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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유적_고분 108

경주 괘릉 (사적 26호), 신라 왕릉 중 가장 완비된 형식을 갖춘 원성왕의 능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에 있는 괘릉은 신라 38대 원성왕의 능으로 추정되는 능이다. 원성왕은 혜공왕 16년에 상대등 김양상 (선덕왕)과 함께 김지정의 난을 평정한 후 그 공을 인정받아 선덕왕 즉위 후 상대등이 되었고 선덕왕이 죽자 원성왕으로 즉위하였다. 786년에 당나라에 조공을 하고 유교정치를 지향하여 독서삼품과를 두어 인재를 등용하고 김제 벽골제를 증축 농사를 장려하였다. 선덕왕과 원성왕대에 귀족들이 요직을 장악하고 그 들 사이의 권력투쟁을 통해서 왕위를 계승하는 통일신라 후대의 정치 혼란상이 시작된 시기이기도 한다. 사적 26호로 지정된 괘릉은 12지신상으로 둘레돌을 돌린 원형봉토분으로 봉토 주위에는 수십개의 기둥을 세우고 난간을 설치했으며, 중앙에는 안상이 조각된 서역풍의 상석이 놓여 있다. 봉분에..

경주 무열왕릉 아래에 있는 김인문과 김양의 무덤,

경주 형산강 동쪽편 선도산 능선을 따라 조성된 태종무열왕, 진흥왕, 진지왕, 헌안왕, 문성왕을 비롯한 여러 고분들 중에서 가장 낮은 곳에 휘치한 2기의 고분으로 무열왕의 아들인 김인문과 통일신라 후기 대각간을 지낸 김양의 무덤이 있다. 이 고분들은 통일신라 귀족의 무덤중에서 그 주인이 알려져 있는 흔치 경우이다. 이 고분들은 흙을 둥글게 쌓아 올린 형태로 봉분의 크기는 왕릉보다 약간 작은 규모를 하고 있다. 김인문은 무열왕의 둘째 아들로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의 동생이기도 한 인물로 통일전쟁 과정에서 많은 공을 세웠던 것으로 보인다. 그 업적을 기리기 위해서 세웠던 비석의 귀부만 무덤앞에 남아 있고, 비석의 일부는 경주박물관에서 전시되고 있다. 김양은 이 곳에 능이 남아 있는 문성왕과 헌안왕을 도왔던 인물..

경주 서악동 진흥왕릉 (사적 177호)과 진지.문성.헌안왕릉

경주 형산상 서쪽에 있는 선도산 남쪽으로 뻗어내린 주능선 서악동 산자락에 위치하고 있는 4기의 왕릉이다. 약간 아래쪽에 위치한 태종무열왕릉과 서악동 구분군에 비해서 봉분의 크기가 작고 잘 꾸미지 않은 왕릉으로 한강유역으로 진출하는 등 신라를 크게 중흥시키고 삼국통일의 기반을 마련한 진흥왕을 비롯하여 그의 아들이자 태종무열왕의 할아버지인 진지왕의 왕릉, 신라 쇠퇴기에 청해진 대사 장보고의 난을 제압한 문성왕과 그 뒤를 이은 헌안왕의 왕릉이 나란히 있다. 이 곳에는 4기의 왕릉 외외에도 약 10여기 정도 정비되지 않은 신라귀족(?)의 무덤으로 보이는 고분들이 능선을 따라서 들어서 있다. 진흥왕 신라 역사에 있어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왕으로 전국각지에 그가 다녀간 순수비를 남아 있는 왕이지만, 그가 남긴 업적..

경주 서악동고분군 (사적 142호), 무열왕릉 뒷편에 있는 신라 귀족의 무덤

사적 142호로 지정된 서악동고분군은 경주시 서악동 선도산 남쪽으로 뻗어내린 구릉의 능선에 위치한 대형 고분으로 태종무열왕릉 뒷편에 나란히 놓여 있다. 이 고분들의 입지는 경주로 향해서 뻗은 능선상에 위치하고 있으며, 앞쪽으로는 경주를 관통하는 큰 강인 형산강이 흐르고 있으며 남쪽 계곡 건너에는 벽도산이 있는 점 등으로 볼 때 당나라와 교류가 많았던 삼국시대 말기의 풍수사상이 반영된 입지인 것으로 보인다. 또한 긴장관계에 있던 백제.고구려 등 외부세력의 침입이 예상되는 교통로에 능을 조성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선도산 능선을 따라 조성된 4기의 고분에 대해서는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았지만, 공식적으로는 태종무열왕과 관련이 깊은 왕족이거나 왕의 무덤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다만, 뒷편 언덕..

경주 태종무열왕릉 (사적 20호), 삼국통일의 기초를 마련한 무열왕 김춘추 무덤

경주시 서쪽편에서 경주 시가지가 내려다 보이는 서악동 동쪽 언덕에 나란히 자리잡고 있는 5기의 고분 중 제일 앞쪽에 위치하고 있는 사적 20호로 지정되어 있는 신라 29대 태종무열왕의 능이다. 무열왕릉의 위치는 약간의 언덕위에 있어서 경주시가를 굽어보기에 아주 좋은 위치에 있다. 또한 대구 등 경북지역에서 경주로 들어오는 국도 입구에 태종 무열왕릉이 있는데 아마 이는 중국의 사례를 참고한 듯 하다. (적의 침입이 있을때 왕실이 물러서지 않고 선조의 능을 지킨다는 의미로 가상의 적이 가장 먼저 오는 곳에 대부분의 왕릉이 있고, 서울의 경우도 1번국도로 신의주로 가는 통일로에 서오능, 서삼능 등 가장 많은 왕릉이 있다.) 무열왕릉 봉분은 밑지름 36.3m, 높이 8.7m로 원형봉토분 형태를 하고 있으며 발굴..

경주 금척리 고분군(사적 43호), 경주 외곽에 소재한 삼국시대 신라 귀족의 무덤

사적 43호로 지정된 금척리고분군은 대구와 경주를 연결해주던 옛 국도가 지나가는 경주시 건천읍 금척리에 소재한 삼국시대 신라의 고분군이다. 건천읍소재지에서 경주방향으로 약 2km 정도 떨어진 평지에 위치한 이 고분들은 경주 시내 평지에 위치한 고분들보도 그 규모가가 작아서 삼국시대 귀족들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다. 금척리 고분군은 박혁거세왕이 병을 고칠 수 있는 하늘로 부터 받은 금척을 숨기면서 40여기의 봉분을 조성했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금척리 고분군은 모두 50여기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는데 현재 봉분형태로 남아 있는 것은 32기가 확인되었다고 한다. 1950년대에 국도를 개설하면서 동서로 나누어져 있으며, 당시 훼손된 2기의 고분이 조사되었다고 한다. 그 뒤 몇차례 조사기 이루어지기는 했..

고성 송학동고분군 (사적 119호), 가야연맹체 소가야의 고분

고성읍 중심가에 있는 작은 구릉인 무기산 일대에 있는 송학동 고분군이다. 이 고분군은 고성일대에 존재했던 소가야의 고분군으로 현재는 약 7기의 고분이 남아 있으며, 북쪽으로는 기원리 무덤들이 있고, 동쪽으로는 송학동 조개더미가 남아 있어 이 곳이 소야가국이 있었던 자리임을 말해주고 있다. 소가야는 중국 문헌 위서 동이전에 변한 12국 중 하나였던 고자미동국이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삼한시대 무역중개항 역할을 했던 사천 늑도 등과 함께 한반도 연안을 따라서 형성되어 있던 한.중.일 해상교역로에서 중요 거점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해상무역에 있어서 가야연맹체의 주도국가였던 금관가야와 경쟁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소가야는 대가야가 신라에 병합된 6세기 중엽 이전에 신라에 합병된 것으로 보고 있다. 고성..

고성 내산리고분군(사적 120호), 남해안 당항포에 자리 잡은 해상세력 소가야 유적지

고성군 동해면 내산리에 있는 사적 120호로 지정된 내산리고분군이다. 내산리 고분군이 있는 이 지역은 진주, 사천, 고성반도의 남해안 일대에 자리잡고 있는 소가야가 있었던 지역이다. 소가야는 고대 동아시아 주요 해상교통로였던 남해안 일대 요지에 자리잡고 있으면서 교역으로 발전하였으며, 가야가 멸망하기 직전인 6세기까지 존속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해지역의 금관가야을 중심으로 한 가야연맹체의 일원이었으나 금관가야와는 해상무역의 주도권을 다투는 대립적인 관계를 형성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후기에는 해상무역에 있어서 주도적인 역할을 갖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삼한시대 이 지역을 대표하는 유적지로는 무역항이었던 사천 늑도 유적지가 있으며 고성읍에 소재한 송학동 고분군과 동해면에 소재한 내산리고분군이 소가야를 대표..

양산 신기리 고분군 (사적94호), 신라 지방귀족의 무덤

사적 94호로 지정된 양산 신기리 고분군은 북정리 고분군과 얕은 계곡을 사이에 두고 인접해 있는 신라의 고분군이다. 북정리 고분군과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졌고, 출토 유물에 있어서 큰 차이점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북정동 고분군과 구분하여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현재 신기리 고분군으로 지정된 고분은 약 10여기가 못되는 것으로 보인다. 아래쪽에 있는 고분이 다른 고분에 비해서 이른 시기에 조성되었다고하며 무덤형식이 변모하는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는 곳이라고 한다. 이 고분군에서는 통모양의 토기와 독모양의 토기로 만든 합구식옹관이 발굴된 것이 특이하다고 한다. 무덤의 형태는 구덩이식돌방무덤과 앞트기식돌방무덤이 같이 발굴되고 있으며, 구덩이식 돌방무덤에서는 부산 복천동 고분에서 출토된 것과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

양산 북정리 고분군(사적 93호), 5~6세기 신라의 고분

양산 북정리 고분군은 양산 도심에서 동북쪽 경부고속도로가 지나가는 길 옆 성황산에서 뻗어내린 능선에 위치하고 있는 5~6세기 신라의 고분이다. 능선 위쪽에는 대형 고분이, 아래쪽에는 소형고분이 20여기 분포되어 있다. 이 고분군은 이른 시기인 1920년대에 일본인에 의해 부부총에 처음 발굴조사되었다. 1990년대에 동아대 박물관에 의해 재조사되었다고 한다. 부부총에서 출토된 금동관 등 다수의 유물들은 현재 일본 도쿄박물관에 전시되있으며, 동아대에 발굴한 금조총에서도 다수의 유물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김해지역과 가까운 이 고분은 가야가 신라에 병합되던 시기의 지역 유력자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북정리 고분군이 있는 지역은 양산시가 도시화되어 가면서 주택가로 변하고 있는 지역으로 보이며, 실제로는 현재 ..

김해 양동리 고분군(사적 454호), 5천여점의 유물이 출토된 삼한시대부터 삼국시대까지에 이르는 고분군

김해시 주촌면에 위치한 양동리 고분군은 가야 고분군 중에서도 가장 많은 5천여점의 유물의 발굴된 유적지이다. 기원전 2세기 삼한시대부터 원삼국, 삼국시대에 이르는 기원후 5세기까지의 무덤 500여기가 산재해 있는 곳으로 목관묘, 목곽묘, 석곽묘 등 다양한 형태의 무덤이 양동리 가곡부락 뒷산에 오밀조밀하게 모여 있었고, 그 면적은 3만여평 정도이다. 현재 양동리 고분군은 유적 발굴이후 봉분들을 복원해 놓고 있지 않아서 유적지가 아니라 동네 뒷산같은 분위기를 주고 있다. 양동리 고분군에서는 한식청동거울과 폭이 넓은 투겁창 등 중국 및 일본계 유물들이 많이 출토되고 있으며, 이 고분의 주인들은 지역의 유력집단으로 중국, 일본과의 해상교역으로 부를 축적한 집단으로 여겨진다. 또한 대형 목곽묘와 외래계유물, 수정..

성주 성산동 고분군(사적 86호), 가야연맹체 성산가야 유적

성산가야는 삼국유사에 기록된 가야연맹체 국가 중 하나로 한반도 동남부 변한 12국 중에 하나에서 발전하였다고 한다. 벽진가야라고도 하며, 성주읍과 인근의 벽진면 일대를 영토로한 고대국가였다. 낙동강 서안의 현 성주읍 주변 지역으로 농업생산성 양호하며, 낙동강 수로를 이용할 수 있어서 고대국가로 발전했던 것으로 보인다. 남쪽편에 있었던 가야연맹체의 중심국가 중 하나였던 고령의 대가야와는 출토된 유물에서 다른 특징을 나타나며 오히려 신라의의 유물과 유사점이 많아서 신라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지역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성주읍 중심부를 휘감으면서 낙동강으로 흘러들어가는 하천 남쪽편인 성주읍 성산동 산자락에 소재한 성주 성산동 고분군은 고대 국가로 가야연맹체 중 하나인 성산가야가 남겨 놓은 유적이다. 성산동 고..

공주 수촌리고분군 (사적 460호), 초기 백제시대 웅진지방 유력자의 무덤

공주에서 금강을 지나서 차령고개를 넘어 천안으로 연결되는 23번국도변에 위치한 의당면 수촌리 백제고분군이다. 백제시대 고분이지만 왕릉은 아니고 초기 백제가 한성에 도읍을 하고 있을때 웅진지역 토호세력의 무덤으로 보인다. 이 고분은 수촌초등학교 뒷편에 2지역 고분군이 있고, 조금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1지역 고분군이 있다. 수촌리 고분군 발굴 조사를 통해서 목곽묘, 앞트기식돌방무덤, 굴식 돌방무덤 등 다양한 형태의 무덤이 확인되었으며, 부장품으로 백제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금동관모를 비롯하여, 금동신발, 환두대고, 중국제 자기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 곳 수촌리 백제고분군은 웅진시기의 무덤이 아니라 초기 한성을 도읍으로 한 시기의 지방세력의 위상이나 중앙과의 관계를 보여준다고 한다. 수촌리 수촌..

공주 정지산유적 (사적 474호), 백제의 제사 시설터로 추정되는 유적지

공주 무령왕릉과 송산리고분군이 있는 송산의 북쪽 끝자락에는 백제가 웅진을 도읍으로 하던 시절에 제사시설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 정지산 유적지가 있다. 백제왕릉이 있었던 산에서 금강이 내려다 보이는 이 곳 정지산 유적지를 실제로 찾아가 보면 눈으로 볼 수 있는 옛날 시설물이나 건물흔적 등을 볼 수는 없고 이 곳이 백제시대 제사시설이 있었다는 표지석만 홀로 서 있다. 그렇더라도 당시 사람들이 이 곳에 제사시설을 설치한 이유나 그들이 이 곳에서 느꼈을 느낌같은 것들을 조금이나 체험해 볼 수 있는 곳이다. 정지산 유적은 공주에서 금강이북이 내려다 보이는 전망이 좋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백제인들은 능선 정상부를 평평하게 조성하여 제단같은 건물을 짓고, 그 외곽에 목책과 도랑으로 주위와 격리하였다고 한다. 실제로..

[중앙박물관] 강서대묘 사신도, 고구려 기상이 넘치는 동물투쟁도

중앙박물관 1층 고고관에서는 특별전시로 대표적인 고구려 벽화인 강서대묘 사신도를 전시하고 있다. 이 사신도는 1930년대에 벽화를 보고 모사한 그림으로 실제에 가까운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강서대묘는 북한 평안도 남포시 강서구역에 있는 고구려 고분으로 1900년대 초에 그 존재가 널리 알려졌다. 내부는 대형 화강암 판석을 수직으로 쌓아 만든 널방 벽체와 천정으로 이루저여 있으며 특별한 장식이 없이 사방이 벽화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기운생동하는 사신도와 유려하고 다채롭게 표현된 천장 그림들은 고구려 무덤벽화의 절정기 수준을 보여 주고 있다. 특히 북벽의 현무가 연출하는 긴장감 있는 화면 구성과 회화적 완성도는 조사보고 당시부터 국내외의 이목을 끌었으며,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이 벽화를 모사했다고 하며,..

김제 벽골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저수지 (사적 111호)

김제 벽골제는 제천 의림지, 밀양 수산제와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수리시설인 저수지로 학창시설 꼭 외어야만 했던 유적지 중 하나이다. 김제 지역을 포함한 전북지역은 우리나라에서 지평선을 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지역으로 역사 이래로 벼농사의 중심지였다. 벽골제라는 이름 또한 '벼가 나는 골'이라는 우리말에 그 근원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며, 김제군의 지명과 유래를 같이하고 있다고 한다. 호남평야는 넓은 평야지대의 풍요로움을 뒷면에는 동학농민혁명으로 대변되는 농민들의 고단한 삶이 묻어 있는 곳으로 삼국시대부터 둑을 쌓아 저수지를 만들어 논에 물을 대어야 하는 어려움과 풍요속에 숨어 있는 수탈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고장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 전군가도로 대변되는 일제의 식량 수탈 또한 이 지역에서 집중적..

김해 수로왕비릉 파사석탑 - 인도에서 가져온 돌로 만든 탑

김해 수로왕비릉 우측편에 자리잡고 있는 파사석탑입니다. 허왕후가 인도에서 건너올 때 바다 신의 노여움을 잠재우기 위해 싣고 왔다는 돌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없는 종류의 돌이라고 합니다. 원래 다른 사찰에 있던 돌을 옮겨서 현재의 자리에 있습니다. 허황후가 인도에서 가져왔다는 돌로 쌓은 파사석탑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존재하지 않는 돌이라고 합니다. 수로왕비릉 우측편에 자리잡고 있는 파사석탑, 파사각 안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수로왕비릉 앞에서 내려다본 파사석탑. 파사석탑 안내표지판 수로왕의 비 허왕후, 黃玉이 東漢建武 24년 갑신에 서역 아유타국에서 머나먼 바다를 건너올 때 파신의 노여움을 잠재우기 위해 함께싣고 왔다고 삼국유사 등 고서에 기록되어 있음. 파사석탑은 옛 호계사 자리에 있던 것을 김해부사 정현석이..

부여 관북리백제유적, 백제 마지막 수도 사비성 왕궁터로 추정되는 곳

백제 마지막 수도인 사비성 왕궁터로 추정되는 부여 관북리 백제유적지이다. 이 곳은 부여의 중심지인 부소산성 남쪽편에 위치하고 있으며, 부여읍 도심지가 바로 뒷편에 위치하고 있다. 지금은 부여박물관만 있지만 옛날에는 민가들이 있었던 곳으로 1982년도부터 이 일대를 발굴하였는데 방형석축연지와 다양한 석축시설이 발견되었으며 연꽃무늬수막새를 비롯하여 철제무기, 벼루, 등장 등 다양한 생활 유물들이 이 곳에서 발굴되어 상류층의 생활유적임을 말해주고 있다. 경주 월성의 신라 왕궁 추정 유적지와 마찬가지로 실제로 유적지는 공사현장이나 공터같은 느낌을 주고 있지만, 오래전 백제왕궁터였음을 생각하고 주위환경 등과 박물관의 출토유물들을 같이 고려하여 보는 즐거움이 있다. 옛 국립부여박물관 앞쪽여 서쪽편이 백제 마지막 수..

창녕 신라진흥왕척경비 (국보33호), 진흥왕이 비화가야를 편입한 기념으로 세운 비석

신라가 창녕지역 비화가야(빛벌가야)를 편입한 이후 진흥왕이 이 곳을 다녀간 후 기념으로 세운 기념비이다. 북한산, 함초령, 마운령비와 함께 진흥왕순수비로 여겨지는 비석으로 국보로 지정된 문화재이다. 자연석 앞면에 비문을 새겨두고 있는데 앞면은 닳아서 읽을 수 없고 후반부에는 수행하던 신의 명당이 나열되어 있어 당시의 행정조직, 신분제 및 사회조직을 파악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비문 내용중에 '순수관경(巡狩管境)'이라는 제목이 보이지 아낳아 척경비로 일컫고 있으나, 비분의 내용과 성격 등을 고려해 볼 때 북한산을 비롯한 다른 순수비와 동일한 성격으로 보는 의견이 많아 보인다. 창녕읍 공원에 위치한 진흥왕 척경비. 원래는 창원 동쪽편 화왕산 목마산성 기슭에 있는 것을 일제강점기에 이 곳으로 옮겼다고 ..

충주 고구려비 (국보 205호), 삼국시대 고구려 영토 범위를 알려주는 비석

30년전 발견된 남한에서는 유일한 고구려 비석인 충주 중원고구려비입니다. 장수왕때 세워진 비석으로 알려져 있으며 삼국의 영역과 세력관계를 나타내고 있는 비석입니다. 크기나 형태가 아주 평범해서 30년 발견될 때까지는 그 존재가 알려지지 않았고 단지 동네 어귀를 지키고 있는 많은 비석 중에 하나로 간주되었던 유물입니다. 지금도 사전에 준비하고 가지 않으면 모르고 지나칠 수 있는 평범하게 생겼지만 역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비석입니다. 인근에 신라의 영토임을 표현하고자 했던(?) 충주 중앙탑이 있고, 남한강을 굽이 보고 있는 고구려산성인 장미산성이 있습니다. 이천년의 세월 동원 충주 중원 입석마을 입구를 지켜왔던 중원 고구려비입니다. 옛날부터 있어던 비석이고 글자가 많이 마모되어 있어 사람들의 관심밖에 있던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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