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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박물관

[김해박물관] 가야인의 생활도구, 장신구, 제철

younghwan 2012. 4. 19.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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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야에서도 신라와 마찬가지로 많은 장신구들이 출토되고 있는데,그 양에 있어서는 신라에 비해서 많지 않은편이다. 가야지역에는 고령 지역과 부산 복천동에서 금관과 금동관이 출토되고 있는데, 이는 가야 독자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신랑의 영향을 받은 5세기 경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가야에서는 원래 금은 등 금속장신구보다는 유리구슬로 만든 장신구를 선호했던 것으로 보이며, 이는 중국문헌에 가야인을 설명하면서 이런 특징을 기술하고 있다고 한다. 금속제 장신구 또한 비교적 늦은 시기에 신라와 교류를 하면서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가야는 철을 기반으로 한.중.일 해상무역을 통해 발전한 세력으로 금속제 장신구등은 많이 출토되지 않는데 비해서 철기로 만든 다양한 무기들이  가야 고분들에서 많이 출토되고 있다. 가야는 철의 산지로서 낙동강을 통해 철을 교역하면서 경제력을 축적하였는데, 철의 생산하는 제련기술 뿐만아니라 철을 가공하는 기술 또한 상당히 높은 수준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이는 가야의 화려하면서도 세련된 판금갑옷과 무기류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장신구
가야의 장신구는 수정.호박.마노 등의 보석광물과 함께 유리.금속을 이용하여 만들었다. 화려한 장신구는 미적인 목적과 함께, 사용한 사람의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역할도 하였다. 3세기대의 기록인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진변한 사람들은 금은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구슬을 꿰어 보배로 삼는다'는 기록이 있다. 실제로 1~3세기대에는 구슬을 이용한 장신구가 많이 출토되며, 금이나 은으로 만든 장신구는 6세기 중엽 이후에 많아 진다. <출처:김해박물관>


금동관(Gilt-bronze crown), 5세기 전반으로 편년되는 부산 복천동 10.11호묘에서 출토된 것이다. 정면과 좌우 측면에 나뭇가지모양의 세움장식이 하나씩 있는데 신라의 영향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팔찌(Bracelets), 경남지역


목걸이(Necklaces,경남지역), 토제목걸이(Clay Necklaces, 울산 중산리) 선사시대에는 동물의 이빨이나 돌 등을 매달아 목걸이로 사용하였으며 삼국시대에는 옥이나 유리, 금속으로 재질이 변하게 된다. 가야의 목걸이는 주로 수정, 유리, 마노, 호박 등이 사용되었다.


목걸이, 경남지역


곱은옥(Comma-shaped Jade), 목걸이나 가슴걸이, 구걸이 등의 부속 장신구로, 머리부분에 구멍을 뚫어 금실이나 가죽끈으로 엮어 사용하였다. 주로 옥, 유리, 수정을 이용하여 만들었지만, 흙이나 금으로 만들어진 것도 있다.


수정(Crystal), 수정은 투명한 광물질로 빛이 곱고 아름다워서 장신구 재료로 많이 이용되었다. 변한과 가야에서는 수정을 곱은옥이나 주판알모양으로 가공하여 목걸이를 만드는데 많이 사용하였다.


이형철기(Sungular iron implement), 밀양 교동


청동거울(Bronze mirror), 밀양 교동


귀걸이(Earing), 함양 평정리, 전 거창, 창원 다호리, 함안 도항리,


귀걸이(Earing), 합천 옥전, 건 거창. 가야의 귀걸이는 중심고리가 가늘고, 긴 사슬 끝에 펜촉이나 공모양의 드리개를 매단 것이 대표적이다. 신라의 귀걸이에 비해 중심고리 아래의 장식구성이 규칙적이지 않고 다양한 것이 특징이다.


금관.꾸미개(Gold crown & accesories, 복제품), 전 고령

철의 역사
인류는 처음에 화산의 분출물인 자연상태의 운철을 두드려 사용하였다(기원전 3,100년 무렵), 중국에서는 기원전 1,400년 무렵 운철로 청동도끼의 날을 만들면서 철의 사용이 시작되었다. 춘추시대 이후 철기 제작이 본격화되어, 전국시대와 한대를 거치면서 더욱 발전하였다. 우리나라는 전국시대 연나라의 영향을 받아 기원전 3세기대에 철기시대로 돌입하였다. <출처:김해박물관>

가야의 제철
김해라는 지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가야의 성장 기반은 바로 '철'이었다. 고대사회에서 철생산과 그에 따른 철기의 보급은 사회를 변화시키는 원동력이었으며, 무덤에서 나오는 다량의 철제품이 그것을 증명한다. 철광석에서 철을 뽑아내는 제련을 비롯하여 철기를 제작하는 주조.단조기술은 고성패총, 부산 복천동 유적 등지에서 발견되는 단야유구, 집게, 모룻돌, 망치 등을 보아 상당한 수준에 올라섰음을 알 수 있다. <출처:김해박물관>


덩이쇠(Iron plate, 함안 도항리),


쇠도끼(Iron axes, 경남지역), 쇠집게(Iron Tongs, 합천 옥전)


철찌꺼기(Stags), 제련로벽체편, 송풍관(Ventilation Tubular), 밀양 사촌, 철광석

철기는 어떤 방법으로 만들었을까?
철기는 아주 까다로운 공정을 거쳐 만들어집니다. 먼저 쇠를 많이 가진 철광석을 캡니다. 철광석을 높은 온도에 가열하여 쇠성분을 뽑아냅니다. 뽑아낸 쇠를 다시 녹여 질이 좋은 쇠를 만듭니다. 이 쇠로 철기를 만드는 데에는 두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거푸집에 솟물을 부어서 여러가지 모양의 철기를 만드는 방법과 쇠망치로 두드려서 원하는 철기를 만드는 방법입니다. 솥과 같이 비교적 큰 철기들은 부어서 만드는 방법을 쓰고, 칼이나 낫과 같이 날이 선 철기는 두드려서 만드는 방법을 사용합니다. 가야는 이러한 철을 잘 다루는 나라여서 중국이나 일본으로 철을 수출하면서 나라의 힘을 키웠습니다. <출처:김해박물관>


가야인의 식생활
<삼국유사> 가락국기에는 가야가 성립될 당시 '밭을 갈아 곡식을 먹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중국 역사책인 <삼국지> 위서 동이전 변진조에 '토지가 비옥하여 오곡과 벼를 재배하기에 적합하다'는 기록으로 보아 농사가 화랄하게 행하여졌음을 엿볼 수 있다. 오곡 이외에 복숭아를 비롯한 과일과 채소도 재배하였다. 이외에 소.돼지를 비롯한 가축, 사냥한 멧돼지, 사슴, 야생에서 채집한 밤.도토리, 강이나 바다에서 잡은 물고기.조개 등도 가야 사람들의 주된 먹거리였다. <출처:김해박물관>

가야의 농기구
삼국시대가 되면 이전부터 이루어진 기술축적으로 인해 다양한 농기구가 만들어진다. 주요 농기구로는 괭이, 따비, 쇠스랑, 살포, 낫 등이 있다. 또 농사에 소를 사용하여 이전보다 농업생산력이 높아졌다. <출처:김해박물관>


살포(Iron spades), 논에 물꼬를 트거나 김을 맬때 사용하던 것으로 중국과 일본에는 잘 보이지 않는 한국 특유의 농기구라 할 만하다. 특히 수장층의 무덤에 부장되어 당시 논농사를 장악하고 통치했던 모습을 잘 보여 준다.


쇠도끼(Iron Axes) 외, 김해 대성동


쇠낫(Iron Sickle,경남지역), 굽은칼(Bent knife, 부산 복천동)


손칼자루(Antler-shaped handles), 부산 낙민동

삶은 고기와 찐밥
농사나 어로 등을 통해 얻어진 먹을거리는 날것으로 먹는 경우도 있지만, 보통 조리과정을 거쳐 섭취한다. 조리법으로는 굽기.삶기.찌기.데치기.띄우기(발효) 등이 있다. 가야인들은 찌거나 삶는 조리법을 많이 사용하였는데, 이와 관련된 것으로 시루와 솥이 있다. 시루는 아래에 구멍이 뚫려 있고 양쪽에 손잡이가 달려있는 형태를 하고 있다. 고온의 수증기가 구멍을 통해 시루 안의 음식물을 찌는 원리로 조리하는데, 물을 담아 끓이는 용기와 함께 사용한다. 솥은 가장 발달된 조리용기로 흙이나 쇠로 만들어졌지만, 가야지역에서는 주로 흙솥이 출토된다. 연질의 항아리나 단지는 삶는 조리에 사용되었으며, 조리과정에서 생긴 그을음이 토기표면에 남아 있는 것이 많다. <출처:김해박물관>


시루(Steamer pottery, 김해 부원동), 네모접시(Square bewls), 화덕모양토기(Funaced-shaped pottery), 구멍단지(Jar with hole, 함안 우거리)


시루(steamer pottery, 함안 우거리), 항아리(Jar with shert necked), 김해 봉황동


김해 회현리 패총
김해 회현리 패총은 1907년 이후 여러 번의 발굴조사가 이루어졌으며, 조사성과를 바탕으로 사적 2호로 지정되었다. 2001년 봉황대 유적과 함께 '김해 봉황동 유적'으로 확대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이 유적에서는 청동기시대의 고인돌, 가야인의 생활상을 알 수 있는 토기, 동물뼈, 조가비, 뼈조각품과 함께 '화천'이라고 불리는 중국 동전과 거울 조각, 일본 야요이토기 등이 출토되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불에 탄 쌀이 출토되어 벼농사의 기원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였다. <출처:김해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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