세 석상

younghwan 2010. 1. 9.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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룩소르 신전 첫번째 탑문을 통과해서 람세스2세의 안뜰을 지나면, 두번째 탑문을 볼 수 있고 그 앞에는 람세스 2세의 두개의 석상을 볼 수 있다. 아마도 이 탑문은 아멘호테프 3세때 세워졌으며, 후대인 람세스 2세때 자신의 석상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

두번째 탑문을 지키고 앉아 있는 람세스2세 석상

두개의 석상 중 서쪽편 석상은 얼굴을 포함하여 형상이 온전하게 남아 있고, 동쪽편 석상은 얼굴이 파괴되어 있다. 화강암으로 석상을 만들어서 아주 튼튼해 보인다. 군주의 오른쪽 무릎에 등을 기댄 그의 아내 네페르타리는 '카'를 활성화시키는 역할을 하는 위해한 하토르 여사제의 옷을 걸치고 있다.

석상 아래에 새겨진 기록들과 부조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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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세스 안뜰을 나서려면 아멘호테프3세의 탑문의 문틀 구실을 하는 람세스2세의 두 대형 석상을 지나게 된다. 받침돌에는 전쟁에 패한 적들의 결박된 모습이 그려져있다. 군주의 오른쪽 무릎에 등을 기댄 그의 아내 네페르타리는 '카'를 활성화시키는 역할을 하는 위해한 하토르 여사제의 옷을 걸치고 있다. <출처;크리스티앙 자크와 함께하는 이집트 여행, 문학세계사>

아멘호테프3세 (BC 1390~1353 재위).
 이집트가 번영을 누리며 평화를 향유하던 시대에 외교관계를 확대하고 이집트와 누비아에 거대한 건물들을 세우는 데 힘을 기울였다. 아멘호테프 3세는 재위 5년째에 이집트의 최남단 아쿠야타라 불리는 지역에 대해 군사작전을 벌였다. 그 뒤 나일 삼각주에서 일어난 약간의 소요를 제외하고 그의 통치시대는 평화로웠다. 이 소요는 하푸의 아들이며 왕의 가장 뛰어난 관리인 아멘호테프가 육상과 해상으로 조심스레 이집트로 접근해 들어와 진압했다. 그는 젊은 시절을 아버지인 투트모세 4세와 할아버지인 아멘호테프 2세처럼 사냥을 하며 보냈으며, 자신이 세운 공적을 널리 알려 기념하기 위해 2번에 걸쳐 커다란 스카라베(고대 이집트인이 사용한 왕쇠똥구리 모양의 부적)를 만들었다. 아멘호테프는 집권 초기에 평민 출신이지만 명석하고 능력 있는 여성인 티이와 혼인했다. 정비(正妃)가 된 티이는 뒷날 개혁군주가 된 아크나톤을 낳았다. 재위 11년째에 그는 룩소르의 북쪽 160㎞ 떨어진 티이의 고향 마을인 아흐밈 근처에 거대한 인공연못을 파게 했다. 그는 하푸의 아들 아멘호테프의 재능을 이용해 대대적인 건설사업을 벌였다. 여기에는 장제전(지금은 왕의 거대한 동상만이 남아 있음)을 세우고 누비아에 대규모의 신전을 세우는 계획도 포함되어 있었다. 고대 테베 지역에서는 룩소르 신전의 주요부분을 완성했으며 카르나크의 신전에는 탑문을 새로 세웠다. 또한 멤피스에도 많은 건물을 세웠다. 그는 당시 다른 강국들과 외교문제에 대해 활발히 서신을 교환했다. 이 사실은 그와 아크나톤 왕이 주고받았던 외교문서들을 모아놓은 '아마르나 서한'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 문서들은 이집트가 황금을 가지고 아시아로부터 말·구리·청금석(靑金石)을 사들였다는 사실도 알려주고 있다. 이외에도 아멘호테프는 동맹을 강화하기 위해 미탄니(시리아 북부 유프라테스 강가에 있던 강력한 왕국) 및 바빌로니아의 왕녀와 정략결혼을 했으며 히타이트 왕국의 공주와도 정략결혼을 시도했다. 그의 외교서신은 아시리아와 키프로스를 비롯해 이집트의 지배를 받고 있던 시리아의 여러 봉신들에게도 보내졌다. 통치 말기에 병이 들었을 때는 미탄니의 지배자인 투시라타가 그의 치료를 위해 신의 조각상을 이집트로 보낸 일이 있다. 말년에는 왕비인 티이가 정치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아멘호테프가 죽은 후 티이는 투시라타와 직접 서신을 교환하기까지 했다. <출처:브리태니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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