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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사박물관] 육조거리, 조선시대 의정부와 육조 관청들이 들어서 있었던 광화문 광장 대로

younghwan 2013. 11. 1.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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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조거리는 조선시대 의정부와 6조를 비롯한 주요 관청들이 들어서 있던 거리로 법궁인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에서 현재의 광화문 4거리까지 조성된 대로를 말한다. 국왕이 거처하는 궁궐과 더불어 국가의 정책을 결정하고 집행하는 중요 관청들로 국가를 상징하는 거리라 할 수 있다. 지금도 넓은 대로 좌.우에 정부종합청사를 비롯하여 세종문화회관, 주한미국대사관, KT본사 건물 등이 들어서 있다. 조선시대 육조거리 동쪽편에는 국가 최고 의사결정기구라 할 수 있는 의정부를 비롯하여 이조, 서울시청이라 할 수 있는 한성부, 재경부라 할 수 있는 호조, 국가원로들을 위한 공간인 기로소가 들어서 있고, 서쪽편에는 국가 행사를 주관하는 예조를 중심으로 감사원격인 사헌부, 주요 정책을 집행하는 병조, 형조, 공조를 비롯한 크고 작은 관청들이 들어서 있었다. 육조거리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도 국가 행정의 중심 기관들이 계속들어 서 있었으며, 지금도 조선시대와 마찬가지로 광화문 4거리의 교보빌딩과 맞은편 상업시설들을 제외하면 대부분 국가 또는 공공기관들이 들어서 있다.

국가의 중추, 육조거리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 앞 대로를 육조거리라고 하였다. 이 거리의 동편에는 의정부.이조.한성부.호조.기로소가, 서편에는 예조.사헌부.병조.형조.공조가 늘어서 있었다. 이들은 임금을 정점으로 하는 관료제의 뼈대를 형성하였다. 그리고 주변으로 실무관청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이 관청들은 궁궐 안에서 임금을 보필하는 궐내각사에 견주어 궐외각사라고 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고종 초년까지 경복궁이 비어 있는 기간에도 육조거리는 한양의 대표적인 관청가로 관원들이 등청하고 퇴청하는 길이요, 예궐하고 퇴궐하는 길이었다. 이 거리는 임금의 명령이 나가고 백성들의 소원이 들어오는 통로로 임금과 백성이 만나는 접점이요, 백성들의 여론이 모이고 퍼지는 분주한 광장이었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육조거리 모형, 육조거리는 광화문 앞의 대로를 이르는 명칭으로 의정부나 육조와 같은 국가의 중추적인 관청들이 늘어서 있었다. 높은 장랑이 양쪽으로 열 지어 있는 너비 약 60m의 이 거리는 왕도의 중심가로인 주작대로였다. 이곳은 경복궁과 함께 왕이 사는 도시의 상징이었으며, 왕과 백성이 만나는 소통의 거리이기도 했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조선시대 의정부를 비롯한 주요 관청들이 밀집해 있던 육조거리는 정부종합청사, 세종문화회관을 비롯한 각종 관공서가 들어서 있는 대한민국의 중추가 되는 거리로 그 기능을 이어가고 있다.


의정부, 조선시대 최고의 행정기관으로 지금의 국무총리실과 유사한 역할을 하는 관청이다. 영의정.좌의정.우의정이 있어 이들의 합의로
국가 정책을 의결하였고, 그 아래에 육조를 두었다.


조선시대 중앙관청 건물 중에는 경복궁 동문인 건춘문 바깥쪽에 있었던 종친부 정청 건물인 경근당(왼쪽), 별채 건물인 옥첩당(오른쪽)이 북촌 정독도서관에 남아 있고, 현 정부청사 건물에 있었던 삼군부 정청 건물인 총무당이 낙산 성곽 바깥쪽에, 별채인 청헌당이 공릉동 육군사관학교 교정에 남아 있다. 당시 의정부나 육조 등 중요한 관청건물들은 비슷한 구조를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조, 중앙의 인사행정기구로 오늘날 행정안전부에 해당하는 관청이다. 문관의 인사, 국가의 공훈에 관한 사무, 관리의 근무성적 평가 등을 담당하였다.


의정부가 있었던 자리에는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오랜 기간동안 정부대변인 역할을 했던 공보처, 문화부 등이 자리잡고 있었으며, 이조가 있었던 자리에는 주한미국대사관이 자리잡고 있다.


한성부, 오늘날의 서울특별시청에 해당하는 관청으로 한양에 거주하는 백성들을 보살피고, 도시 시설의 설치.운영을 총괄하는 곳으로 한양의 행정 및 사법을 관장하였다.


호조, 인구 및 재정관계 업무를 총괄하던 기관으로 오늘날의 기획재정부에 해당한다. 호구의 관리, 각종조세의 수취, 식량과 재화의 관리 등 국가의 재정과 경제에 관한 일을 담당하였다.


한성부와 호조가 자리잡고 있는 자리에는 국가통신망의 중추를 담당하는 KT 본사 건물이 자리잡고 있다.


호조 남쪽편에 있는 관청.


기로소, 연로한 고위 문신들의 친목 및 예우를 위해 설치한 관청이다. 문관으로 정2품 이상의 실직을 지내고 70세가 넘아야만 들어갈 수 있었다.


기로소를 비롯하여 크고 작은 관청 건물들이 밀집해 있던 자리에는 지금은 교보빌딩이 들어서 있다.


기로소 남쪽편 현 교보문고 뒷편 골목으로 개울이 흐르고 있다.


최근에 도심을 재개발하면서 육조거리 동쪽편을 흐르던 작은 개천인 열천을 복원해 놓고 있다.


의정부, 이조, 한성부, 호조 등의 관아가 있었던 육조거리 동쪽편 관청 건물들


육조거리에서 상업지구라 할수 있는 동.서대로였던 운종가는 지금은 종로로 바뀌었다.


예조, 의례.교육 관계 업무를 총괄하던 기관으로 오늘날 '문화부', '교육부', '외교부'에 해당한다. 국가적인 의례와 음악, 제사의 시행, 학교와 과거의 운영, 외교 업무 등을 담당하였다. 예조는 종묘제례를 비롯하여 국가적인 행사를 주관하는 관청으로 행사연습을 위한 공간으로 넓은 마당을 두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현 정부종합청사가 있었던 자리에는 원래 예조가 있었으나, 구한말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국방을 강화하기 위하여 예조가 있었던 자리에 무반을 상징하면서 군사업무를 총괄하던 오늘날 합참본부에 해당하는 삼군부 청사를 세웠다. 이때 예조는 한성부가 있던 자리로 옮기고 한성부는 경희궁 동쪽으로 옮겼다고 한다.


예조가 있던 자리에 들어선 정부종합청사. 이곳에는 옛 관아건물로 삼군부 총무당과 청헌당이 마지막까지 남아 있었다.


중추부, 문무 당상관이면서 소임이 없는 이들에게 명예직을 주어 대우하는 관청이다. 본래 이 관청은 조선초기까지만 해도 최고의 군사기구였으나 뒤에는 고위 관료들을 예우하는 기관으로 변하였다.


사헌부, 언론 및 감찰을 수행하는 기관으로 오늘날 '감사원'과 유사한 관청이다. 국왕에 대해 간언하고, 관원들을 감찰하는 기능을 갖고 있었으며, 백성들의 억울함을 들어주기도 하였다.


사헌부와 중추부가 있던 자리는 지금은 도심공원으로 바뀌었다.


병조, 군사 관계 업무를 총괄하던 기관으로 오늘날의 '국방부'에 해당하는 관청이다. 무관의 인사를 비록하여 국방과 군사의 제반 사항, 봉수, 역참 등을 담당하였다.


형조, 법률.사법 관계 업무를 총괄하던 기관으로 오늘날 '법무부'에 해당하는 관청이다. 범죄의 조사 및 처벌, 소송, 노비의 관리 등을 담당하였다.


공조, 국토의 관리나 공사, 공예 관계 업무를 총괄하던 기관으로 오늘난 '국토해양부'에 해당하는 관청이다. 산림의 관리, 치수, 건축, 토목, 그리고 수공예 등을 담당하였다.


병조, 형조, 공조가 있었던 자리에는 해방이후에도 관청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1970년대 문화공간인 세종문화회관이 들어섰다.


공조 남쪽편 관청 건물들


공조 남쪽편 작은 관청 건물들은 대부분 개인소유의 상업건물로 바뀌었다.


광화문 광장 서쪽편 세종문화회관 주변. 관아 뒷편으로 인왕산과 북악산에서 발원한 청계천이 흐르고 있다.


청게천 개울이 흐르던 곳으로 지금도 골목이 남아 있다.


왕의 행렬, 조선시대 국왕은 사직과 종묘의 제사, 왕릉으로의 행차, 군대의 사열, 사냥 등의 일이 있을 때에 궁궐밖으로 행차하였다.  국왕의 출궁 행렬은 위엄과 권위를 갖추어 이루어졌다. 백성들에게는 임금의 모습을 눈앞에서 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였다. 또한 힘없는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격쟁의 기회로도 이용되었다. 국왕의 행렬에 참가하는 관료와 군사는 560여 명으로 구성하였다. 중앙에는 국왕이 관료와 시위군들의 호위속에 어마를 타고 있다. 행렬의 맨 뒤쪽인 광화문 앞에는 왕세자가 몇몇 신하들과 함께 국왕을 배웅하고 있으며, 행렬의 앞쪽에서는 갑자기 징을 들고 나와 격쟁하는 백성의 모습이 보인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조선시대 왕의 행렬이 출발하던 광화문 앞 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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