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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_종묘

[덕수궁] 편전인 즉조당과 준명당, 석어당

younghwan 2012. 4. 23.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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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수궁 정전인 중화전 뒷편에는 편전에 해당하는 석어당, 즉조당과 준명당이 자리잡고 있다. 덕수궁이 구한말 국왕이 거처하는 정식 궁전으로 바뀌면서 많은 건물들이 새로 지어졌지만, 이 곳에 있는 석어당과 즉조당은  임진왜란 때 선조가 거처했던 전각들을 보존한 곳이다. 즉조당은 광해군과 인조가 왕위에 오른 곳이고, 석어당은 선조가 거처하다 승하한 유서깊은 건물이다. 덕수궁은 경복궁과는 달리 정전을 둘러싸고 있었던 행각이 남아 있지 않고, 즉조당 옆으로 서양식 건물이 석조전이 세워졌기때문에 다른 궁궐과는 달리 개방적인 느낌을 주고 있다. 

 편전 건물 중 석어당은 현존하는  유일의 목조 2층집으로 단청을 입히지 않아 소박한 살림집 같은 느낌을 주고 있는 건물로 임진왜란 당시 임시로 궁궐로 사용했던 건물 중 대부분은 1623년에 원 주인에게 돌려 주었으나, 즉조당과 함께 이 건물만은 보존하여 경운궁의 상징으로 삼았다. 즉조당 뒷편으로는 크지 않은 규모이지만 국왕 집무를 보던 공간인 즉조당과 준명당이 자리잡고 있으며 두 건물은 연결되어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세 건물은 1904년에 불에 탄 것을 같은 해에 다시 지은 것이라고 한다.



덕수궁 편전 건물 중 하나인 석어당.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거의 유일한 2층 건물로 임진왜란 후 불타버린 경복궁 대신 선조가 머물렀던 건물로 덕수궁이 궁으로 존재하게 해주는 중심 건물이다. 이 곳은 광해군이 인목대비를 유폐시킨 곳, 또한 광해군이 폐위되고 나서 무릎을 꿇었다고 해서 석어당이라고 이름 붙여진 곳이다. 그래서인지 건물자체에는 화려함을 느낄 수는 없고 소박한 기풍이 있는 건물이자 가장 눈에 띄는 건물이기도 하다.


석어당은 아래층은 앞면 8칸, 위층은 6칸을 하고 있는 굴도리집으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서쪽에 설치되어 있다. 이 건물은 2층 건물이면서도 단청을 하지 않고 민간 건물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어 소박하면서도 웅장한 느낌을 주고 있다.


옆쪽에서 본 석어당. 옆면은 아래층은 3칸, 위층은 1칸을 하고 있다. 위층 공간을 그리 넓지는 않으면서도 창문을 열고 사방을 살펴보기 좋은 곳이라 할 수 있다.


석어당 현판. 석어당 2층은 누각처럼 사용하였다고 한다. 2층은 사방에 문을 달아 놓고 있으며, 이 곳에 올러서면 사방이 한눈에 들어오는 구조를 하고 있다.


소박한 분위기를 주고 있는 석어당 문살


2012년 봄과 2010년 여름의 덕수궁 석어당.


석어당 마당 한쪽편에 우뚝 서 있는 고목

편전인 석어당은 덕수궁 내의 유일한 2층 건물로 원래의 석어당은 임진왜란 때 선조가 피난으로부터 환도하여 승하할 때까지 16년간 거처하였던 곳이며, 한때 인목대비가 유폐되었던 곳이다. 인목대비가 광해군을 이 건물 앞뜰에 꿇어앉혀 죄를 책한 곳이기도 하다. 아래층이 정면 8칸, 측면 3칸이고, 위층이 정면 6칸, 측면 단간인 굴도리 집으로, 올라 다니는 계단은 서쪽 끝에 설치되었다. 2층 누각에서 내려 본 모습이다.서쪽으로 난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2층 내부 전체가 하나의 공간으로 열렸고 사방은 창으로 나 있다. 중층이면서도 단청을 하지 않아 가식이 없는 민간풍의 건축양식을 나타내고 있어 친근감을 준다. <출처:문화재청>


덕수궁 정전인 중화전 뒷편 석조전 옆으로 자리잡고 있는 오래된 건물처럼 보인 것이 준명당과 즉조당이다. 즉조당은 선조때부터 있었던 건물이고, 준명당은 고종이 업무를 보기 위한 편전으로 지은 건물이다. 두건물 모두 20세기 초인 1904년 화재로 불타버린 것을 새로 지어졌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약간의 현대식 한옥의 느낌을 주는 부분이 있다.


즉조당은 임진왜란 이후 불타버린 경복궁을 대신하여 궁궐 역할을 하던 건물로 광해군과 인조가 즉위한 곳이자, 국왕이 집무를 보던 공간이었다고 한다. 석어당과 함께 구한말까지 남아 있던 건물로 덕수궁이 궁궐로서 존재할 수 있었던 상징적인 공간이다. 이 건물은 고종의 후비인 엄비의 침전으로 오랫동안 사용되었다고 한다. 즉조당은 앞면 7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건물로 가운데 3칸은 대청마루, 왼쪽에 온돌방, 오른쪽에 마루방을 두고 있다. 옆에 지어진 편전건물이 준명당과는 복도로 연결되어 하나의 건물처럼 사용했다. 다른 궁궐 건물과는 달리 추녀마루에 잡상을 올리지 않는 등 궁궐건물로서의 격식을 배제하고 있는 민가집과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즉조당 현판은 고종이 직접 쓴 글씨라고 한다. 지붕을 받치는 공포는 익공계 형식을 하고 있으며, 단청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화려하게 꾸며놓지는 않고 있다.


소박하면서도 단정해 보이는 문살


즉조당 대청마루 내부


즉조당 대청마루 기둥에 걸려 있는 글씨가 쓰여진 주련


즉조당 뒷편, 단순해 보이는 앞쪽과는 달리 뒷편은 약간 복잡해 보인다. 작은 툇마루를 두어서 정자와 같은 기능을 할 수 있게 하고 있다.


즉조당 온돌방 아궁이


즉조당 뒷마당 정원에 설치해 놓은 굴뚝


덕수궁 후원에 해당하는 정관헌에서 즉조당으로 들어오는 길


준명당은 고종이 집무공간으로 사용하기 위해 세운 건물로 원래 편전 건물이었던 즉조당을 확장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두 건물은 복도로 연결되어 있다. 이 건물은 업무를 보던 즉조당과는 달리 신하와 사신을 접견하던 장소로 사용하였다. 이 건물 또한 1904년 화재로 불타버린 것을 복구한 것으로 일제강점기에는 고종.순종의 어진을 봉안하기도 하였으며, 덕혜옹주의 유치원으로도 사용하였다. 준명당은 앞면 6칸으로 가운데 3칸은 대청마루로 이루어져 있다. 그 옆으로는 고종이 편전으로 사용하기 위해 지은 서양식 건물인 석조전이 자리잡고 있다.


준명당 현판과 단청. 즉조당과 마찬가지로 익공계 공포를 하고 있으며 화려하지 않고 소박하게 지은 건물이라 할 수 있다.


준명당 대청마루


준명당 문살.


준명당 뒷마당에 세워 놓은 굴뚝



준명당 앞 마당. 작은 우물처럼 보이는 시설이 있고 마당에는 중국풍으로 수석들로 장식을 하고 있다.


즉조당과 준명당을 연결해 주는 복도

짧은 복도로 연결돼 있어 마치 긴 한채의 건물처럼 보인다. 정면에서 왼쪽이 준명당이고 오른쪽이 즉조당이다. 준명당은 신하와 사신을 접견하는 곳이며 다락집복도(雲閣)로 즉조당과 연결되었다. 1904년 불탔으나 같은 해 다시 지었다. 뒤에는 고종·순종 어진을 봉안하였으며 덕혜옹주의 유치원이었다. 즉조당은 광해군과 인조가 즉위한 곳이며 임금의 집무처이다. 1904년 불타 그 해 다시 지었으며 고종 후비이자, 의민황태자 영왕(英王)의 모친 엄비(嚴妃)의 침전으로 사용되었다. 즉조당 현판은 고종 어필이다. <출처: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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