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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_향교_사당 156

논산 노강서원 강당 (보물 1746호), 기호지방을 대표하는 서원 건축물

논산 노강서원은 조선후기 유학자 윤황을 추무하기 위해 세워진 서원으로 1675년(숙종1)에 처음 세워진 후, 1682년 국왕으로부터 '노강'이라는 현판과 토지를 하사받은 사액서원이다. 후에 그의 아들 윤문거와 윤선거.윤증 부자를 함께 모신 서원으로 논산 돈암서원과 함께 기호지방을 대표하는 큰 서원으로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철폐되지 않은 서원 중 하나이다. 노강서원은 앞쪽에 강당과 동.서재로 이루어진 강학공간이, 뒷편에 사당인 제향공인 배치된 전학후묘의 공간배치를 하고 있다. 보물 1746호로 지정된 노강서원 강당은 앞면5칸, 옆면 3칸의 크 규모의 건축물로 돈암서원 응도당과 함께 기호지방을 대표하는 서원 건축물이다. 건물 가운데 3칸은 대청마루를 두고 양쪽에 온돌방을 두고 있으며, 대청마루와 온돌방사이..

논산 노성 궐리사, 공자의 영정을 봉안한 사당

궐리사는 공자의 영정을 모신 사당으로 조선후기 유학자이자 노론을 대표하는 송시열이 건립을 추진하였고, 그의 제자들이 전국적으로 강릉, 제천, 화성(수원)과 이곳 논산의 노성현에 세웠는데 현재는 노성 궐리사만 남아 있다고 한다. 궐리사는 중국 명나라에 대한 의리론을 주찬하였던 송시열이 취한 여러 조치 중의 하나라고 볼 수도 있다. 궐리사는 공자를 모신다는 점에서 기존의 공자를 모신 사당이라는 향교의 대성전과 큰 차이는 없는 것으로 보이며, 사당과 강당으로 이루어진 건물배치 등에서도 큰 차이점을 찾을 수는 없다. 노성 궐리사는 옛 노성현 관아 소재지가 있는 노성산은 공자가 자란 마을인 궐리촌과 지형이 비슷하다고 하여 이구산이라고 불리웠으며, 고장의 명칭도 공자의 고향인 노나라와 연관지어 정조대에 노성현으로 ..

논산 노성향교, 조선시대 노성현 공교육 기관

충남 논산시는 일제강점기에 행정개편과정에 조선시대 노성현, 연산현, 은진현이 합쳐서 이루어진 고장이다. 금강하구 넓은 평야 지대의 충청도와 전라도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고장으로 농업생산이 풍부하고, 중요한 교통로에 위치하고 있기때문에 역사 이래로 중요한 지역이었으며, 조선시대에는 토지생산력을 바탕으로 유교문화가 활발했던 곳이다. 황산벌 평야지대 북쪽편 공주와 연결되는 교통로에 위치한 노성산성을 중심으로 주변 지역은 조선시대에는 노성현이라고 불렸으며, 노성산성 남쪽편 면소재지에 노성현 관아가 있었다고 한다. 이 일대는 농업생산력을 바탕으로 유교문화가 발전했던 곳으로 관아 유적은 남아 있지 않지만, 조선후기 당파 소론의 영수인 윤증의 명재고택, 송시열이 세원 공자를 모신 궐리사, 충남을 대표하는 서원인 노강..

강화 교동향교, 교동도호부의 공립 교육기관

한강 입구에 위치하고 있는 교동도는 섬의 규모가 크지 않아 지금은 강화군에 속한 마을이지만 삼국시대때부터 한강유역을 지키기 위한 군사적 요충지로 강화와는 별개로 고목근현이라 불렀으며 신라경덕왕때 교동현이 설치되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도 국방상의 중요성으로 병자호란 이후에는 수영이 남양에서 이 곳으로 옮겨지면서 도호부로 승격되었으며, 1633년에는 삼도통어사가 설치되어 경기도.황해도.충청도의 수군을 총괄하던 고장이다. 교동도에 지금은 옛 교동부 관아의 흔적은 읍성을 쌓았던 성곽 일부를 제외하고는 남아 있지 않고, 교동도의 주산인 화개산 남쪽 기슭에 관아에서 운영하던 교육기관이 향교가 남아 있다. 교동향교는 우리나라에 성리학을 도입한 유학자 안향이 원나라에서 공자의 초상화를 가져와 모셨던 유서깊은 향교 중의..

경주 오릉 숭덕전, 신라 시조 박혁거세왕의 제사를 모시기 위한 건물

경주에는 신라 왕위에 오른 김씨, 박씨, 석씨의 시조격에 해당하는 왕을 모신 재실로 오릉에 박혁거세를 모신 숭덕전, 미추왕릉 앞쪽에 미추왕,문무대왕,경순왕을 모신 숭혜전, 탈해왕릉 앞에 숭신전이 있다. 그 중 숭덕전은 신라시조 박혁거세왕의 제사를 모시기 위한 재실건물로 조선시대부터 존재해 왔었다고 한다. 현재의 건물은 영조대에 지어진 것이라고 한다. 건물로는 박혁거세왕을 모신 숭덕전과 그 앞쪽에 상현재와 동재가 있고, 제사를 준비하는 재실 성격의 건물 여러동을 두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이 곳에 능을 관리하는 능참봉을 두었다고 한다. 숭덕전 뒷편으로는 연못이 있고, 그 뒤편에 박혁거세왕의 비가 태어났다는 우물인 알영정이 있다. 건물의 규모는 김수로왕릉이 있는 김해에 비해서 크지는 않은 것 같다. 조선시대 ..

경주향교, 신라 최고 교육기관인 국학이 있던 곳에 자리한 조선시대 경주부 중등교육기관

경주는 신라 천년의 수도로 많은 문화재와 유적지가 남아 있는 고도이다. 또한 신라가 멸망한 이후에도 영남지역의 중심도시로 동경 또는 경주라고 불려왔던 고장이다. 조선시대 경주는 종2품의 외관직인 부윤이 고을 수령인 지금의 직할시에 해당하는 큰 고을이었다. 조선시대에 부(府)가 설치된 도시는 한성과 평양,경주에 먼저 설치되었고 함흥과 전주, 큰 도시였던 의주, 경기도 광주에 설치되었다고 한다. 경주는 조선시대에도 큰 고을을 유지했지만, 현재 남아 있는 조선시대의 흔적으로는 성벽 일부만 남아 있는 경주읍성과 월성 서쪽편에 자리잡고 있는 경주향교를 들 수 있다. 현재 경주향교가 자리잡고 있는 곳은 경주에서 손꼽히는 부호였던 최부잣집을 중심으로 반촌이 형성되어 있는교촌마을로 신라 궁궐이었던 월성 동쪽편에 자리잡..

경주 도봉서당, 서원 형식의 재실

태종무열왕릉과 진흥왕릉이 위치한 경주 서악동 마을에 소재한 도봉서당이다. 서당이라는 이름에서 조선시대 초급 교육기관을 연상시키지만 사실은 서원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서원은 원래 학문적으로 뛰어난 업적을 남긴 선현들을 모시기 위해서 후학들이 세운 사당을 중심으로 형성된 사립교육기관에서 출발했다. 대부분의 초기 서원들은 학덕과 지역에 기반을 갖춘 인물이 운영하던 서당에서 출발해 그를 모신 사당을 설립하고 국왕으로부터 사액을 받아 사액서원으로 발달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조선후기에 들어서면서 학문적 업적보다는 문중 인물을 모신 사당을 중심으로 서원이 건립되기 시작했으며 이런 서원에서는 문중사람들이 모여 지역 여론을 형성하고 붕당정치의 지역기반이 되기는 폐단을 낳기도 한 것이다. 조선후기 서원의 남설로 세금의..

강화향교, 조선시대 강화유수부 중등 교육기관

강화는 고려시대 이래로 국방상 중요한 고을로 종3품인 강화유수가 고을수령이었던 도호부가 설치된 고장이다. 조선후기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 굴욕을 당한 이후에는 그 중요성이 더욱 커져서 관아가 있던 강화읍내에는 산성이 구축되었으면, 바깥쪽으로는 외성이, 해안에는 돈대가 설치되었고 관아가 있었던 곳에는 비상시를 대비하여 행궁이 설치되었다. 강화유수가 관리하던 강화향교는 고려 인종 5년(1127)에 고려산 남쪽에 세워졌던 것을 갑곶리, 서도면 등으로 이전했다가 1731년 강화유수 유척기가 현재의 위치인 강화읍 관청리로 옮겼다고 한다. 강화는 국왕이 국방상 매우 중요시하던 고장으로 서원이 많이 설치된 다른 지역과는 달리 서원이 지역 여론을 조성하고 교육을 담당하는 기능을 하지 않고, 공교육기관이 강화향교에서 전담..

달성 도동서원(사적 488호), 정통 성리학을 계승한 유학자 김굉필을 모신 조선 5대 서원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 낙동강변 경치좋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사적 488호로 지정된 도동서원이다. 이 서원은 조선중기 유학자 김굉필을 모시기 위해 세운 서원으로 조선시대 5대 서원 중 하나로 구한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살아 남은 전국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 원래는 현풍현 비슬산에 세워졌던 것이 임진왜란으로 불타버리고 1604년(선조 37)에 현재에 위치에 다시 세워졌다고 한다. 국가에서 '도동'이라는 사액을 내리고, 주변의 땅을 이 서원에 하사하였다고 한다. 김굉필은 조선전기 성리학자로 조선중기 이후 조선사회를 이끌어온 사림세력의 태두라 할 수 있는 김종직에게서 학문을 배우고, 1498년 무오사화로 평안도 희천으로 유배되었을 때 조광조에게 학문을 가르쳤다고 한다. 조선시대 사림세력이자 유학자를 대표..

고성 육영재, 학동마을에서 세운 재실

아름다운 담장으로 유명한 고성학동마을의 전주 최씨 집안에서 세운 재실인 고성 육영재이다. 원래는 초가 건물로 1723년에 세운 것을 1845년에 현재의 모습으로 고쳐 지은 것이라고 한다. 이 재실은 본관, 사랑채, 곳간채와 솟을대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마을에서 약간 떨어진 작은 계곡에 자리잡고 있다. 재실로서는 부지가 넓고 건물 규모도 큰 편에 속하는 건축물이다. 재실은 제사를 준비하기 위해 지은 집으로 제사에 참석한 사람들이 숙식을 하고, 음식 장만을 하기 위한 공간이다. 조선시대 왕릉에서 국왕이 제사 준비를 하기 위해 숙식을 하던 산을제도가 권문세가를 비롯한 사대부 집안으로 확산하면서 생겨났다고 할 수 있다. 지금은 주로 시제를 준비하거나 끝난 후 음복을 하거나 문중회의를 하는 장소로 사용하고 있다..

경남 고성 수림서원, 고려 개국공신 배현경을 비롯한 달성배씨 조상들을 모신 서원

경남 고성군에서 함안이씨의 위계서원, 허씨의 도연서원, 달성배씨의 수림서원이 모여 있는 마암면의 서원 중 고려 개국공신인 배현경을 비롯하여 달성배씨 조상들을 모시고 있는 수림서원이다. 이 서원은 구한말인 철종7년(1856)에서 새워진 서원으로 배향기능을 위주로 한 문중재실을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서원이다. 서원은 원래 학문적 업적이 뛰어난 사람의 업적을 기리고 후학을 양성하는 목적으로 그 학풍을 따르는 제자나 지역 유림들이 뜻을 설립되었는데, 조선후기 들어서면서 학문을 계승한다는 원래의 목적에서 벗어나 조상을 모시는 사당과 문중인사들이 모이는 장소로서 서원이 남설되었으며 그 폐해가 크서 영조대 이후에는 많은 규제가 있었고, 구한말에는 대원군이 전국 대부분의 서원을 철폐하였다. 이곳 수..

경남 고성 위계서원, 이인형을 비롯한 함안이씨 조상들을 모신 서원

경남 고성군 마암면에는 함안이씨의 위계서원, 허씨의 도연서원, 달성배씨의 수림서원이 가까운 거리에 자리잡고 있다. 이 세곳의 서원은 모두 지역 유림들이 학문적 업적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서원이 아니라 문중에서 뛰어난 분을 모신 후대 양성이 아닌 배향을 목적으로 세운 서원이라 할 수 있다. 대부분 구한말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대원군의 서원철페령으로 훼철되었다가 복원된 서원이다. 임진왜란 유적지인 당황포와 가까운 지역에 위치한 마암면은 농지가 그리 넓다고 볼 수는 없지만 유력문중에서 세거지로 정할 정도로 경제력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중 마암면 석마리에 함안이씨 선조들을 모신 위계서원이 마을 뒷편 조용한 골짜기에 자리잡고 있다. 구한말인 1844년에 세워진 이 서원은 연산군때 김종직의 문인으로 대사..

대구 달성 도동서원강당사당부장원(보물 350호), 담장이 함께 문화재로 지정된 강당과 사당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에 소재한 조선중기 문신이자 학자인 김굉필 선생을 모신 도동서원이다. 낙동강 동안 경치좋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이 서원은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서원 중 하나로 건축물로도 문화재적 가치가 있어서 강당과 사당, 강당을 둘러싼 담장이 보물 350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서원은 선조 원년(1568)에 쌍계서원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지어졌으며, 임진왜란으로 불타버린 것을 중건한 것으로 선조 40년(1607)에 선조가 직접 도동서원이라는 현판을 내린 사액서원이 되었으며, 구한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제외된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 도동서원은 문루인 수월루, 한주문, 강당인 중정당, 사당이 일렬로 배치되어 있으며, 유생들의 기숙사인 동.서재, 목판을 보관하던 장판각과 서원 관리인 숙소인 ..

대구 달성 이양서원, 청백리 곽인방을 모신 서원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면에 소재한 이양서원이다. 대구 인근 낙동강변 경치가 아름다운 현풍면에 있는 김굉필을 모신 도동서원을 찾아 가는 길에 있는 그리 유명하지 않은 서원이다. 조선 세조때 청백리인 곽안방을 모시는 서원으로 조선 숙종때 사당인 청백사에서 출발하여 서원으로 발전하였다고 한다. 구한말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던 것을 해방 이후에 복원하였다고 한다. 지역유림들이 명망이 높은 학자를 추모하기 위해 설립한 일반적인 서원과는 달리 문중에서 조상을 모시기 위해 설립한 조선후기에 건립된 서원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양서원은 지금은 숲으로 가려져 있지만 낙동강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자리잡고 있는 서원으로 마을과는 약간 떨어져 있다. 서원의 건물배치는 동쪽에 사당인 청백사를 두고, 서쪽에 강당..

대구 달성 육신사, 박팽년 후손들이 사육신을 모시는 사당.

대구광역사 달성군 하빈면 묘리는 낙동강 동안에 자리잡고 있는 마을로 사육신 중 한명인 박팽년의 후손들이 모여사는 묘골마을이라는 순천박씨 집성촌이다. 박팽년 후손은 단종복위를 꽤하다 죽은 사육신 가운데 유일하게 후손이 살아남은 가문으로 사육신이 복권되면서 조선후기에는 관직에도 많이 진출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마을은 낙동강 동안에 자리잡은 달성군 하빈면에서도 양반들이 모여살았던 마을로 상당한 수준의 경제력이 있었던 모양이다. 묘골마을 안쪽에 위치한 육신사는 세조 때 사육신인 여섯분을 모시는 사당으로 원래는 인근에 있던 낙빈서원내 있던 하빈사에서 모셨는데 대원군의 서월철폐령으로 없어졌다가 1970년대 전국적으로 실시된 '충효위인 유적화사업'의 일환으로 건립되었다고 한다. 원래 하빈사에는 박팽년만을 모셨으나 ..

대구 달성 낙빈서원, 박팽년 후손들이 사육신을 모신 서원

낙빈서원은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묘리에 소재하고 있는 서원이다. 이 곳은 사육신 중 한명인 박팽년의 후손들이 정착한 달성군 묘골마을에서 약간 떨어진 낙동강변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다. 본래 이곳에는 박팽년을 모신 사당이 하빈사가 있었으며, 현손인 박계창이 사육신이 나타난 꿈을 꾼 후 사육신 여섯분을 함께 제향했으며, 인근에 강당을 건립하여 낙빈서원을 세웠고 1694년에는 숙종으로부터 사액을 받은 사액서원이 되었다고 한다. 현재의 낙빈서원은 구한말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것을 일제강점기인 1924년에 강당만 복원하였다고 하며, 사당인 육신사가 1970년대에 후손들이 집성촌인 묘골에 건립됨으로써 현재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낙빈서원은 후학을 양성하던 서당에서 출발한 초기의 서원들과는 달리 문중에서 ..

성주향교 대성전과 명륜당(보물 1575호), 동묘서학의 특이한 공간 배치

대구광역시와 낙동강을 경계로 서쪽편에 자리잡고 있는 경북 성주군은 가야연맹체 중 하나인 성산가야가 있었던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고장이다. 고려초 지방호족인 이총언이 태조왕건을 도운 공으로 경산부로 승격되기도 했으며, 조선초 태종대 전국적인 군현제 개편때에는 성주목이었으나, 인근 대구에 경상감영이 있었던 까닭에 조선시대에는 작은 규모의 고을인 성산현으로 존속되어 왔던 것으로 보인다. 성산현 관아 소재지는 성산가야 고분군이 인근에 있는 성주읍 경산리로 옛 관아 건물로 동헌인 성산관과 관아에서 운영하던 중등교육기관인 성주향교가 남아 있다. 옛 성산현 관아가 있던 성주군 경산리는 읍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읍성 북쪽 낮은 구릉에는 이지역 중등교육기관이 성주향교가 있다. 성주향교는 조선 태조 7년에 세워진 향..

안동 병산서원, 서애 류성룡선생을 모신 하회마을 인근 낙동강변에 위치한 아늑한 서원

안동 하회마을에서 낙동강 상류방향으로 조금 떨어져 있는 안동시 풍천면 병산리에 소재한 병산서원은 서애 류성룡 선생을 기리기 위해 만든 서원이다. 병산서원은 고려시대부터 이 지역의 교육기관이었던 풍악서당을 1752년 서애 류성룡이 이 곳으로 옮겨오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서애 류성룡은 퇴계 이황의 제자로 원래는 학봉 김성일과 함께 도산서원에 위패를 모실려고 했으나 두분의 서열관계로 다툼이 있었으며, 서애 류성룡 선생은 그의 집이 있었던 하회마을 인근 이곳 풍악서당에 사당인 존덕사를 짓고 위패를 모셨고, 학봉 김성일 선생은 임하댐 아래 천전마을 인근에 호계서원을 세우고 위패를 모셨다고 한다. 낙동강변 경치가 수려한 곳에 자리잡은 병산서원은 우리나라의 많은 서원 중에서 도산서원가 함께 그 입지가 빼어난 곳으로..

영주 소수서원, 고려 유학자 안향을 모신 최초의 서원

조선시대 사설교육기관은 서원은 성현에게 제사를 지내며 후학을 양성하던 곳이다. 서원이라는 이름은 당나라에 집현전서원 등의 설치에서 유래하였다고 하면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은 주선 중종때인 1542년 풍기군수 주세붕이 성리학을 우리나라에 소개한 안향 선생을 모시는 백운동서원이다. 이 서원은 명종때인 1550년 퇴계 이황의 건의로 임금이 '소수서원'이라는 이름을 적은 현판을 내리는 최초의 사액서원이 되었다. 경북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에 있는 최초의 서원인 소수 서원은 풍기군수였던 주세붕이 세운 서원이지만, 퇴계 이황이 풍기군수로 재직하던 시절에 사액서원으로 지정되는 등 전국적으로 명성을 얻게 된 것으로 보인다. 소수서원은 최초의 상액서원답게 건물의 칸수도 많고 큰 규모의 서원으로 이 곳에서 공부하던 유생들이 ..

파주 자운서원과 율곡 이이선생 유적지

파주 자운서원은 율곡 이이 선생과 그 제자인 김장생, 박세채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서원으로 원래의 건물들은 구한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과 한국전쟁 등으로 대부분 없어지고, 해방후 유림들이 국가의 지원을 받아서 과거자료 고증을 통해서 복원한 건물들이라 한다. 건물자체로는 문화재로서 가치는 없지만, 이 곳이 율곡 이이 선생을 비롯하여 그 어머니인 신사임당의 묘역이 가까이 있기때문에 선생이 태어난 강릉의 오죽헌과 함께 율곡 선생의 유적지로서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자운서원은 앞쪽에 강학공간인 강인당과 기숙사인 동.서재가 있고, 뒷쪽에 사당인 문성사가 배치되어 있는 전학후묘의 공간배치를 하고 있다. 자연경관이 뛰어나거나 여행객들이 빈번하게 다니는 교통로에 위치한 서원이 아니고, 율곡선생 가족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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