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 History Traveling

삼국시대 유적_고분

김해 수로왕릉(사적73호), 납릉으로도 불리는 금관가야 시조 수로왕의 무덤

younghwan 2012. 4. 17. 23:15
반응형


 김해시 도심 중심부에 위치한 가락국이라고도 불리는 금관가야의 시조 수로왕의 무덤인 사적 73호로 지정된 수로왕릉이다. 금관가야의 왕궁이 있었다고 하는 주거유적지인 봉황동유적지 북쭉편, 지배층의 무덤인 대성동고분군과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수로왕릉의 축조연대는 알려진 바가 없으나 고려문종대에 부분적으로 수리가 있었다고 선조대인 1580년(선조13)에 대대적으로 개축하였으며 인조대와 고종대와 숭전전을 비롯하여 사당과 제실건물들이 증축되었다고 한다.

 수로왕릉은 봉분의 높이가 약 5m로 신라의 고분이나 왕릉, 가야의 고분들에 비해서 봉분은 크지 않으며, 그 형식은 오히려 조선시대 왕릉에 가까워 보이는 무덤이다. 지봉유설 기록에 의하면 능의 구조는 큰 돌방무덤 형식을 하고 있으며, 일본인들이 이 무덤을 도굴하였는데 가야의 매장풍습이었던 순장의 흔적이 있었다고 한다. 현재의 수로왕릉은 후대에 새로 정비해서 그런지 조선왕릉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다. 입구에는 삼문형식으로 쌍어문과 파사석탑모양의 문양이 새겨진 납릉정문이 있고 능앞에는 돌로 세운 난간석이, 그 앞에 문인석.무인석, 석수들이 도열해 있는 형태이다. 수로왕릉은 우리나라 최대 성씨인 김해김씨의 시조로 조선왕릉에 비해서도 정비가 잘 되어 있고, 주변에는 18,000평의 왕릉공원과 신위를 모신 숭선전을 비롯하여 많은 전각들이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가락국 시조이자 우리나라 최대 성씨인 김해김씨 시조인 수로왕릉.


수로왕릉이 언제 조성되었는지는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임진왜란 당시 일본인들에 의해서 도굴되었을 때 가야의 매장풍습이었던 순장이 흔적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볼 때 전혀 근거가 없다고 볼 수는 없는 것 같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신라의 삼국통일에 크게 기여한 김유신대에 중국의 영향을 받아서 수로왕릉으로 성역화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수로왕릉 전경. 봉분의 높이는 그리 크지 않은 것으로 보이며, 조선시대 왕릉의 양식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봉분에는 둘레석을 세우지 않고 있으며, 전통적인 왕릉과는 달리 봉분 앞에 비석을 세워놓고 있다. 봉분 앞쪽에 '-'형으로 석재로 난간을 만들어 놓고 있으며, 그 안쪽에 문.무인석을 세워놓고 있다. 이는 조선시대에 수로왕릉을 정비하면서 기존의 조선왕릉과 약간 다른 형식을 취한 것으로 보인다.


수로왕릉 봉분 앞에 세워진 비석


왕릉을 지키는 문.무인석. 후대 왕릉의 양식을 반영하였다.


왕릉 앞에 세워진 석양을 비롯한 동물상


수로왕릉 출입문이라고 할 수 있는 삼문형식의 정문.


수로왕릉은 납릉이라고도 불리며, 정문에는 '납릉정문'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현판 양쪽으로는 사람들이 흥미로워하는 쌍어문과 파사석탑 모양이 그려져 있다.


담장너머로 보이는 수로왕릉. 주변 송림이 울창하다.


2009년 여름 수로왕릉


2012년 봄 수로왕릉



가락국(금관가야)의 시조이자 김해 김씨의 시조인 수로왕(재위 42∼199)의 무덤으로, 납릉이라고 부른다. 수로왕에 대한 이야기는 『삼국유사』「가락국기」에 전하고 있으나, 무덤이 정확히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무덤의 높이는 5m의 원형 봉토무덤인데, 주위 18,000여 평이 왕릉공원으로 되어 있다. 왕릉 구역 안에는 신위를 모신 숭선전과 안향각·전사청·제기고·납릉정문·숭재·동재·서재·신도비각·홍살문·숭화문 등의 건물들과 신도비·문무인석·마양호석·공적비 등의 석조물들이 있다. 고려 문종대까지는 비교적 능의 보존상태가 좋았으나, 조선 초기에는 많이 황폐했던 듯하다. 『세종실록』을 보면, 수로왕릉과 수로왕비릉에 대해 무덤을 중심으로 사방 30보에 보호구역을 표시하기 위한 돌을 세우고, 다시 세종 28년(1446)에는 사방 100보에 표석을 세워 보호구역을 넓힌 것으로 나타난다. 무덤이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선조 13년(1580) 수로왕의 후손인 허수가 수로왕비릉과 더불어 크게 정비작업을 마친 후이다. 『지봉유설』기록에 따른다면 능의 구조는 큰 돌방무덤(석실묘)으로 추정된다. 이 기록에는 임진왜란 때 일본인들에 의해 능이 도굴을 당했는데, 당시에 왕이 죽으면 주위에서 함께 생활하던 사람들을 같이 묻는 순장이 있었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출처:문화재청>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