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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곽(산성_읍성) 225

포천 반월성 (사적 403호), 한강유역과 함경도를 연결하는 교통로를 지키는 신라산성

포천 반월성은 포천시 군내면 구읍리에 있는 해발 283.5m의 청성산을 중심으로 축조된 테뫼식 산성으로 그 형태가 반달과 같다고 하여 반월산성이라고 부른다. 포천지역은 추가령지구대를 따라서 형성된 서울과 함경도 동해안 원산, 함흥지역을 연결해 주는 주요 교통로 위치해 있는 지역으로 동쪽으로는 백두대간에서 뻗어내려온 한맥정맥의 험준한 산악지대로 화악산, 명지산, 운악산 등 해발 1,000m 이상의 산들 즐비하며, 서쪽으로는 소요산, 왕방산 등 500m 이상 놀은 산들이 연결되어 있다. 포천은 대체로 양쪽 산맥사이에 형성된 비교적 넓은 분지에 형성된 넓은 농지들로 이루어져 있다. 반월성이 있는 청성산은 포천지역 분지의 북쪽 끝에 있는 그리 높지 않은 봉우리이지만, 지형적으로 남쪽분지의 평야지대와 철원지역으로..

하남 이성산성(사적 422호), 삼국시대 한강유역을 장악한 신라가 쌓은 산성

경기도 하남시 춘궁동에 위치한 이성산성은 삼국시대 신라가 쌓은 산성이다. 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해발 209m의 이상산 정상을 중심으로 남쪽편 계곡을 막은 형태의 포곡식 산성이다. 이성산성은 한성백제의 수도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몽촌토성, 풍납토성과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고 있어 한성백제시기에도 산성이 존재했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남아 있는 석축과 출토유물들은 대부분 신라의 것으로 보아 신라가 쌓은 산성으로 보고 있다. 이성산은 남한산성을 이루고 있는 주요 봉우리 중 청량산과 연결되어 있으며, 서울 강동지역에서 하남지역의 한강유역을 통제하기 위한 주요 군사적 거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성산성 북쪽 한강 너머로는 고구려 산성인 아차산성이 있고, 남쪽으로는 남한산성이 위치하고 있다. 이성산성은 배후의 평야지..

연천 은대리성(사적469호), 한탄강과 지천이 만나는 지점에 쌓은 고구려군 요새

연천군 전곡읍 선사유적지 동쪽편에 위치한 은대리성은 삼국시대 고구려군이 쌓은 요새이다. 연천 호로고루, 당포성과 임진강을 건너는 주요 도하지점에 쌓은 강안 평지성으로 주민들이 거주하는 주변지역을 관리하기 행정의 중시지인 읍성은 아니고, 전략적 요충지에 쌓은 군사적인 성격의 요새라 할 수 있는 곳이다. 연천 은대리성은 한탄강의 지류인 차탄천이 한탄강과 만나는 지점에 형성된 삼각형의 하안단구 위에 축성된 것으로 군사들이 임진강을 걸어서 건널 수 있는 주요 도하지점을 관리하고, 서울과 함경도 지역을 연결해주는 교통로인 3번국도 주변을 통제할 수 있는 군사적 거점이라 할 수 있다. 한탄강과 지천인 차탄천이 만나는 하안단구 위에 축성된 은대리성은 동쪽을 제외하고는 절벽이 자연 성벽 역할을 하고 있으며, 실제로 고..

파주 육계토성, 임진강 남쪽에 위치한 백제계 토성

임진강변 남쪽에 파주시 적성면 주월리에 자리잡고 있는 백제계 토성인 육계토성이다. 초기 고구려와 백제의 경계지역으로 보이는 임진강 남쪽 파주의 평지에 자리잡고 있는 삼국시대 유적이지만 농경지로 사용되었고 정비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 구분을 하기 쉽지 않은 곳이지만 전체적으로 서울 올림픽 공원내에 있는 몽촌토성과 비슷한 분위기이다. 이 육계토성의 북쪽편에는 고구려 성인 연천 호로고루와 당포성, 남쪽편에는 파주 칠중성이 자리잡고 있어 생생한 격전의 현장임을 느낄 수 있다. 이 곳은 임진강에서 수심이 가장 낮은 걸어서 도하할 수 있는 가여울이 있어 군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지점이었으며, 구불구불하게 흐르는 임진강이 북쪽으로 돌출해 있는 지점으로 가여울과 서쪽편 두지나루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지점에 성을 쌓고 ..

연천 호로고루, 임진강변에 쌓은 고구려군의 요새

연천 호로고루성은 임진강 중류에 위치한 고구려군의 요새이다. 임진강이 지천과 만나는 지점에 형성된 삼각형 모양의 지형에 쌓은 강안평지성이다. 이 곳은 동쪽을 제외하고는 약 20~30m 정도의 현무암 절벽으로 이루어져 천연의 요새라 할 수 있다. 성벽전체의 둘레는 400여m, 면적은 600여㎡로 큰 편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남벽과 북벽은 현무암 절벽을 성벽으로 삼아 상단부에 1~2m의 토축을 쌓고 목책을 설치하였고, 성안으로 출입하는 동쪽에 토축과 석축이 섞여 있는 높이 10여m의 성벽을 쌓았으며, 동벽에 성문을 두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북측 성벽에는 작은 암문을 두어 성벽 아래쪽 임진강으로 출입을 할 수 있도록 한 것으로 보인다. 임진강 유역은 한반도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어 고구려,백제, 신라 ..

광주 남한산성 관아 건물인 침괘정과 천흥사종이 걸려 있었던 종각

광주부가 있었던 광주부에는 행궁을 비롯하여 많은 관청들과 성벽을 관리하던 사찰과 큰 마을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대부분 없지고 관아건물로는 군사훈련을 지휘하던 연무당과 연못인 지수당, 무기제작소로 알려져 있지만 관아 건물이었던 것으로 보이는 침괘정 정도만이 남아 있다. 조선 영조대에 지어진 침괘정은 문헌상 기록으로 무기제작소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 건물의 형태는 온돌방과 마루바, 회랑 역할을 하는 툇마루로 구성되어 있는 집무실로 사용했던 관아 건물로 보인다. 아마도 부근에 무기를 제작하는 공방과 창고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남한산성 행궁 앞 광장에는 산성내에 시간을 알려주는 종각이 설치되어 있는데, 원래 이곳에는 국보 280호로 지정된 천흥사 종이 걸려 있었다고 한다. 조선 후기 수도 ..

광주 남한산성 행궁, 비상시 종묘와 사직 역할을 하는 좌전과 우실

남한산성은 병자호란 격전의 현장으로 조선후기에는 한양을 방어하는 중요한 군사적 거점으로 여겼기때문에 인조대 이후에 성벽을 쌓고 광주부 관아를 옮기는 등 많은 변화가 있었다. 남한산성에 행궁이 처음 설치된 것은 이곳에 산성을 크게 보강했던 인조3년이다. 조선시대에 전국 주요 거점에 행궁이 설치되었는데, 비상시 국왕이 피난하는 것을 전제로 지어진 남한산성 행궁에는 종묘와 사직을 옮길 수 있는 좌전과 우실이 유일하게 설치되어 있다. 남한산성 행궁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대부분의 건물들이 없어져서 그 터만 남아 있던 것을 2012년에 행궁 건물의 복원을 완성하여 산성도시로서의 옛모습을 조금이나마 다시 보여주고 있다. 남한산성 행궁 뒷편에 설치된 좌전은 종묘의 위패를 비상시에 옮겨놓을 수 있는 건물이며, 우실은 ..

광주 남한산성 행궁(사적480호), 비상시 국왕이 머물수 있는 행궁이자 광주부 관아 건물

남한산성에 있는 옛 광주부 관아 건물이자 국왕이 임시로 머물수 있는 행궁이 설치된 사적 480호로 지정된 남한산성 행궁이다. 이 행궁은 비상시 국왕이 임시 거처로 유일하게 종묘와 사직 역할을 하는 좌전과 우실을 두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남한산성 행궁은 일제강점기 이후 없어졌다가 최근에 옛 기록을 참조하여 복원하였다. 행궁은 국왕의 거처로 정전과 편전에 해당하는 하궐과 국왕이 머무는 내전에 해당하는 상궐로 구성되어 있으며, 서쪽편에 광주부 관아 건물인 좌승당과 광주유수의 숙소라 할 수 있는 일장각으로 구성되어 있고 국왕을 수행한 인원들이 머물 수 있는 많은 행각들로 이루어져 있다. 한강이남 일대를 다스렸던 큰 규모의 지방관청이 광주부 관아는 원래 남한산성 아래 하남시 일대에 있었으나 병자호란 이후 국방상..

경주 명활성 (사적47호), 경주와 동해안을 연결하는 교통로를 지키던 산성

경주시 보문관광단지 입구에 있는 삼국시대 산성인 명활성은 남산성.선도산성.북형산성과 함께 경주를 방어하는 외곽의 주요 산성 중 하나로 주로 동해안과 경주를 연결해 주는 교통로인 4번국도가 경주시내로 들어오는 관문에 위치하고 있다. 토함산에서 흘러내려오는 북천(알천)이 평지로 접어드는 입구이기도 하다. 명활성은 주로 동해안을 통해 접근해 오는 왜(倭)의 공격에 대비하여 쌓은 산성으로 이 성을 처음 쌓은 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기록에는 실성왕 4년(405)에 왜병이 명활성을 공격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볼 때 이전 시기부터 동해안을 통한 왜군의 침입이 여러 차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는 내물왕의 아들을 왜(倭)에 인질로 보내고, 박제상 이야기가 전해지는 등 왜(倭)와 신라의 관계가 상당히..

경주 관문성(사적48호), 만리성이라 불렸던 왜(倭)의 침입을 막기 위해 울산과의 경계에 쌓은 12km이르는 장성

경주와 울산을 연결하는 국도7호선을 중심으로 두도시의 경계가 되는 지점에 있었던 삼국시대 성벽인 관문성이다. 이 성은 왜구가 신라의 수도 경주에 침입해 오는 것을 막기 위해 쌓은 삼국시대 신라에서는 보기드문 장성(Wall)형태의 성벽이다. 경주시 외동읍 서쪽 해발 765m의 치술령 줄기 남쪽에서 시작해서 경주시 녹동리 마을과 해발 250m정도인 순금산 정상부 아래를 지나, 경주에서 울산 태화강으로 흘러드는 동천을 지나 외동읍 모화리 동쪽 산아래까지 길게 이어진 전체 12km 정도의 큰 규모의 성곽이다. 기록에 의하면 신라 성덕대에 각간 원진이 39,262명의 인원을 동원하여 쌓았다고 한다. 성벽은 길이 40~50cm로 다듬은 돌을 5단 내지 6단으로 쌓고 그 위에 자연석을 쌓았는데, 위로 쌓아 올리면서 ..

김포 문수산성(사적139호), 문수산(해발 376m) 정상의 장대지와 주변 성곽

사적139호로 지정된 김포 문수산성은 한강 하구에 자리잡고 있는 해발 376m의 문수산 정상부를 중심으로 서쪽 강화도 방향으로 연결된 2개의 산줄기와 강화도의 관문이라 할 수 있는 갑곶진을 연결하는 해안가를 성벽으로 연결하여 쌓은 산성이다. 문수산 정상부에서는 서울로 연결되는 한강수로, 김포지역의 넓은 벌판, 조선시대 국방상 중요한 요지였던 강화도가 한눈에 들어오는 전략적으로 아주 중요한 요지이다. 이 곳에는 병자호란때까지 산성이 없었으며, 그 이전에는 주로 강화도 해안을 중심으로 성곽과 군사기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이 곳에 산성을 쌓은 것은 병자호란때 청나라군의 추격을 피해 강화도를 피난할 때 나룻배를 타고 염하(강화해협)을 건너는 동안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기때문 이를 보완하기 위해 숙종대에 이 곳에서..

김포 문수산성, 남문에서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성벽길

한강이 서해바다와 만나는 해발 376m의 문수산을 중심을 쌓은 문수산성은 강화도의 갑곶진과 더불어 비상시 강화와 육지를 연결하는 뱃길의 안전에 아주 중요한 국방상의 요지이다. 문수산성은 전체 6,123m로, 서문.남문.북문과 암문 등이 있었으나 해안쪽 성벽과 성문은 무너져서 남아 있지 않고, 문수산 능선을 따라서 쌓은 성벽이 약 4,640m 정도 남아있다. 문수산성 바깥쪽에 해당되는 김포시 월곶면 지역에서 강화로 연결되는 길은 현재의 국도가 지나가는 곳과 한강변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문수산으로 막혀 있고 경사도 심한편이어서 실제로 육지에서 문수산성을 공략할 수 있는 곳은 남문과 북문의 좁은 지역뿐이다. 이 산성은 실제로 바다로부터의 침입을 막는 요새라기보다는 서울에서 강화도로 피난할 때 뱃길의 안전을 도모..

김포 문수산성, 남문인 희우루와 산성마을

김포 문수산성은 한강이 서해바다로 나가는 출구에 위치한 문수산 정상부를 중심으로 계굑을 성벽으로 연결한 포곡식 산성이다. 조선후기 숙종대에 쌓은 산성으로 강화 해안에 세웠던 많은 돈대들과 함께 비상시를 대비하여 강화도를 요새화하기 위하여 쌓은 산성이다. 둘레는 2.4km로 상당히 큰 규모의 산성으로 바다로부터 공격에 대비한 산성이라기보다는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로 피신할 때 청나라군의 공격으로 큰 곤경에 처했던 경험을 살려 육지에서 강화도의 관문이라고 할 수 있는 갑곶진까지의 뱃길을 안전하에 유지하기 위해 쌓은 산성이라고 할 수 있다. 문수산성에는 원래 3개의 성문이 있었는데 북문인 공해루, 남문인 희우루와 함께 지금은 남아 있지 않고 해안철책으로 막혀 있는 강화 방향의 취예루가 있었다. 산성내부 면적은 ..

남한산성 북문(전승문), 병자호란 최대의 패배가 있었던 곳

남한산성 북문에 해당하는 전승문이다. 이 성문은 원래 남한산성을 축조할 때 부터 있었던 성문은 아니고 인조때 신축한 성문이라 한다. 이 곳의 이름은 '전승문'이라고 부르는데 이 곳이 병자호란 당시 가장 큰 패전이 있었던 장소라서 그 사실을 잊지말자는 뜻에서 그런 이름을 붙혔다고 한다. 남한산성에서 북문은 서울 강동지역 한강유역과 연결되는 것으로 보이는데, 북문 아래쪽은 통일신라시대 한강유역을 관리하는 주요 방어시설인 이성산성과 고려초 크게 세력을 떨쳤던 광주지역 호족의 근거지인 하남 춘궁동과 연결된다. 정문격인 서문과는 달리 일반적인 성곽의 성문과 비슷한 규모로 지었으며, 이 쪽 방면으로는 계곡을 통해서 접근하기는 쉽지만, 계곡과 주변 지역이 경사가 있는 편으로 쉽게 공략할 수 없는 지형을 하고 있다. ..

남한산성, 동장대에서 북문인 전승문까지

남한산성은 한강 남쪽 청량산을 중심으로 형성된 분지를 둘러싸고 있는 산성으로 사방의 지형이 험한편으로 천혜의 요새라고 할 수 있다. 남한산성 북쪽 하남 춘궁동은 고려시대 절터인 춘궁동사지와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의 중요한 산성이었던 이성산성이 있으며, 고려초 세력을 떨쳤던 광주지역 호족의 근거지이기도 한다. 조선시대 이 지역을 관할하던 광주목 관아는 남한산성에 위치하고 있는데, 광주향교는 아래쪽 춘궁동에 있는 것으로 볼 때 원래 관아가 있는 곳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성산성 주변은 대표적인 통일신라시대 지방 유적지로 한성백제의 수도인 몽촌토성, 풍납토성과 가까이 있으며, 이성산성과 남한산성에 의지하여 외부세력의 공격에 대응하기 좋은 지리적 조건을 갖추고 있는 곳이다. 북문 아래의 계곡은 병자호란 당시 조선..

남한산성 봉암성과 한봉성, 동쪽편 벌봉과 한봉 주위 능선에 쌓은 외성

남한산성은 한강 남쪽에 위치한 해발 498m 청량산을 중심으로 북쪽의 연주봉, 동쪽의 망월봉과 벌봉, 남쪽의 여러 봉우리를 연결한 둘레 약 8km의 상당히 큰 규모의 산성이다. 남한산성의 지형은 대체로 동쪽 계곡을 제외하고는 성벽 바깥쪽은 경사가 급한편이며, 내부는 어느 정도 규모를 갖춘 분지를 이루고 있어서 천혜의 요새라고 할 수 있다. 병자호란 당시 천혜의 요새였던 이 곳에서 인조가 청나라에 마지막 항전을 하였던 곳으로 실제로 인조가 항복하게 된 것은 산성이 점령되었기때문이라기 보다는 강화도가 함락되고, 산성내에 비축한 식량이 부족하였기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병자호란 기간 중 대체로 청나라군사의 공격을 적절히 막아낼 수 있었지만, 남쪽의 검단산과 연결된 능선, 동쪽의 벌봉,한봉과 연결된 능선에서 청..

남한산성, 장경사신지옹성에서 망월봉 정상 동장대까지

남한산성은 수어장대가 설치된 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해발 497m의 청량산을 중심으로 여러개의 봉우리와 능선을 성벽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내부는 물이 풍부하고 병사와 주민이 머무를 수 있는 분지를 형성하고 있어 천혜의 요새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남쪽의 해발 542m의 검단산과 동쪽의 해발 515m의 벌봉 주변이 남한 산성 본성과 떨어져 있으면서도 능선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이곳을 통한 공격에 취약한 점이 있으며, 실제로 병자호란 당시 벌봉과 검단산 능선을 청군이 점령하여 강력한 화포로 본성을 공격하여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병자호란 이후 동쪽편에는 외성인 봉암성과 한봉성을 쌓고 남쪽편 검단산에는 신남성 돈대를 쌓았다. 또한 외성과 돈대를 엄호하기 위해 주변 여러곳에 옹성도 설치하였다. 남한산성..

남한산성, 제1암문에서 장경사 신지옹성까지

남한산성 동쪽편 성벽은 장경사에서 정상부에 해당하는 벌봉부근까지는 아래쪽은 언덕의 경사가 있는 편으로 적의 침입을 제압하기는 수월하지만, 정상부에서는 동쪽의 벌봉 주변과 능선으로 연결되어 방어가 취약했던 부분으로 병자호란 당시 청군이 동쪽편 봉우리를 장악하여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던 곳이다. 이런 까닭에 중턱부분에 장경사 신지옹성이 설치되었고, 본성 바깥쪽에 외성으로 봉암성과 한봉성이 설치되었있다. 이들 옹성과 외성들은 병자호란이 끝난후 당시 전투상황을 반성하면서 남한산성의 기능을 보완하는 측면에서 숙종대에 화포와 총포 사용을 전제로 신축된 것들이라고 한다. 남한산성을 축성하고 지키기 위해 동원한 승병들을 위해 지은 사찰인 장경사에서 언덕길을 따라서 올라가다보면 정상부에 조금 못미친 지점에 작은 출입문인 ..

남한산성, 동문에서 장경사 입구 제1암문까지 성벽길

남한산성은 한강유역이 내려다 보이는 남한산을 중심으로 둘레 8km의 석축을 쌓은 대표적인 조선시대 산성이다. 산성의 지형은 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서울 방향으로는 경사가 급한편이며, 동쪽과 남쪽으로는 크고 작은 봉우리와 연결되면서 지형이 약간 완만한 편으로 동문인 좌익문은 중부내륙지방과 연결되는 주요 교통로 중의 하나로 광주,이천을 거져서 충주와 청주 지방으로 연결된다. 남한산성 동문에서 동북방향으로는 여러개의 봉우리가 연결되어 있는 지형을 이루고 있으며, 남한산성을 건설하고 지키기 위해서 동원한 승병들을 위해 세운 사찰인 망월사와 장경사가 자리잡고 있다. 동문에서 2개의 사찰까지는 도로로 연결되어 있으며, 성곽은 동쪽방향으로 돌출된 형태로 연결되어 있다. 동문인 좌익문에서 장경사가 있는 제1암문까지는 동..

김해읍성 공진문, 김해읍성 옛터에 남은 유일한 성문

김해는 낙동강 하구 김해평야의 중심이 되는 곳으로 옛 금관가야의 도읍지이다. 삼국시대에는 금관소경이 설치되었다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대체로 종3품 부사가 수령인 김해도호부가 설치된 지역이다. 금관가야의 중심지였던 역사적 배경과 우리나라 최대 성씨인 김해김씨의 본향인 까닭에 가야와 관련된 유적들은 많이 남아 있지만, 조선시대 유적은 그리 많지 않은 편이다. 현재 김해는 김해향교와 김해관아 객사 후원, 최근 복원된 김해읍성 북문이 남아 있다. 김해읍성은 고려말에서 조선초에 우리나라 남서해안에 출몰했던 왜구에 대응하기 위해 쌓았던 읍성 중 하나로, 김해의 지리적 위치가 일본과 가까운 까닭에 상당히 견고하게 쌓았던 읍성 중 하나였던 것으로 보인다. 세종 16년에 석성으로 축조된 김해읍성은 둘레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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