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역사박물관] 수도 한양을 구성하는 궁궐을 비롯한 관아와 수도를 관리하는 한성부
서울은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가 새로운 나라의 수도로 1394년 건설된 철저한 계획도시라 할 수 있다. 당시 새로운 수도로 장단 불일사, 도라산, 계룡산 일대, 서울 무악(안산) 기슭 등 여러곳이 추천되었지만 북한산을 외산으로 하여 백악, 인왕, 타락, 목멱산으로 둘러싸여 분지를 이루고 있었던 오늘날의 서울 도심이 새로운 수도로 선정되었다. 수도 건설은 유교적 이념에 따라 중국 주나라의 제도를 기록한 『주례』의 「고공기」를 기본으로 하여, 풍수리리사상과 군사,경제적 여건 등을 고려하여 건설되었다.
조선의 수도 한양은 성곽으로 둘러싸인 오늘날 서울 구도심과 성저십리라 하여 도성밖 10까지를 포함하는 영역을 말한다. 수도는 주산이라 할 수 있는 백악산(북악산)을 중심으로 법궁인 경복궁이 건설되었고, 동쪽편에는 왕실조상의 신위를 모신 종묘를, 서쪽편에 땅과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올리는 사직이 세워졌다. 또한 경복궁 동쪽에 이궁이라 할 수 있는 동궐(창덕궁)이 세워졌고, 경복궁 정면에는 의정부를 비롯한 관청들이 들어선 육조거리가, 창덕궁 동쪽편에는 최고 교육기관인 성균관이, 중등교육기관인 사부학당이 도성 곳곳에 세워졌다. 육조거리 동쪽편에 청계천 광통교 부근에 상업지구인 운종가가 세워졌다. 궁궐과 주요 관청이 들어선 이후 궁궐주변에는 자연스럽게 권문세가들의 저택이 들어섰으며, 이를 북촌이라고 한다.
수도 한양은 지방행정조직이라 할 수 있는 한성부에서 수도의 행정과 사법을 담당하였다. 한성부 책임자인 부윤은 6조판서와 같은 정2품의 고위직이었으며, 그 아래에 종2품에 해당하는 좌.우윤과 실무관리들을 두었다. 한성부 아래에는 오늘날 구청에 해당하는 중부와 동.서.남.북부를 두었다. 한성부 관아는 지금의 광화문 광장 동쪽 KT본사 건물 부근에 있었다고 관아 규모는 172칸에 이러렀다고 한다. 한성부에선 일반적인 행정업무 외에 전국의 호적업무와 소송 등 민사업무를 주관하는 중앙관청의 기능도 같이 있었다고 한다.
경복궁과 창덕궁
왕조국가 시대에 궁궐은 통치의 중심이었다. 궁궐은 임금이 사는 공간이며, 신하가 임금을 뵙고 국가의 정책을 결정하고 선포하는 장소였다. 따라서 한양의 도시구조는 궁궐을 축으로 형성되고 운영되었다. 조선의 궁궐은 처음에는 경복궁 하나였는데 태정이 개성에서 한양으로 재천도하여 창덕궁을 새로 지으면서 두 곳이 되었다. 경복궁은 법궁이었고, 창덕궁은 뒤에 건설된 창경궁과 함께 이궁이 되었다. 경복궁은 으뜸 전각인 근정전을 중심으로 직사각형의 공간에 구성된 반면, 창덕궁은 인정전을 비롯한 전각들이 자연적인 지형이나 산세에 따라 배치되었다. 아울러 두 궁궐은 큰길로 한양의 동서대로와 연결되어 임금의 교화가 잘 전파되도록 하였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경복궁 행사도(18세기)와 경복궁 전도. 경복궁 행사도에는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된 경복궁에서 이루어진 궁중행사장면으로 근정전 월대 일부와 경회루의 돌기둥이 보인다.
조선의 법궁인 경복궁 정전인 근정전. 경복궁은 법궁으로 조선은 처음 건국할 때 세워전 궁궐로 임진왜란 때 불타버렸던 것으로 구한말인 고종대에 중건하였다.
새로운 궁궐, 창덕궁과 경희궁
임진왜란으로 조선의 궁궐은 모두 소실되었다. 광해군 때에 이르러 새로운 궁궐을 건설하였는데 경복궁은 복원하지 않고 창덕궁만을 재건하였다. 창덕궁이 완성된 다음에는 새문동에 경희궁을 건설하여 창덕궁은 법궁, 경희궁은 이궁인 새로운 양궐 체제가 성립되었다. 경희궁은 숭정전을 중심으로 인왕산 자락에 자리잡은 비교적 작은 규모의 궁궐이었으나 여러 임금이 거처하였다. 숙종은 경희궁에서 태어나 상당기간 이곳에 거주하였으며, 경종도 이곳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영조는 경희궁에 가장 오래도록 거주하였던 군주였다. 1868년(고종5) 경복궁이 중건되고, 이후 고종이 경운궁(현재 덕수궁)에 살게 되면서 조선의 궁궐은 기존의 창경궁과 함께 5개의 궁궐이 되었다. 도성 내의 여러 곳에 궁궐을 건설하였던 점은 조선이 가진 궁궐 문화의 특징이었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창덕궁 정전인 인정전. 창덕궁은 조선초 태종이 이궁으로 처음 세웠으며, 임진왜란 때 경복궁이 불타버린 이후 조선의 법궁으로 존재하였다.
경희궁 정전인 숭정전. 경희궁은 광해군이 궁궐을 중건할 때 창덕궁을 법궁으로 하면서 이궁으로 세운 궁궐로 서궐이라고도 불렀다. 경희궁은 일제강점기에 전각들이 대부분 훼손되고, 그 자리에 서울고등학교가 들어섰는데 최근에 정전을 비롯한 일부를 중건하였다.
경현당 어제 어필 화재첩, 1741년, 영조가 「춘추」강독을 마친 것을 기념해 숭정원.홍문관 관원들에게 경현당에서 술일 내린 일을 기록한 첩이다.
경희궁을 그린 그림
궁궐행사를 그린 그림
(궁궐의) 좌측에는 종묘를 두고 우측에는 사직을 둔다. - 『주례』 「고공기」-
국가제사를 지내는 종묘와 사직
종묘와 사직, 즉 종사는 국가를 의미하는 말이기도 하다. 전통시대에 국가를 건설하면 통치자들은 가장 먼저 종묘와 사직을 건립하였다. 조선왕조는 좌조우사의 원칙과 음양의 이치에 따라 1395년에 궁궐을 기준으로 동편에 남쪽을 향한 종묘를, 서편에 북쪽을 향한 사직을 완성하였다. 종묘는 왕실 조상의 신주를 모시는 사당이다. 처음에는 "천자7묘", "제후5묘"의 규정에 맞추어 태실7칸에 석실5칸 구조로 건립하였다. 그러다 시간이 흐르면서 증축을 거듭하여 나중에는 19칸에 신주를 모시게 되었다. 공과 덕이 있는 임금은 위패를 옮기지 않는 불천위로 예우했기 때문읻. 사직은 토지의 신인 국사지신과 곡식의 신인 국직지신에 제사 지내는 곳으로 국가의 안녕과 풍요를 비는 곳이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종묘 정전.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것으로 앞면 19칸에 이르는 큰 규모의 목조 건물이다. 불천위로 모셔진 역대국왕의 신위를 모신 건물이다.
종묘제기(16세기, 종묘광장 출토), 종묘는 조선 역대 왕의 신주를 모신 사당으로 국가에서 제작하여 관리하였다. 착준(가운데)은 가을과 겨울 제사 때 술을 담는 제기이다. 궤(왼쪽)는 보와 한쌍을 이루며 기장과 피를 담는 제기이다. 조이(오른쪽)는 봄과 여름 제사 때 술을 담는 봉황이 새겨진 제기이다.
종묘와 함께 국가를 상징하는 제사시설인 사직단. 종묘와는 달리 웅장한 모습을 보이지는 않고 있다. 이는 중국 자금성에 있는 사직단도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국립대학 성균관과 중등하교 사학
수도 한양은 정치.경제의 중심지인 동시에 교육의 도시이기도 했다. 유학을 최고 이념으로 삼은 조선왕조는 최고 학부인 성균관을 두어 우수한 인재를 양성하였다. 1398년(태조7) 숭교방(현재 명륜동)에 건립한 성균관은 생원과 진사들을 교육하고, 중국과 우리나라의 명현들에게 제사하는 기능을 갖추었다. 명륜당에서는 학생들을 교육하였고, 문묘에서는 공자를 비롯한 5성과 10철, 우리나라 18현 등의 위패를 모셨다. 1411년(태종11)에 건립된 사학은 오늘날의 중등교육과정에 해당된다. 이곳에는 성균관 관원이 파견되어 교육을 담당하였으며, 성적이 우수한 학생은 성균관에 입학할 수 있었다. 중부학당은 관방방(현재 중학동)에 설치되었으며, 동부학당은 창선방(현재 종로6가), 서부학당은 여경방(현재 태평로1가), 남부학당은 성병방(현재 남학동)에 두었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태학계첩, 1474년, 성균관 대사성 이정보의 「태학숙록」완성을 기념하여 만든 계첩으로 문묘, 명륜당, 동.서재가 그려져 있다.
성균관 강학공간의 중심건물인 명륜당. 지금도 성균관대학교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조선시대 최고의 교육기관이다.
서학 장의 추천서, 조선후기, 이병숙 등 3명을 서학 서재의 장의로 추천하는 문서이다. 서학은 한양의 사부학당 중 하나이다.
한양을 관리한 한성부
한성부는 오늘날의 서울특별시청에 해당한다. 도성의 백성들을 보살피고, 도시시설을 설치.운영하는 곳이다. 한양의 행정 및 사법을 담당하는 기관이었으며, 군사나 치안업무 등에 대해서는 병조의 삼군문이나 포도청, 형조 등과 분담하였다. 또한 수도라는 특수성 때문에 긴급한 사태가 일어날 때에는 국왕과 궁궐을 수호하는 역할까지 도맡았다. 또한 한성부는 6조와 같은 정2품 품계의 관청으로 한양을 관리하는 일 이외에도 호적업무나 토지의 소송 등에 대해서는 중앙관청의 기능을 담당하였다. 현재의 서울특별시는 행정 기능 중심의 지방자치기구이지만 한성부는 행정, 사법, 치안을 아우르는 동시에 중앙 관청의 기능도 가진 복합적인 기관이었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신증동국여지승람, 조선후기, 조선의 지리지로 한성부 부분에서는 연혁, 주요 성씨, 지형, 풍속 등이 소개되어 있다.
도성도, 1861년경, 보물 1358-1호, 김정호가 제작한 『동여도』중의 한양 지도로 도성 안의 주요 지리정보를 묘사하고 있다.
사산금표도, 18세기 후반(영조대), 혀영환 기증, 조선시대에는 서울 주변지역 내 사방의 산을 중심으로 경계를 정하여 그 안쪽에 묘지를 쓰거나 나무를 베는 것을 금지하였다. 사산금표도는 당시의 금장에 대한 경계를 표시한 지도이다. 지도 위에는 산과 하천을 따라 금장의 범위가 실선으로 그려져 있다. 사산금표도의 경계선을 살펴보면, 동쪽으로는 북한산 보현봉에서 수유동.번동.장위동을 지나는 우이천과 중량천에 이른다. 남쪽으로는 중량천에서 한강을 경계로 하여 북쪽으로는 불광동, 대조동을 지나 성산동에 도달한 후 다시 홍제천을 따라서 한강에 이른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서울역사박물관에 전시된 조선시대 관청이 밀집했던 육조거리. 지금의 광화문광장 일대에 의정부를 비롯하여 주요한 행정기구들이 밀집해 있었다. 전체적인 모습은 오늘날 광화문 광장과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경조부는 중부 징청방에 있다. 호조는 남쪽에 있고 이조가 북쪽에 있으며, 동쪽에는 큰 내가 있고 서쪽에는 큰 길이 있다. 대분은 서쪽에 있고 후분은 동쪽에 있다. - 『경조부지』「기지」 -
한성부는 광화문광장 동쪽편 지금의 KT빌딩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한다.
한성부 입안, 복제, 입안은 조선시대 관청에서 개인에게 발급해주는 인증서로, 특히 이 입안은 1395년 한성부가 설치된 후 발급된 최초의 문서이다. 입안에는 1397년 10월 세자우필선인 정구에게 훈도방의 집터 15부를 준다는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문서 뒤에는 판사 1명과 소윤 2명, 판관 2명, 참군 1명이 서명하여 그 사실을 확인하였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한양을 관리하는 사람들
한성부의 수장은 한성부판윤으로 오늘날의 서울특별시장에 해당한다. 판윤은 정2품의 중앙관직으로 6조의 판서와 같은 품계이다. 좌윤과 우윤(종2품)은 제1.2부시장에 해당한다. 그 아래에는 서윤과 판관 각각1명, 주부2명을 두었는데 서윤은 이방, 판관은 호방, 주부2명은 각각 예방과 병방, 형방과 공방의 일을 맡았다. 곧 6방 체제로 운영된 것이다. 소속관청으로는 중부를 비롯하여 동.서.남.북부가 있었으니 이들은 오늘날의 구청에 해당한다. 각 부의 수장으로는 영(종5품)을, 그 아래에 도사(종9품)을 두었다. 또한 부의 아래에는 방이 있었고 그 안에 다시 계가 있었다. 고종 때에는 5부 아래에 47방과 340개의 계가 있었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한성부 직제표, 19세기
황희초상, 17세기, 황대연 기증, 1418년 판한성부사(후에 한성부 판윤)을 지낸 황희의 초상이다. 공수자세를 취하고 뿔이 늘어진 사모를 쓰고 있다.
한성부 판윤 교지, 1678년, 이필주 기증, 이원정을 오늘날의 서울특별시장에 해당하는 한성부 판윤으로 임명한다는 문서이다.
한성부 입안, 19세기 경, 한성부에서 충청도 청풍에서 일어난 분챙을 처리하다. 한성부에서 충주에 있는 김해댁에게 발급해준 일종의 증명서이다. 충청도 청풍군 읍내면 도촌리 망월봉에 있는 김해댁 산소 근처의 나무를 마을의 한 주민이 함부로 베어서 황페화되었기 때문에앞으로 타인이 그곳에 산소를 쓰거나 나무를 벤다면 충청감영이나 해당 관청에서 엄중히 처벌하도록 하겠다는 내용이다. 토지와 관련된 민사상의 일에 대해서는 한성부에서 전국을 관할하였음을 알려주는 자료이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