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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조선 유적_왕릉 129

남양주 홍유릉 홍릉(사적 207호), 대한제국 황제의 능으로 조성한 조선 26대 고종과 명성황후 합장릉

홍릉은 조선 26대 고종과 명성황후의 합장능으로 남양주시 금곡동에 위치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조성된 홍릉은 이전의 왕릉과는 달리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기때문에 황제의 예를 따라서 능을 조성하였다. 홍릉은 기존 왕릉의 제사시설이었던 정자각을 없애고 대신 '-'형의 앞면 5칸짜리 침전을 세워 놓았으며, 능을 수호하는 석양과 석호대신 침전앞 참도 양쪽으로 문.무석인과 기린, 코끼리, 사자, 해태, 낙타, 말 석상을 순서대로 세워 놓고 있다. 참도도 기존에 어도와 신도의 2단으로 되어 있던 것을 3단으로 만들어 놓고 있다. 능역 입구에 위치해 있던 재실 또한 왕릉 바로 앞으로 옮겼으며, 그 규모 또한 상당히 큰 재궁을 조성해 놓고 있다. 홍릉은 1895년에 명성황후가 경복궁 건청궁에서 ..

서울 정릉(사적208호), 태조 이성계의 계비 신덕왕후의 능

서울 성북동 북악산 뒷편 자락에 위치한 정릉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계비인 신덕왕후의 능이다. 태조는 신덕왕후가 죽자 능을 덕수궁 부근에 자신의 능역과 함께 조성하고 원찰로서 흥천사를 세웠다. 그런 연유로 원래의 정릉은 조선이 건국하면서 처음으로 조성한 왕릉으로 고려 왕릉을 참조하여 조성하였다고 한다. 왕자의 난으로 등극한 태종은 정릉을 현재의 위치로 옮기면서 석재 일부를 청계천 광통교를 보수하는데 사용하고 목재들을 태평관 건축에 사용하는 등 홀대하였다고 한다. 태종대에 신덕왕후는 평민으로 강등되었기때문에 그 이후 오랜기간동안 일반 무덤처럼 관리되었다고 조선후기 현종대인 1669년에 송시열 등이 계청으로 신덕왕후로 복권되면서 종묘에 배향되고 현재의 모습으로 재조성되었다고 한다. 처음 정릉을 조성했..

서울 노량진 사육신 역사공원, 단종복위를 꾀하다 처형당한 사육신 묘소

서울 동작구 노량진동 경부선 철도가 지나가는 한강변 언덕에 위치한 사육신 공원은 조선초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대응하여 단종복위를 꾀하다 목숨을 잃은 사육신의 무덤에 조성된 공원이다. 원래 이곳에는 단종복위 사건에 가담하여 참혹하게 처형된 성승,박팽년,유응부,성삼문,이개 다섯분의 시신을 어느 스님이 현재의 위치에 모셨다고 알려져 있다. 이후 숙종대에 사육신이 복위되면서 하위지, 유성원, 김문기의 가묘가 새로이 모셔지고 산기슭에 이들을 모시는 민절서원이 세워졌다. 현재 민절서원은 남아 있지 않고 1970년대 사육신묘 부근을 성역화 하면서 의절사라는 사당을 세우고 주변을 공원화하여 사육신의 충절을 기리고 있다고 한다. 조선초기 단종복위를 꾀하다 참혹하게 처형을 당한 사육신들은 박팽년을 제외하고는 그 후손도 ..

김포 장릉, 인조의 아버지 추존왕 원종과 인원왕후 능

김포시 도심 뒷편 장릉산 자락에 위치한 장릉은 인조의 아버지인 추존왕 원종과 인원왕후 구씨의 능이다. 원종의 무덤은 원래 양주군에 있었는데 인조반정으로 인조가 즉위후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고 하며, 인원왕후의 무덤 또한 현 위치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있던 것으로 원종의 무덤 옆으로 이장하였다고 한다. 장릉은 왕과 왕비의 무덤이 나란히 있는 쌍릉이며, 조선후기 전형적인 왕릉의 모습을 하고 있다. 장릉은 약간 경사진 언덕에 홍살문, 정자각, 봉분이 일렬로 배치되어 있으며, 정자각 오른편에 비각과 수복방이 있다. 김포평야에 위치한 높지 않은 장릉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인조가 반정으로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까닭에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능역이 넓고 깨끗하게 조성되어 있는 편이다. 왕릉 앞쪽에는 넓은..

서울 삼전도비(사적101호), 병자호란 패전의 치욕적인 상징물

서울 송파구 잠실동 석촌호수 동쪽편에 위치한 삼전도비는 병자호란에 승리한 청나라 태종이 조선에 요구하여 세운 전승비로 치욕적인 역사를 상징하는 곳이라 할 수 있다. 남한산성에세 패전한 인조는 청태종에 땅바닥에 머리를 9번 찧는 굴욕적인 항복의식을 치루었으며,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이라 할 수 있다. 정식명칙은 "대청황제공덕비"로 내용은 청나라가 조선에 출병한 이유, 조선이 항복한 사실, 청태종이 피해를 끼치지 않고 회군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높이 5.7m로 거북받침돌 위에 대리석으로 세운 비석에 앞면에는 만주어, 몽골어로, 뒷면에는 한자로 글자를 새겨 놓고 있다. 원래 한강 나루터 인조가 항복했던 장소에 세워졌던 것을 치욕의 역사물이라는 이유로 1895년 청일전쟁 이후 고종이 강물에 수장시..

구리 동구릉, 문조.신정왕후 수릉과 문종.현덕왕후 현릉

구리 동구릉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를 모신 건원릉 비롯하여, 임진왜란을 극복한 선조, 조선후기 중흥을 이끌어낸 영조를 비롯하여 아홉기의 왕릉이 모셔진 조선 최대의 능역이다. 동구릉에는 조선왕조가 처음으로 조성한 왕릉인 건원릉도 있지만, 사실상 마지막으로 조성한 왕릉인 수릉도 동구릉에 자리잡고 있다. 동구릉 입구에 위치한 수릉은 조선 24대 헌종의 아버지인 추존왕 문조와 신정왕후 조씨의 합장릉이다. 추존왕 문조는 순조의 맏아들로 효명세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정조 사후 권문세가들의 횡포가 극심했던 세도정치기에 세자로서 대리청정을 하면서 선정을 펼쳐서 좋은 평판을 받았던 인물이고, 그의 비 신정왕후 조씨는 대왕대비로서 흥선대원군을 후원하면서 고종을 왕위에 앉히고 안동김씨를 비롯한 세도가들을 억누르..

구리 동구릉 목릉, 선조와 의인왕후 박씨, 계비 인목왕후 김씨의 능

목릉은 조선의 14대 선조와 원비 의인왕후 박씨, 계비 인목왕후 김씨의 능이다. 조선왕릉 중 유일하게 같은 산에서 내려온 능성에 3개의 봉분을 따로 만던 동원이강능이다. 목릉은 조선 태조의 능인 건원릉 뒷편에 위치하고 있는데 선조의 원비 의인왕후 박씨의 먼저 조성되고 이후에 선조의 능이 조선된 것으로 볼 때 선조가 자신의 능을 태조의 능이 있는 동구릉에 자리잡고자 했던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임진왜란으로 국력이 피폐했던 당시의 국가 경제 사정을 고려하면 측면도 있고, 국난을 극복하면서 제2의 창업을 했다는 의미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위치로 목릉이 옮겨진 것은 인조반정 이후 이곳에 인목왕후의 능을 조성하면서 선조와 의인왕후의 능도 이곳에 옮기면서 3곳을 합쳐서 목릉이라 칭했다. 이는..

구리 동구릉(사적 193호) 건원릉,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 왕릉

동구릉(사적 193호)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1408년에 승하하자 조성한 왕릉인 건원릉을 중심으로 역대 왕과 왕후의 능 9기가 조성되어 있는 곳이다. 동구릉에는 한 분만 모신 단릉, 두분을 모신 쌍릉, 한곳에 산줄기를 달리해서 모신 동원이강릉, 두분을 함께 모신 합장릉, 세분을 나란히 모신 삼연릉이 있어 다양한 모습의 왕릉을 볼 수 있다. 동구릉에 왕릉을 조성한 왕으로는 태조를 비롯하여 5대 문종과 왕비, 14대 선조와 왕비, 16대 인조의 계비 장령왕후, 18대 현종과 왕비, 21대 영조와 왕비, 추존왕인 문조와 왕비, 24대 헌종과 왕비이다. 조선시대에는 왕릉의 조성은 국가적으로 매우 중요한 일로 풍수지리설에 따라 심혈을 기울여 터를 잡는 것이 일반적이다. 동구릉에 왕릉이 조성된 왕은 대체로..

구리 동구릉, 조선 21대 영조 원릉과 인조 계비 장령왕후 휘릉

동구릉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무덤인 건원릉을 중심으로 9개의 왕릉의 조성된 조선 최대의 능역이다. 서울과 태조의 출신지라 할 수 있는 함흥간 교통로와 가까운 곳에 위치한 동구릉에는 태조를 비롯하여, 5대 문종과 왕후, 14대 선조와 왕후, 16대 인조의 계비, 18대 현종과 왕후, 20대 경종의 비, 21대 영조와 왕후, 추존 문조와 왕후, 24대 헌종과 왕후의 무덤이 한 지역에 모여 있다. 동구릉이 태조의 무덤이 있는 풍수지리상 명당이기는 하지만, 이곳에 왕릉을 조성한 왕은 영조를 제외하고는 강력한 왕권을 가지지 못했던 왕들이었으며, 대체로 당쟁 등이 심했던 시기의 왕들로 왕릉 조성에 대한 책임과 논란을 회피하기 위해서 이곳 동구릉에 왕릉을 조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동구릉 안쪽에는 21대 영조..

구리 동구릉(사적 193호), 24대 헌종의 경릉과 20대 경종 비 단의왕후의 혜릉

구리 동구릉(사적193호)은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 무덤을 중심으로 후대 왕들이 무덤이 계속 조성된 대표적인 왕릉이다. 동구릉에는 태조의 능인 건원릉을 중심으로 총 9곳의 왕릉이 조성되어 있다. 이곳은 태조가 죽은후 풍수지리설에 따라 하륜이 이곳에 터를 잡았다고 한다. 이후에도 5대 문종을 비롯하여 선조, 영조 등 여러 왕과 왕비들이 계속해서 이곳에 능을 조성하였다. 시기에 따라서 동오릉, 동칠릉 등으로 불리다가 철종대에 헌종의 능이 조성됨으로서 9곳의 왕릉이 있는 동구릉이라고 불렀다. 조선시대에 왕릉의 터를 잡는 것은 넓은 지역을 능역으로 조성하고, 풍수리지리상 길지가 적합한지는 이론적으로 판단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고, 후대에 경쟁 정파의 공격을 받기 쉬운 까닭에 상당히 까다롭고 어려운 일이었다. 동..

여수 흥국사 홍교(보물 563호),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홍예

보물 563호로 지정된 여수 영취산 흥국사 입구 계곡에 놓여진 대표적인 아치형 돌다리인 흥국사 홍교이다. 인조 17년(1639)에 세워진 홍예로 이루어진 돌다리로 현재 알려진 다리 중에서는 아치의 높이가 가장 높고 길다. 사람이 많이 오가지 않는 산중 사찰 입구 계곡에 홍예 다리를 세운것은 바깥세상과는 다른 부처의 세상을 구현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현재 남아 있는 홍예 돌다리 중 상당수는 사찰입구에 세워진 다리이다. 이 다리는 계곡 양쪽 바위에 기대어 무지개 모양으로 잘 다듬은 화강석을 이용하여 홍예를 쌓고 그 위에 자연석으로 메꾸어 놓은 형태를 하고 있다. 홍예의 한가운데에는 양쪽으로 용머리 모양을 조각해 놓고 있으며, 홍예 천장에도 물을 향하고 있는 용머리 조각이 있다. 여수의 명..

보성 벌교 홍교(보물304호), 현재 남아 있는 가장 큰 규모의 조선시대 홍교

보물 304호로 지정된 보성 벌교 홍교는 현재 남아 있는 홍교들 중에서는 가장 규모가 큰 다리로 원래의 모습은 알 수 없지만 지금도 3개의 아치로 이루어진 홍예가 남아 있다. 원래는 폭 4m, 길이 80m의 상당히 큰 규모의 홍예 돌다리였다고 한다. 현재 남아 있는 부분은 길이 약 27m 정도로 높이 3m의 홍예 3개가 남아 있다. 홍예 밑 천장에는 용머리를 조각한 돌이 돌출되어 있으며, 아래를 향하도록 되어 있다. 이 다리는 조선 영조 5년(1729)에 선암사의 한 스님이 돌다리로 만들어 놓았다고 한다. 그 여러차례의 보수공사를 거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소설 태백산맥에 등장하는 인물인 김범우의 마을 앞에 놓여진 다리로 묘사되는 벌교 홍교는 낙안벌을 지나 남해안으로 흘러드는 벌교천을 건너는 다리이다..

[창덕궁] 금천교 (보물 1762호), 서울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돌다리

창덕궁 금천교(보물 1762호)는 태종 11년인 1411년에 지어진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궁궐 돌다리이다. 창덕궁 앞을 흐르는 시냇물은 경북궁과는 달리 자연 그대로 남에서 북으로 흐르고 있고, 금천교는 정전인 인정전 정문인 인정문이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외조 바깥족 진선문 앞에 위치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궁궐에 들어갈 때는 꼭 시냇물을 건너서 들어가게 되어 있는데, 이는 시냇물이 풍수설에 의한 명당수의 역할을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창덕궁 정문인 돈화문을 들어서면 궐내각사 앞에서 동쪽으로 방향을 바꾸어서 금천교를 지나서 외조 출입문인 진선문 앞에 이르게 된다. 이는 기존의 법도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연환경에 적절히 순응하는 창덕궁만의 건물배치를 잘 보여주고 있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창덕궁 금천..

창경궁 성종태실 및 태실비

조선시대 왕실에서 출산과 교육은 왕조를 유지하기 위한 근간으로 왕실 자손을 얻고 교육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왕실에서는 태교를 통하여 안전한 출산과 건강한 아기의 탄생을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이를 위해 산실청을 설치하는 등 필요한 많은 조치들을 취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태어난 아기의 태를 갈무리하는 것이데, 이는 아기의 장수와 복을 비는 것으로 중요한 국가적 행사로 삼았다고 하며, 태실도감을 설치하여 태를 봉안하고 태실을 설치하는 일을 맡았다고 한다. 태는 깨끗히 씻은 후 항아리에 보관하여 전국 각지의 풍수가 좋은 곳에 묻었다. 창경궁 후원 언덕에는 특이하게 성종의 태실과 태실비가 있는데, 이는 일제강점기에 일제는 전국에 흩어져 있던 대부분의 조선왕실 태실을 모아서 고양 서삼릉으..

창경궁 관천대(보물851호), 국왕이 직접 천문을 관측하던 관천대(觀天臺)

창경궁에 있는 관천대는 현대그룹 계동사옥 앞에 있는 관산감관천대와 함께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2개의 관천대 중의 하나로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입니다. 조선 후기 숙종 14년(1688)에 만들어 졌다고 하는데 우리나라 천문관측 시설로 많지 않은 유적중의 하나이다. 관천대는 높이 3m로 화강암으로 만든 석대 위에 조선시대에 가장 정밀한 천문관측대인 소간의가 설치하여 천체의 움직임을 관측하였다고 한다. 관상감 관천대는 실무관리들이었던 서운관(관상감) 관원들이 천체를 관측하던 실무용인데 반해서, 창경궁 관천대는 국왕이 직접 천문을 관측하는 시설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천문학을 제왕의 학문으로 여겨 매우 중시하였는데, 이는 해와 달의 움직임과 계절의 변화에 따른 시각과 절기를 정확히 알아내는 것이 매우 중요..

창경궁 풍기대(보물 846호), 바람의 방향과 세기를 측정하던 기상관측기

바람의 방향과 세기를 측정하던 깃발을 세웠던 풍기대는 경복궁과 창경궁에 남아 있다. 창경궁 집복헌 뒷편 언덕에 남아 있는 풍기대(보물846호)는 화강암 석재로 만들어졌으며, 풍기대 위에 깃대를 꽂고 바람의 방향과 속도를 측정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전체 높이 228.1cm로 개다리상 모양의 하부대석과 상부 팔각주로 이루어져 있으며, 24방향으로 측정했다고 한다. 조선시대 바람의 세기와 방향의 측정은 측우기와 같이 농업에 필요한 기상현상을 측정하는 것으로 조선 세종대부터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이곳 창경궁 풍기대는 영조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현재의 위치가 원래의 위치인지는 정확한 설명은 없으나 바람이 많이 부는 언덕에 자리잡고 있는 현재의 위치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풍기대와 앙부..

창경궁 옥천교(보물 386호), 금천을 건너는 돌다리

창경궁 정문인 홍화문을 들어서면 첫번째로 보이는 장면은 금천을 지나는 옥천교와 정전인 명전전 출입문인 명정문, 홍화문과 명정문 사이의 답도, 명정문 사이로 보이는 조정과 명정전의 웅장한 모습일 것이다. 그 중 옥천교는 궁궐 앞을 흐르는 명당수인 금천을 건너는 돌다리로 보물 386호로 지정된 문화재이기도 하다. 금천은 국왕이 사는 궁궐과 바깥세상을 구분하는 상징적의 의미를 갖는 작은 개천으로 중국 자금성에서는 금수(禁水)라고 부르며, 조선에서는 금천(禁川)이라고 이라고 부른다. 창경궁 금천은 동궐의 후원에 있는 반도지, 춘당지 등을 거쳐서 창경궁 외조를 지나 청계천으로 흘러 내려간다. 보물 386호로 지정된 옥천교는 궁궐 입구 금천을 지나는 전형적 금천교의 형태로 2개의 아치를 놓고 그 위에 판석을 올려 ..

서울 헌릉(사적194호), 조선초기 왕릉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조선3대 태종과 원경왕후의 능

서울 서초구 내곡동 대모산 남쪽편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헌릉은 조선 3대 태종과 원경왕후를 모신 능이다. 조선후기 정형화된 왕릉과는 달리 고려왕릉의 형태가 남아 있는 조선초기 왕릉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다. 헌릉은 태종과 원경왕의 봉분이 같은 언덕에 조선된 쌍릉으로 다른 왕릉과는 달리 봉분 앞에 혼유석,장명등 등 석물이 따로 설치되어 있다. 또한 세조 이후의 왕릉에는 잘 볼 수 없는 병풍석을 두르고 있어 조선 왕릉 중에서는 웅장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곳이다. 또한 왕릉 앞에는 조선후기와는 달리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태종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다섯번째 아들로 태조가 조선을 건국하는데 큰 공을 세우기도 했다. 태조대에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종을 옹립하고, 2차 왕자의 난 이후에는 종종을 이어..

서울 인릉 (사적194호), 조선 23대 순조와 순원왕후의 능

서울 서초구 내곡동에 위치한 조선 23대 순조의 능인 인릉이다. 외관상으로 하나의 봉분에 혼유석이 1개만 설치되어 있는 단릉으로 보이지만 순조와 순원왕후의 합장릉이다. 조선후기 왕릉의 일반적인 형태로 봉분에는 병풍석은 없이 난간석만 둘러싸여 있다. 석물 배치 또한 일반적인 왕릉과 큰 차이가 없는 정형화된 조선후기 왕릉이라고 할 수 있다. 원래 순조의 능은 파주 교하에 조성되었는데 풍수지리상 불길하다는 의견이 대두되어 철종대에 현재의 위치로 이장하였다고 한다. 순원왕후는 능이 이곳으로 이장된 이후에 합장되었다고 한다. 순조는 정조의 둘째 아들로 정조 사후에 11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순조가 왕위에 올랐을 때는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는데 정조의 개혁적인 조치를 되돌리는 복고적인 정치분..

고양 서오릉(사적198호) 홍릉, 영조가 자신의 무덤으로 터를 잡은 영조 비 정성왕후의 능

홍릉은 고양시에 위치한 서오릉에서 가장 후대에 조성된 능으로 영조의 비인 정성왕후 서씨의 능이다. 정성왕후는 영조가 연잉군시절에 결혼하여 66세에 죽었는데, 왕비시절에 선왕인 숙종과 경종의 부인을 잘 모시고 영조의 어머니인 숙빈최씨를 모시는 사당인 육상궁을 세우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왕자를 낳지 못했지만 영조와는 상당히 사이가 좋았던 것으로 보인다. 영조는 숙종과 왕비들의 능이 있는 서오릉에 자신의 능을 조성하여 숙종을 잇는 정통성을 확보하고자 이곳에 정성왕후의 능을 조성하였다. 하지만 왕위를 계승한 정조는 사도세자를 죽게한 영조에 대한 원한이 있었고, 계비인 정순왕후 또한 영조와 같은 곳에 묻힐 의도가 있어서 그런지 이곳에 능을 조성하지 않고 구리의 동구릉에 영조의 능을 조성하여 그의 바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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