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_현대 건축

벌교 구 보성여관, 소설 태백산맥에서 남도여관으로 소개된 일본식 여관 건물

younghwan 2012. 10. 14.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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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성군 벌교읍에 위치한 조정래의 소설 태백산맥의 무대로 알려진 옛 일본인 거리에는 일제강점기 교통 중심지에 위치한 소읍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철도교통의 중심지로 당시 상업이 번창했던 벌교에는 철도역을 중심으로 일본인들 거주했던 지역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해방 이후 도시화가 크게 진전되지 않았던 까닭에 여러 건물들이 남아 있는데, 그 중 원형에 가깝게 남아 있는 건물로는 태백산맥에 남도 여관으로 표현된 일본식 여관건물이었던 남도여관과 당시 서민들을 상대로 고리대금업을 했다고 볼 수 있는 금융기관이었던 금융조합건물이 있다. 그외에도 일본식 건물들을 헐어내고 70~80년대에 새로 짓기는 했지만, 일본식 거리의 모습이 많이 남아 있는 곳이다.

 벌교초등학교 앞에 위치한 보성여관은 1935년에 지어진 일본식 2층 목조건물로 소설에서는 토벌대장 임만수와 대원들의 숙소로 사용되었던 남도여관으로 소개되어 있다. 건물규모로 볼 때 지금의 여관 개념이 아니라 당시 호텔에 가까운 규모의 건물로 2층건물과 'ㅁ'자형으로 배치된 주택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남도여관
검은 판자벽에 함석지붕, 전형적인 일본식으로 지어진 2층 건물은 옛 모습 그대로이다. 일본인들은 강점기 동안 전국적으로 이런 건물들을 수없이 지었는데 그동안 무차별적으로 헐어버리고 시멘트 건물들을 짓게 되었다. 그 영향으로 이런 건물들은 구경하기 어려운 귀물이 되어가고 있는 형편이다. 역사는 문자의 기록만이 아니다. 유물을 보았을 때 설명이 필요 없이 지난 시대를 한순간에 실감하게 된다. 수난과 고통의 역사일수록 그 시대의 유물은 남겨지고 보호되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 중심거리로 소위 본전통이라고 불렸던 이 길에 이 건물이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은 퍽 다행스러운 일이다. 소설의 배경이 되었던 그 시절에도 이 건물은 여관이었고, 그때의 실제 상호는 보성여관이었다. 소설에서는 임만수와 그 대원들이 한동안 숙소로 사용한다. <출처:보성군청>



벌교읍 일본인 거리에서도 가장 큰 규모의 건물이었던 보성여관. 한옥의 건축양식과는 상당히 다른 건물로 2층 건물을 중심으로 상당히 넓은 규모의 건물들로 이루어져 있다. 지금의 여관 개념과는 다른 지역에서는 상당히 큰 규모의 호텔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보성여관 출입문. 소설 태백산맥에서 남도여관으로 소개된 이 건물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묵었던 여관 건물로 이후에 상가, 가정집 등으로 사용되다가 지금은 근대건축물로 등록되어 소설 태백산맥의 현장을 찾아온 많은 사람들이 찾을 수 있는 쉼터로 바뀌었다. 출입문에서 전형적인 일본인 상가 건물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소설 태백산맥의 무대인 벌교읍 본전통이라 할 수 있는 일본인 거리. 벌교역에서 낙안읍성이 있는 낙안벌로 연결되는 교통로에 형성된 거리이다. 2차선 정도의 당시로서는 넓은 도로를 중심으로 소읍을 이루는 공공기관, 상가 등이 들어서 있다. 지금은 70~80년대 이후에 지어진 상가건물들이 주를 이루고 있지만, 거리의 형태에 있어서 일본식 거리의 모습이 많이 남아 있다.


지붕이 함석지붕으로 바뀌었지만 미닫이 출입문에서 일본식 상가 건물의 많이 남아 있다.


일본식 2층 건물의 모습을 하고 있는 상가건물. 이 건물은 일본식 2층 건물을 하고 있지만, 지붕이나 창호에서 한옥의 형식이 많이 남아 있다. 아마도 일본식 2층 건물을 모방하여 한국사람이 만든 건물로 보인다.


벌교초등학교 정문 앞에 위치한 보성여관. 호텔 수준으로 뒷편으로도 많은 건물들이 연결되어 있다.


보성여관 맞은 편에 있는 이 건물은 소설 태백산맥에서 술을 제조하는 술도가 건물로 소개된 곳이다.

금융조합
벌교금융조합은 붉은 벽돌을 바탕으로 하고 그 사이사이에 돌을 깍아 박아 건물의 견고함과 장식적 효과를 동시에 노린, 일본인들이 관공서형 건물로 즐겨 지었던 그 모습이다. 지금도 변함없이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지난 역사를 반추하게 해주고 있다. 그 위치 또한 번화가의 첫머리인 삼거리에 자리잡아 고객들의 편리를 최대로 도모한 세심함을 보여주고 있다. 소설에서는 금융조합장 송기묵이 일제강점기부터 금융조합에 근무해 온 이력을 지닌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친일파가 척결되지 못한 이땅의 비극이 수없이 많은 분야에서 그런 식으로 기득권을 행사했음을 작가는 여러 주인공들을 통해 일깨우고 있다. <출처: 보성군청>



농민들이 주로 거주했던 낙안벌에서 벌교읍으로 들어오는 초입에는 지역 금융기관이었던 금융조합건물이 남아 있다. 주변에는 벌교읍 사무소가 있는 것으로 볼 때 이 일대에는 관공서와 관련된 기관들이 주로 있었던 곳이 아닌가 생각된다.


일제강점기에 농민들을 상대로 고리대금업을 했던 기관으로 평가받는 금융조합건물. 이 건물은 전형적인 일제강점기 공공기관 건물의 형태를 하고 있다. 건물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은 편이다.


벌교읍 농민상담소 건물로 사용되고 있는 옛 금융조합 건물


벌교읍 초입에 있던 상가건물이었던 것으로 보이는 주택들. 2층 건물은 일본식 2층건물을 모방하면서 한옥 건축 양식도 반영된 주택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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