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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이야기 35

통일신라 불교 구산선문 희양산문(曦陽山門)

통일신라 선종(禪宗)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희양산문(曦陽山門)이다. 봉암사(鳳巖寺)는 통일신라 승려 지증국사 도헌(道憲)이 머물렀다 하여 그를 개산조로 여겨졌는데 그의 비문에 따르면 실제 희양산문을 열지 않았고 고려초 봉암사를 크게 중창한 정신대사 긍양(兢讓, 878 ~ 956년)이 고려초에 봉암사에 머물면서 선풍을 크게 일으켰다고 한다. 긍양은 당에 유학하여 25간 머물면서 선(禪)을 배우고 돌아왔다. 고려초희양산문에 속한 사찰로는 희양산 봉암사를 비롯하여 금강사 유점사, 포항 보경사 등이 있다. 문경 희양산 봉암사 문경시 가은읍 희양산 봉암사(鳳巖寺)는 통일신라말 지증대사가 창건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희양산문의 종찰로 참선을 중시하는 대표적인 선도량으로 오늘날까지 그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1947년..

통일신라 불교 구산선문 실상산문(實相山門)

통일신라 선종(禪宗)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실상산문(實相山門)이다. 통일신라 말 승려 홍척(洪陟)이 전북 남원시 산내문 입석리 지리산 실상사(實相寺)에서 실상산문을 열었다. 제자인 수철대사와 편운대사가 왕실의 후원을 받아 절을 크게 중창하여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초에 크게 번창하였다. 실상산문을 연 홍척은 당나라에 유학하여 선종을 배웠다. 이후 귀국하여 지산에 머물면서 수행하였으며 흥덕왕과 선광태자의 초빙을 받았다. 제자 수철(秀澈, 815~893)은 당에 유학하지 않고 수척에서 선(禪)을 배워 홍척을 계승하였다. 수척은 신라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통일산라 말에 실상산문가 크게 번창하였다. 실상산문은 통일신라 말, 고려 초에 크게 번창하였으나 실상사 외 실상산문과 관련된 사찰은 많지 않다. 남원..

통일신라 불교 구산선문 동리산문(桐裡山門)

통일신라 선종(禪宗)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동리산문(桐裡山門)이다. 통일신라 말 승려 혜철(惠哲, 785~861년)이 전남 곡성군 죽곡면 동리산 태안사(泰安寺)에서 동리산문을 열었다. 혜철은 경주 출신으로 영주 부석사에서 화엄(華嚴)을 배웠으며 813년 당나라에 유학하여 선법(禪法)을 배웠다. 귀국 후 곡성 태안사에 머물렀다. 고려 건국과 도참설(圖讖說) 등에 큰 영향을 미쳤던 도선(道詵)을 비롯하여 후백제 견훤의 추앙을 받았던 경보 등이 동리산문을 계승하였다. 혜철, 도선 등 동리산문 주요 승려들은 화엄을 먼저 배우고 선법(禪法)을 계승한 것으로 볼 때 화엄종과 긴밀한 관계였던 것을 보인다. 동리산문을 대표하는 사찰로는 곡성 동리산 태안사(泰安寺)를 비롯하여 도선이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광양 중흥사, ..

통일신라 불교 구산선문 가지산문(迦智山門)

통일신라 선종(禪宗)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가장 먼저 선종을 이끌었던 가지산문(迦智山門)이다. 가지산문은 개창조인 도의(道義)가 784년 당에 유학하여 중국 선종을 이끌었던 혜능(惠能)이 머물렀던 보단사(寶檀寺)에서 선종을 배웠으며 821년 신라로 돌아와 설악산 진전사(陳田寺)에 머물면서 후학을 양성했다. 염거(廉居)는 설악산 억성사에 머물렀으며 선풍을 확산하였다. 홍척(洪陟), 체징(替徵)이 염거에게 선법을 배웠으며 체칭은 신라 왕실의 후원을 받아 전남 장흥 가지산 보림사에 머물면서 가지산문이 형성되었다. 체징은 많은 제자를 양성했으며 강진 무위사에 활동한 선각대사가 법통을 계승하였다. 고려초 선종은 일시 침체하였으나 12세기에 학일(學一)이 운문사에 머물면서 다시 부각되었으며 13세기 후반 일연(一..

뿔잔(Rhyton), 서역과의 교류를 보여주는 유물

리톤(Rhyton)으로 불리는 쇠뿔 형태의 뿔잔(각배)은 멀리 지중해 연안과 서아시아에 기원을 두고 있다. 서역과의 문화교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유물로 신라뿐만 아니라 가야 등 다양한 지역의 무덤에서 출토되고 있다. 출토된 뿔잔들은 크기나 형태면가 매우 다양하며, 이들 지역과 중앙아시아 흉노를 거쳐 스키타이와 교류한 흔적으로 보고 있다 신라의 각배 우리나라에서 뿔잔이 등장하는 것은 삼국시대부터라 할 수 있다. 에는 뿔잔에 물을 마셨다는 기록이 있다. 출토지가 알려진 뿔잔은 많지 않지만 대체로 경주를 중심으로 신라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김해, 부산, 창녕, 달성 등에서 출토된 것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미추왕릉 지구에서 출토된 뿔잔은 받침대 형태가 당시 유행하던 굽다리접시와 동일하여 뿔잔이 신라화되었음을 ..

범종(梵鍾), '한국종'이라 불리는 독자적 양식을 보이는 문화유산

범종(梵鍾)은 고대 중국 예기(禮器)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여지며, 불교의 전래와 함께 서역문화의 영향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부처의 말씀이자 부처와 보살에게 바치는 모든 소리를 뜻하는 범음을 만들어내는 도구를 범음구라 한다. 범음구에는 종을 비롯해 큰 북인 법고(法鼓), 나무로 만든 물고기 모양의 목어(木魚), 구름 모양의 운판(雲版)이 있는데 이를 불교사물(佛敎四物)이라 한다. 한국의 범종은 학명으로 ‘한국종’이라 불릴 정도로 독자적인 양식을 가지고 있으며, 규모와 장식하고 있는 조각에서 보여주는 예술성 등을 볼 때 신라금관과 함께 우리나라 금속공예를 대표하는 유물이다. 범종은 상원사 동종처럼 주로 오래된 사찰에 걸려 있는 경우가 많지만, 흥천사 종처럼 폐사지에 있던 것을 성문의 종각에 걸어두고 사람들..

신라 진흥왕 순수비(眞興王巡狩碑), 신라 진흥왕이 영토를 확장하고 세운 비석

진흥왕 순수비(眞興王巡狩碑)는 신라 진흥왕이 6세기 정복사업으로 새로 차지한 영토인 창녕.북한산.황초령.마운령 등에 세운 4개의 순수비(巡狩碑)를 말하며, 단양 적성비(赤城碑)는 한강유역을 장악하면서 세운 것으로 비슷한 성격을 갖고 있다. 이들 비석에는 진흥왕이 신라영역으로 새로 편입된 지역을 돌아보면서 민심을 수습하고, 국가에 충성한 자들을 포항하며, 신하들이 함께 축하한 것을 기념하는 내용 등이 담겨 있다. 북한산비는 조선후기 추사 김정희에 의해 그 내용이 확인되었으며 북한 지역에 있는 황초령비와 마운령비는 일제강점기 최남선이 그 내용을 조사하여 확인하였다. 순수비(巡狩碑)는 국왕이 그 지역을 방문하였다는 내용의 '순수(巡狩)'라는 글자가 비문에 포함되어 있으며 북한산비, 황초령비, 마운령비가 이에 ..

사리갖춤, 부처의 사리를 담는 그릇과 공양물

사리(舍利)는 시신을 화장하여 나온 유골이며, 사리구(舍利具)는 사리를 담는 그릇과 그릇 속에 넣은 불상, 작은 탑, 경전과 구슬, 장신구 등의 공양물을 뜻한다. 사리는 일반적으로 유리나 수정용기에 담고, 그 용기는 다양한 재질의 용기에 넣어서 탑에 안치한다. 사리구는 불국사삼층석탑, 감은사지 삼층석탑, 미륵사지석탑 등 웬만한 유명한 탑에서는 대부분 발견되고 있다. 발견된 사리구들은 금속세공을 비롯하여 모든 기술을 동원하여 만들었기때문에 예술적 가치 또한 상당히 높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석탑은 해체/보수하기가 쉽지 않고 도굴하기 또한 상당히 어렵워 미륵사지석탑처럼 석탑의 해체/보수과정에서 최근까지 사리갖춤이 발견되고 있다. 삼국시대, 백제 사리갖춤 우리나라에는 6세기 중엽에 사리가 전래되었고, 사리를..

훈민정음 창제 이후 조선시대 한글의 사용 (박물관 전시 고서적과 문서)

1. 이두, 한자의 음과 훈을 빌려서 우리말을 표현한 문자 우리나라에 한자가 수용된 이후 우리말을 표현하기 위해서 이두, 향가, 향찰, 속자, 구결 등 다양한 형태로 방법들이 만들어졌는데, 보통 이를 통털어서 이두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두는 한자의 음과 훈을 빌려서 우리말을 적던 표기법으로 삼국시대 처음 사용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이며, 고려때에는 이서라는 형태로 하급관리들이 공문서나 관용문에 많이 사용하였다고 한다. 보통 이두는 넓은 의미로 한자를 차용해서 음을 표기한 것을 통칭하며, 현재의 일본어 또한 이두와 비슷한 개념의 문자라 할 수 있다. 이두는 신라초기부터 사용되어 진 것으로 보이며 서동요, 제망매가 등 다양한 문학작품이 이두로 표현되기도 하였다. 통일신라 신문왕때 설총이 기존의 이두사용법을 정..

초원실크로드를 통한 중앙아시아 유목민족과 한반도인의 교류

북반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유라시아대륙은 중앙아시아의 험한 지형 등으로 서구와 동아시아는 상호 교류가 쉽지는 않았지만, 인류가 존재한 이래로 두지역간에는 끊임없는 교류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인류의 고대문명이 시작한 이후에도 양지역간에는 끊임없는 교류가 있었는데, 대표적으로 한(漢)나라가 개척한 비단길을 이름을 따서 보통 실크로드라고 부른다. 이 실크로드는 실제로 3개의 경로가 있는데, 그 중 유라시아대륙 북부의 스텝기후지역의 초원로를 따라 형성된 유목민들의 교역로인 초원실크로드, 중앙아시아 사막을 통한 대상들의 교류였던 실크로드, 동남아 연안 항로를 따라 형성되었던 해상실크로드를 들 수 있다. 그 중 초원실크로는 유라시아대륙 사막 북쪽의 초원지대를 연결하는 교역로로 흑해북안의 우크라이나에서 카스피해와..

조선시대 별자리지도와 천문 관측기구

천문학은 우주의 구조와 천체의 현상 등을 연구하는 학문으로 시간과 방위를 정하고, 농업에 필수적이었기때문에 인류와 함께 해온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고대 이래로 통치자는 그 권력을 나타내는 방편의 하나로 천체현상을 관측하고 해석하는데 많은 힘을 기울였다고 할 수 있다. 천체 현상 중 해와 달의 움직임, 별의 위치 등으로 시간의 흐름과 계절의 변화를 예측하는 하는 것이 주요한 역할이었다고 할 수 있다. 천체 현상 중 변화를 예측하는데 많은 노력이 필요한 오행성의 움직임, 해와 달이 사라지는 일식과 월식, 별이 사라지는 항성의 폭발과 특이한 움직임을 보이는 혜성 등이 주요한 대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서구의 천문학이 고대문명에서 통치자나 종교적 권위를 갖춘 교황 등을 중심으로 발전해 왔던 것처럼, 아시아에..

조선시대 물시계(Water Clock) 자격루와 중국 물시계 비루(碑漏, Beilou)

물시계(water clock)는 물을 채운 용기에 작은 구멍을 만들어 일정한 속도로 물을 흘러내려 시간을 알 수 있게 하는 시계로 해시계(sundial), 별시계와 더불러 가장 오래된 시계중 하나이다. 물시계가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메소포타마아와 이집트에서는 BC 1,600년 전부터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스와 로마시대에도 물시계가 사용된 것으로 보이며, 중국과 인도에서도 비교적 이른 시기에 사용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통일신라시대에 사용한 기록이 남아 있어며, 가장 잘 알려진 것은 1434년 세종대에 장영실이 만든 자격루는 자동시보장치가 있는 대표적인 물시계이다. 서양의 물시계 현존하는 가종 오래된 물시계의 수조는 이집트 상왕조 시기인 Amenhotep III (BC1415~1..

조선시대 해시계(Sundial), 태양에 움직임을 따른 그림자를 보고 시간을 측정하던 가장 원초적인 시계

해시계(Sundial)은 태양의 움직임에 따라 나타나는 그림자를 보고 시간을 측정하던 시계로 가장 원초적이며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던 시계이다. 해시계는 역사가 기록되기 이전의 선사시대부터 사용되었지만 현재까지 가장 먼저 사용된 것으로 알려진 것은 메소포나미아에 폴로스라는 해시계이며, 이집트의 오벨리스크 또한 기념비의 성격을 갖지만 해시계의 기능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구약성서에도 해시계의 사용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다. 그리스.로마시대에는 대리석에 1/4구면을 우묵하게 파고 눈금을 새겨 시간을 알 수 있게 한 해시계를 제작했으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해시계는 베수비오스 화산 폭발로 사라진 도시인 헤르쿨라네움에서 출토된 것으로 나폴리 박물관에서 소장.전시되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해시계는 삼한..

철의 왕국 가야의 발자취를 찾아서 - 금관가야(김해), 대가야(고령), 아라가야(함안), 사천 늑도

가야는 삼국시대 상당기간 동안 한반도 남부에 있었던 고대 국가입니다. 당시에 철이 많이 생산되었고 중국, 한국, 일본과 교역에서 아주 중요한 지리적 위치에 자리잡고 있어 높은 문화.기술 수준을 가지고 있었던 나라입니다. 부족연맹체로서 낙동강을 따라서 주요 거점지역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가야의 맹주였던 금관가야는 낙동강 하구 김해지역에 자리잡고 있었으며 지금도 우리나라 최대의 성씨인 김해김씨의 본을 이루고 있습니다. 대가야는 낙동강 중류의 고령.합천지역에 있었고 그외에 함안의 아라가야, 창녕의 비화가야 등이 존재했었습니다. 그외에 해상교역의 중심지였던 삼천포항 앞에 자리한 작은 섬인 늑도에도 많은 유물들이 발굴되었습니다. ※ 가야 유적지 탐방 (금관가야) 1.가야탄생 설화 구지봉, 2.수로왕릉, 3.허황..

다산 정약용 선생의 유적지를 찾아서

다산 정약용 선생은 조선 정조때 문신으로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실학자이다. 그는 농업을 중시하는 중농주의 실학자로서 조선 후기 실학을 집대성하였으며 저서로는 그의 유배생활 중에 저술한 ,, 경세유표 등이 포함된 등이 있다. 정약용 선생은 현 경기도 남양주에서 태어났으며, 정조때에 벼슬길에 올라 많은 업적을 남겨 놓고 있는데 당시 정조의 수원화성 행차시 사용한 한강 부교를 만든 것을 비롯하여 거중기를 개발하여 수원화성을 축성하는데 사용하는 등 과학적 지식과 식견도 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정조 사후 노론의 표적이 되어 천주교 박해 사건인 신유박해에 연루되어 그의 형 정약전과 함께 유배되어 18년간 전남 강진 등에서 유배생활을 하였다. 그가 유배생활을 주로 했던 곳으로는 그의 외가인 고산 윤선도 고택이 있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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